손톱이 자라날 때 문학동네 청소년 4
방미진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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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이 사춘기이다보니 청소년문학이나 그외 그 나이에 비슷한 글과 소설은 읽어보려 노력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많이 읽는 편도 아니고 글을 읽는다고 딸들을 더 이해하고 소통하는 것은 아니다.나 또한 사춘기를 지나왔지만 무슨 계급장이라도 단것처럼 하는 녀석들의 사춘기를 좀더 이해보려 할 뿐이지 나 또한 그 시기를 거쳐왔기에 한발 물러나 보려 해도 두녀석이 함께 내게 맞붙으면 정말 혈압이 팍팍 올라고 급기야 마찰과 냉전의 시간을 갖게 된다. 이젠 큰 녀석은 조금 그 터널을 피해간듯 하여 여유를 찾아 보는데 작은 녀석이 또한 터널의 한가운데 있는지 눈만 마주쳐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아 정말 힘들다. 그러다 만나게 된 책, 하지만 우리집 책장에서 오래도록 잠자고 있었는데 큰딸이 ’엄마 내나이의 성장소설 없어’ 하길래 권해 준 책인데 녀석이 먼저 읽고는 ’엄마도 빨리 읽어봐, 몽환적으로 우리를 잘 표현해 놓았네’ 하길래 알았다고 답하고는 뒤돌아서 잊어버리고 말았다. 

한참 세상에 관심이 제일 많은 시기에 우리 아이들은 교실의 ’하얀 벽’ 에 갇혀 그 파릇파릇한 시간들을 모두 낭비하며 그야말로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오도록 열심히 책만 쳐다본다. 그렇다고 모두 꿈을 이루는 것도 아니면서 어쩔 수 없는 그 울타리 안에서 수행의 시간을 갖지만 불만은 불만대로 쌓여 늘 만나는 엄마에게 털어 놓는 이야기가 선생과 학교에 대한 불만이다. 그리고 더불어 우리나라 교육정책에 대한 불만, 그렇다고 어쩌겠는가 교실밖으로 뛰쳐나가 돈을 벌며 세상에 삿대질 할것도 아니고 할 수 있는 것이 공부이니 지금이라도 열심히 해야 나중에 후회를 하지 않지. 하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발등의 불은 보이지 않는 법이다. 등하불명이라고 등잔 밑이 더 어두운 것이다. 자신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필요성에 의해 공부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현교육정책에서.

하얀 벽, 여자들은 이상하게 화장실을 갈때 손잡고 가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점심을 먹을때 함께 하는 친구가 따로 있고 손잡고 운동장을 통과하여 집에 함께 가는 친구가 따로 있다.그런데 어느 날 부터인가 자신이 친구들에게 따를 당하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옆에 짝꿍이라도 친해져야 하는데 그녀의 존재는 있는듯 없는듯 이상하게 그녀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다. 짝꿍으로 존재했는지조차 가물가물 하다. 그런 가운데 어느 날부터인가 하얀 벽에서 소리가 나는 듯 하고 그 벽이 나를 통해 교실을 보고 있는 듯한 섬짓한 생각이 든다.하얀 벽이 살아 있는 것만 같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느낄까 하여 물어 보았지만 다른이들의 귀엔 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날 담임이 벽에 못을 박다가 심하게 다치게 되는 사고가 일어난다. 망치도 맞은 손가락은 심하게 다치고 피가 나서 벽에 선명한 자국을 남겼지만 벽은 그 붉은 피를 먹어 버리고 만다. 그러니까 벽은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지 못하도록 방어를 했던 것이다. 그 사고이후 자신이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고 짝꿍 또한 사고이후 존재가 희미해져 버렸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녀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다.그녀가 존재했던가. 안했던가.교실의 햐얀 벽을 통하여 여자아이들 사이에 당연히 존재할 수 있는 '벽' 에 대하여 거리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알게 모르게 금이 가 있는 친구와 친구사이의 벽,그 시기엔 정말 확실하게 금을 그어 놓은 것처럼 그 금을 따라 친구관계가 성립되고 생활을 함께 이루어 나간다. 벽이란 무엇일까. 마음과 마음을 나누면 없앨 수 있는 벽인데 사춘기라는 이성이 성장하고 자립하는 시기에 서로에 대한 벽을 쌓고 그 벽 위로 겨우 친구를 바라보려 한다. 벽을 허물기란 정말 힘들다. 또한 현 교육현실이 그렇게 만들기도 한다. 적이 아닌듯 하면서도 친구이면서 적인 친구, 그런 친구 사이에 벽을 쌓지 않고는 자신이 발전하고 전진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그런 현실을 공포화 하여 잘 표현하였다.

난 네가 되고, 쌍둥이인 여자 아이들 주영과 지영, 하지만 주영은 교통사고로 인하여 엄마와 아빠와 함께 그자리에서 죽었다. 함께 타고 가던 차가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고 쌍둥이중에 지영만 살아 남았다. 늘 언니인 주영을 부러워했던 지영은 순간에 자신이 주영이 되고자 한다. 아니 자신이 주영이라도 단정하고 주영이가 된다. 그렇다면 모두가 그렇게 속아 넘어갈까. 지영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부모님과 함께 쌍둥이 언니가 죽었지만 자신은 할머니와 삼촌과 살면서 어려움없이 위기를 넘기게 된다. 자신이 넘겨야 하는 것은 지영이면서 주영이가 되는 것이다. 철저하게 집에서부터 자신은 주영이라는 것을 못 박아 두고 학교에 가서도 주영의 자리에 앉아 주영의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며 주영이가 된다. 성적 또한 주영이처럼 올리기 위하여 밤을 새워 공부한다. 자신은 철두철미하게 주영이가 되었다고 여기는 순간, 주영의 친구들은 그가 지영이라고 한다. 그렇다며 지영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자신이 주영이라고 다시 못 박아 주어 주영이가 되지만 그순간 없어져야 하는 지영이가 안쓰럽고 미안하다. 더 많이 사랑해주지 못한 자신, 더 많이 아껴주지 못한 자신은 이제 사라져야만 한다. 내가 선택한 선택 때문에.가끔 그 시기엔 나와 똑같은 일란성 쌍둥이가 있더라면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숙제도 그렇고 모든 것을 쉽게 할 수 있고 눈속임으로 모두를 속여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세상에는 단 하나의 '나 자신' 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해주고 아껴주지 않으면 누가 해줄 것인가. 남이 아닌 나로 살아갈때가 행복인 것이다.

붉은 곰팡이, 그런 반지하 집에서 잠깐 살았던 적이 있다. 이십대 잠깐 힘든 시기에 반지하에서 살게 되었는데 곰팡이는 없었지만 화장실이 다른 공간보다 높았다. 화장실에 올라가려면 한번 힘을 주고 올라가야 했다. 늘 그곳에서는 빨리 벗어나야지 했던 생각이 든다. 그래서 더 실감나게 읽었다. 아버지의 미적거리는 성격 때문에 반지하 방으로 밀려나게 된 가족들, 그곳에선 엄마마져 삶의 의지를 잃었다. 그리고 그곳엔 쥐도 함께 살고 그들의 삶처럼 벽지에 곰팡이가 날마다 닦아내도 다시 피어난다. 생명력이 없는듯 하면서 늘 새롭게 태어나 그들의 삶을 위협하는 곰팡이, 그런 집이라 먼저 살던 사람들은 그들이 나타나자마자 도망치듯 이사를 한것이었다. 그들 또한 막다른 골목까지 내몰렸지만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이젠 유일한 희망이 되고 있다. 곰팡이는 집 벽에만 피는 것이 아니라 한참 차이는 어린 동생의 몸에서도 피어나고 그들의 삶 속에서도 피어난다. 곰팡이와 함께 곰팡이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에게 곰팡이를 없앨 태양을 바라보며 사는 희망적인 삶이 찾아오긴 할까. 늘 머뭇머뭇 하던 아빠, 하지만 아빠의 성격이 그런것이 아니라 아빠가 무척이나 무서움을 타고 있다는 것을 딸은 느낀다. 그에 비해 엄마는 현실적이지만 집과 함께 엄마의 삶은 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이 집을 벗어나야만 엄마도 희망을 찾고 동생의 몸에서도 곰팡이가 사라지고 아빠도 희망을 찾아 활기를 되찾을 것만 같다.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야 한다. 처음 그 집에 들어올때 뿔뿔이 흩어지듯 자신만 찾던 그들이 그 집의 곰팡이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모두 하나가 된다.마침내 희망을 찾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언제 다시 내몰려 곰팡이가 핀 곳으로 돌아올지 모르지만 그집의 곰팡에서 겨우 벗어났다는 것만 해도 희망적이다. 

손톱이 자라날 때, 손톱을 길러야 할때 손톱을 무기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자기방어이다. 그보다 무서운 무기를 아직 찾아내지 못했기에 자기방어를 하기 위하여 손톱을 기르는 소녀, 자신보다 나약한 친구들의 얼굴에 손톱으로 상채기를 내며 희열을 찾는 그녀에게 손톱이란 자신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상대방이 어떤 아픔을 겪고 있는지 가늠하지 못한다. 아직은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는 그런 시기가 아닌 자신만 방어할 줄 아는 시기이기에 역지사지를 모른다. 친구가 자신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자신은 그 손톱으로 인해 자신감을 얻으며 생활해 나간다. 하지만 어느 날 그녀의 손톱에 얼굴에 상채기를 남기던 그녀가 전학을 가고 만다. 그녀의 먹잇감인 대상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자신의 우월을 표현할 대상이 사라지면 그 자신에게 손톱은 필요할까. 아이들은 무엇으로든 자신의 나타내려 노력한다. 그것이 남에게 상처를 줘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우월감만 내세운다. 만약 자신이 상처를 입는 나약한 상대였다면 어떠했을까. 그런것을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아량이 있다면 학교폭력이나 아이들 폭력은 많이 줄어들 것이다. 무언가 자신의 힘을 남에게 나태내고 보이고 싶은 한참 힘이 솟아나는 시기, 그렇다고 남을 향해 내 손톱을 길러 세울 필요는 없다. 그건 오히려 나의 나약함을 남에게 드러내는 것과 같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것을 모른다. 한참 성숙해지려고 노력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고누다, 은어로 '꼬누다' 라는 말에서 비롯된듯 하다. 누군가를 겨냥하여 두번째 손가락으로 펴고 '둘' 이라고 외치며 진짜와 똑같은 가짜가 만들어지는 그런 능력을 가진 자, 자신이 가지고 싶은 개가 있으면 개를 향하여 두번째 손가락을 펴고 '둘' 이라고 외치기만 하면 된다. 나중에는 진짜가 가짜를 잡아 먹어 하나가 된다. 그렇게 고누다는 반에서 친구하고 싶은 여학생인 '보라2'를 만들어 방에 숨겨 놓는다. 하지만 학교에서 보라는 자신을 외면한듯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진짜 보라가 자신에게 고분고분 대해 주는가 하면 자신의 집에 가고 싶다며 따라온다. 옷장속에 보라2를 숨겨 놓았는데 말이다. 다행히 집엔 아무도 없지만 큰일이다. 진까가 가짜를 잡아 먹으면 안되는데. 그런데 집안 어디에도 보라2가 없다. 어떻게 된 일이지. 보라2를 찾아 다니는데 보라가 자신은 가짜라고 말한다. 그리고 닥친 식구들 또한 모두가 가짜라고 한다. 원세상에 모두가 가짜라니 그렇다면 이 세상에 가짜가 아닌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니 자신이 모두를 가짜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하긴 넌 아예 의심할 피요가 없었지. 넌 처음부터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거니까. 그래야 네가 한 짓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테니까 말이지.' 가짜 속에서 자신 또한 가짜가 될 수 밖에 없던 고누다, 하지만 진짜일까 가짜일까. 생각의 발상이 참 재밌는 소설이다. 남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 네개는 나를 향해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더 잘해야 한다고 한다. 남에겐 한 개지만 자신은 네 개이므로..그와 같은 상황인듯 하다. 자신이 만들어 낸 가짜들 속에서 혼자 진짜이길 원하나,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렇다면 나 또한 가짜가 되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이야기들이 음울한듯 하면서도 공포스럽고 환상적이기도 하다. 큰딸이 말했듯이 몽환적이 느낌의 소설들이지만 그 시절을 잘 표현하여 쓴 소설들은 재밌기도 하다. 나름 독특하면서도 빨리 그 속에서 벗어나야 할것만 같은, 가만히 있으면 붉은 곰팡이가 꽃처럼 스멀스멀 내 자신을 향하여 피어 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생각적인 면에서도 참 복잡한 시기를 사는 청소년, 무언가 탈출구를 생각해 내지만 자신들은 점점 늪에 빠져들듯 자신을 향하여 하얀 벽이 다가와 목을 조르듯, 자신의 삶에 닦아도 닦아도 피어는 곰팡이가 피어나는듯 뭔가 암울한 터널에 빠진듯 한 시기, 그런 힘든 자신을 위해 쌍둥이 '클론' 이라도 있더라면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오로지 그 시기를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남을 위해 손톱을 기르고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가짜가 넘쳐나는 속에서 혼자 진짜인척 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 진실로 받아 들여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그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뒤돌아보면 늘 꿈 속에서라도 다시 재현되는 그 시간이지만 한번 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오롯이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지금, 자신이 할 일이다. 그 시기를 힘들게 헤쳐 나가고 있는 그대들이여, 혼자가 아님을 옆에 누군가의 그늘이 있음을 직시하라.벽을 만들지 말고 허물어라.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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