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편지 바벨의 도서관 1
에드거 앨런 포 지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 김상훈 옮김 / 바다출판사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에드거 앨런 포우의 작품은 많이 가지고 있지만 뒤로 밀리며 내겐 기회를 주지 않는 안타까운 책들이다. 그런데 '바벨의 도서관'에서 새로 나온 책들중에 에드거 앨런 포우의 엄선된 단편들만을 담아 놓은 책은 내 맘을 사로잡았다. 그의 단편들을 읽기전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의 '심연의 공포에서 길어 올린 환상' 이라는 에드거 앨런 포우에 관한 이야기들을 읽다보니 '공포는 독일의 것이 아니라 영혼에 속하는 것이다. 공포는 그의 운명의 일부이기도 했다.' 라는 말이 왠지 '뭉크' 의 그림과 그의 삶을 보는 듯하여 그와 비교하게 되었다. 에드거 앨런 포우도 불우한 삶을 살았다. 유랑극단의 배우들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사업가인 앨런부부에게 맞겨져서 살아가게 되지만 결코 행복한 삶을 살지는 못했다. 그의 불행한 지난날들이 그의 작품속에서 유난히 빛을 발하지 않았나싶다. 보르헤스의 글을 읽고 포우의 단편을 읽다보니 모든 작품들 밑바탕에는 '공포' 라는 것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공포가 다 다른 작품들로 포도알처럼 알알이 달린 작품들은 한 편 한 편 각기 다른 특성에 재밌게 읽었다.

도둑맞은 편지, '과도한 영리함만큼 현인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라는 글 시작 전에 쓰인 말처럼 이 작품은 자신을 현명하다고 믿는 그 합리성에 빠져서 사건을 제대로 파헤치고 들어가지 못한 경찰에 대한 것을 지적한다. 경찰국장 G 씨는 나와 뒤팽을 찾아 온다. 그가 찾아와서 사건을 이야기 한다. D장관은 피해자가 보는 앞에서 뻔뻔하게 '편지' 를 보란듯이 바꿔치기를 해간다. 그리곤 그 편지를 감쪽같이 감춘다. 경찰국장은 그가 집에서 비는 시간을 이용하여 가구며 집안 구석구석을 송곳으로 찔러보면서까지 자세하게 찾아 보지만 편지는 찾을 수가 없었다. 집에 없다면 혹시 그가 몸에 숨긴것은 아닌가 하여 그를 불시에 밖에서 검문검색을 해 보았지만 역시나 그의 몸에서도 편지는 흔적조차 없었다. 그렇다면 '도둑맞은 편지' 의 행방은 어떻게 된 것일까. 경찰국장 G씨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단 뒤팽은 한달 뒤에 경찰국장이 다시 찾아와 무척 많은 현상금이 걸렸다면서 뒤팽에게 아직도 편지의 행방은 묘연하다고 말을 하는데 뒤팽은 군소리 없이 '현상금 수표'를 써달라고 하고는 '도둑맞은 편지' 를 내민다. 그렇다면 그는 경찰국장도 찾아내지 못한 편지를 어떻게 찾아 낸 것일까.

'창의성을 자기 기준으로만 바라보지. 그래서 뭔가 숨겨진 것을 찾아야 할 때는 오직 자기들이 숨겼을 만한 곳에만 주의를 기울여. 그나마 아귀가 맞는 부분이 하나 있다면 그치들이 생각하는 창의성이라는 것이 일반 대중의 그것을 충실히 대표한다는 점이겠지....경찰국장이 오랜동안 이 직업에 종사함녀서 축적한 인간 창의성에 관한 일련의 고정관념에 입각한 한 가지 원칙 또는 일군의 수사 원칙을 확대 응용한 데에 불과해...... 실패의 간접적인 원인은 D장관이 시인으로 명성을 획득했다는 이유로 그를 멍청하다고 단정해 버린 데서 찾을 수 있겠군... 논리적 오류란, 모든 시인은 멍청하다고 지레짐작해 버렸다는 사실로 귀결되네.' 장관은 시인이면서 수학자였다. 하지만 경찰국장은 그가 시인이라는 것에 주목하여 그를 멍청하다고 관주해 버리고는 그가 그동안 사건을 해결해 오던 자신의 고정관념적으로 수색을 한것이다. 자신의 오류에 빠진 것이다. 그렇지만 그보다 한 수 더 위에 있던 D장관은 너무도 쉬운 곳에 교묘하게 편지를 숨겨 놓았다. 송곳으로 찌르고 가구를 모두 파헤치듯 수색을 하지 않아도 될 너무도 쉬운 곳에 숨겨 놓았던 것이다. 뒤팽은 경찰국장의 오류와 장관의 오류를 파악하고는 그의 집에서 너무도 쉽게 '도둑맞은 편지' 를 찾아낸다. 이 단편은 '뒤팽' 이라는 인물이 등장을 하여 탐정식으로 일을 풀어나간다. 그의 단편중에는 '뒤팽시리즈' 이야기가 있는 듯 하다. 추리소설 작가들은 자신들이 자주 등장시키는 탐정이 있다. 애거서 크리스티여사는 마플여사나 포와로 형사를 등장시키듯이 '뒤팽시리즈' 는 더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이 이야기에는 모든 이들이 직업적이거나 자신들이 빠질 수 있는 오류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풀어 놓은 이야기인데 짧으면서도 재밌다. 

'병 속에서 나온 수기' 는 어쩌면 지구가 둥글어서 바다를 항해하다 보면 육지가 나오고 이어진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지구를 네모나다고 생각하여 끝까지 항해를 하면 지구 밖으로,바다 그 깊은 속으로 떨어질것이라고 생각하던 시대의 이야기를 쓴 이야기인듯도 하다. '죽음이 임박한 자가 더 이상 무엇을 숨기겠는가' 라는 첫 글귀처럼 범선을 타고 항해를 하던 이들이 범선의 뜻하지 않던 사고로 인하여 두명만 남고 모두 죽게 된다. 겨우 살아 남았지만 앞날이 까마득한 그들은 그들보다 더 큰 배를 만나게 되고 어찌하여 그 배로 옮겨 타게 된 남자가 그 배에서 겪게 되는 이야기들을 죽음직전까지를 글로 남긴 것이다. 죽음 앞에서 느끼는 '공포' 보다는 '무지' 가 나은 사고라고 생각할 정도로 이야기는 사실감이 있게 잘 그려져 있다.

밸더머 사례의 진상, 죽음이란 무엇이고 죽음직전 최면이란 무엇인가. 그 최면으로 죽음을 연장할 수 있을까. 죽음이 임박한 밸더머씨를 최면에 들게 하여 죽음과 최면에 대한 것을 실험하는 이야기인데 무척 소름이 돋는다. 그가 진짜 '죽은 것인지, 아님 최면인지' 헛갈리게 하는 밸더머의 말은 그야말로 '공포' 를 자아내게 한다. 자신이 죽음이 임박함을 느낀 밸더머는 최면술에 흥미를 갖고는 자신이 죽기 직전에 자신을 실험대상으로 쓸 것을 승낙한다. 하지만 그가 죽음직전에 최면에 든 것인지 의심이 가기도 하면서 죽음인지 최면인지 모를 공포 속에서 그는 소름돋는 말들을 쏟아 낸다. ''응. 여전히 자고 있어.. 죽으면서' '응.. 아니...나는 자고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죽어 있어' '제발 부탁이야! .... 빨리! ...빨리!... 나를 다시 잠재워 줘... 아니면, 빨리!.... 나를 깨워 줘!..... 이봐,나는 죽었어!' 그는 죽은 것일까 살아 있는 것일까. 죽음을 상대로 이런 실험은 자행되지 말아야겠다. 죽음도 삶의 일부분인데 그 죽음을 인간의 힘으로 연장을 하거나 죽음후의 의식에 대하여 인간이 좌지우지할 소지가 아니다. 마지막까지 살아 남았던 밸더머의 혀에서 '죽었어! 죽었어!' 라는 말 후에 최면을 풀자 그의 모든 것은 액체화되어 녹아 내리듯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혐오스런 부패물 덩어리로 변했다고 하니 이 얼마나 멍청한 실험이란 말인가. 죽음과 최면에 빠진 밸더머가 내 뱉는 말들은 그 자체로 '공포' 를 느끼게 한다. 

'군중 속의 사람' 이란 작품은 철저하게 군중 속에 외톨이처럼 혼자가 된 사람에 대하여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을 읽으며 문득 로맹가리의 <그로칼랭>이 생각났다. 외로움을 떨치기 위하여 군중속에 있으려 하지만 그 군중과 섞이지 못하는 단 한사람, '저 노인은... 심원한 죄악의 전형이자 본질이었어. 혼자 있기를 거부해. 그는 군중 속의 인간이니까 말이야. 더 이상 쫓아가 봐도 소용없어. 그래 보았자 그나 그의 행동에 관해서는 무엇 하나 알아낼 수 없을 테니까.' 낮이건 밤이건 군종 속에 있으려 하지만 고독하고 외로운 존재인 현대인들의 허상을 잘 들어낸 작품이면서 '외로움이란 것이 현대인들에게 얼마나 큰 공포' 인지 말해주는 듯 하다.

함정과 진자, 중교재판 고문실에서 고문 기계들 때문에 고도의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 스스로 만든 공포가 더욱 크게 다가온다. 위에서는 진자가 자신의 가슴을 향해 내려오고 그는 묶여 있다. 그리고 쥐떼들은 그를 몇 겹으로 둘러 싸고 그를 공격한다. 그런 쥐들이 그에게 살아날 한가닥 희망을 준다. 그가 묶여 있던 것들을 갏아 놓은 것이다. 갇힌 공간인 고문실에서 그가 살아나려고 발버둥치는 공포와의 싸움은 처절하다. 어쩌면 공포는 스스로 만드는 감옥과도 같다. 보이지 않는것에 대한 공포, 하지만 그곳에 빛이 있다면 그것은 공포가 아닌 하찮은 것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갇힌 공간이고 그 자신 또한 묶여 있고 천장에서는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할 언월도 진자가 내려오고 바닥엔 쥐떼가 들끓는다면 그곳에서 희망이 어디에 있을까. 그가 바닥까지 부딫힌 공포는 그를 더욱 밝은 '삶' 으로 이끈다. 그가 자신의 영혼이 찢어지는 듯한 단말마의 절규를 내 뿜는 순간, 누군가의 구원의 손길이 그를 공포로 부터 구출해낸다. 인간이 죽음앞에서 느낄 수 있는 공포를 극에 달하게 한 작품으로 영화의 한 장면인 '인디애나 존스' 에 나오는 장면인듯 하다.이렇듯 포우는 자신의 작품 밑바탕에 '공포' 라는 밑그림을 그리고 있어서일까 그의 작품들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삶이 불운했던 그는 죽음 이후에 불멸의 명성을 얻게 된 것 또한 아이러니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작품에서 보이는 천재성은 삶이 어느정도 밑바탕이 되지 않았나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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