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칼랭
로맹 가리 지음, 이주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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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의사협회는 낙태의 자유에 대한 반대 입장을 거득 표명하며, 입법부에서 낙태를 허용한다면 그 '과업' 은 '특정한 집행 인력' 에 의해 '특별히 지정된 장소' 즉 '낙태소' 에서 시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1973년 4월8일자 신문'  본문에 들어가기전에 쓰여진 글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이 낙태에 관한 소설일까. 무척 애매하다. 찬성을 하는 것인지 반대를 한다는 것인지 잠깐씩 낙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작가의 입장이 어떻다고는 확실하게 볼 수 없다. 소설은 쿠쟁이라는 소심하면서도 남 앞에 드러나는 것을 꺼리는 통계학을 다루는 삼십대 남자가 아프리카 패키지 여행을 갔다가 '비단뱀' 을 만나 그 뱀을 사서 가져와 키우게 되는 이야기다. 그와 같은 곳에서 일을 하는 흑인인 드레퓌스 양을 좋아하고 있지만 좋아한다고 한번도 말을 해 보지 못하고 속으로 가슴만 태우는 정말 소심남이다.

그로칼랭, 열렬한 포옹이란 뜻처럼 '군중속의 고독' 을 철처히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남자 쿠쟁, 그는 자신을 몇 시간이고 칭칭 감고는 자신을 놓지 않고 안아 주는 비단뱀을 누구보다 좋아한다. 하지만 그 뱀이라는 동물이 남에게 혐오감을 줄 수도 있고 먹이를 산 채로 삼키어 서서히 죽이기 때문에 어쩌면 그가 처한 사회를 '비단뱀' 에 비유를 했는지 모른다. 파리에 중고 사람이 천만을 넘어도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자신을 열렬하게 포옹을 해 줄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이다. 그 살은 뱀에게 먹이로 산 토끼나 쥐를 주어야 하지만 그 또한 그에겐 할 수 없는 일이라 가정부 아줌마를 고용하여 먹이를 주게 한다. 자신은 오로지 비단뱀이 감싸주는 것을 좋아할 뿐이고 두 칸짜리 방에서 자신을 맞아 준다는 것 뿐이다. 살아 있는 생명이 퇴근후나 그외 자신이 외로움에 처해 있을 때 곁에 있어 준다는 그 의지 하나만으로 그에겐 얼마나 큰 힘이 되어 주는지 모른다. 그런 그가 그로칼랭에게 산 먹이를 주는 것을 하지 못하여 신부를 찾아가 답을 듣기를 원한다. 신부는 그에게 ' 쿠쟁 씨는 사랑이 넘치는데 그 사랑을 남들처럼 처리하지 않고 비단뱀과 생쥐에게 쏟고 있다는 말이에요...... 아시겠지만 세계에는 굶주려 죽어가는 어린이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그 아이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는 게 도움이 될 겁니다.' 비단뱀이 아닌 다른 곳에 눈을 돌렸다는 그가 철저한 고독과 외로움에 봉착했을까. 사랑하는 드레퓌스 씨에게도 정정당당하게 나서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말을 비단뱀에게 말하듯 반듯하게 했을 것이다. 

그런 그가 하루는 비단뱀을 가지고 밖으로 산책을 나간다. 그러나 사람들은 혐오스런 생명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다. '편견과 증오와 경멸이 생기는 것은 인간적인 접촉이나 관계가 부족하기 때문이고, 결국 사람들이 서로 모르기 때문이다.' 서로 간에 소통이 안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사회가 발전하고 모두가 직업을 가지고 있다지만 서로간의 거리는 좁히지 못하고 벽을 쌓고 있는 것이다. 그 벽에 갇혀 있듯 하는 쿠쟁, 비단뱀으로 인하여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좀더 관심의 대상이 되지만 그럴수록 그는 자신안의 고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랑하는 대상이 있지만 그 사랑하는 드레퓌스 양에게 한번도 제대로 말을 건네보지 못하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그 짧은 시간도 여행을 하는것처럼 층마다 각나라의 여행지를 함께 여행하는 것처럼 혼자 속으로 생각하다 결국 그녀에게 이상한 말을 하는 남자로 비쳐지게 되는 쿠쟁, ' 네 지금도 같이 삽니다. 아시겠지만 파리 같은 대도시에서는 사랑한 대상이 필요하니까...' 왜 그 사랑할 대상이 그를 사랑해줄 대상이 '비단뱀' 일까. 생식을 하며 먹은 것을 서서히 자신 안에서 죽이며 허물을 벗고 요도와 항문으로 배설 밖에 모르는 동물은 왜 그는 키우고 사랑하며 비단뱀화 되어 가는 것일까.

자신의 사랑하는 여인인 드레퓌스 양에게 자신의 사랑을 제대로 전달했다만 뱀과의 이상한 동거는 일찍 끝났을 수도 있다. 드레퓌스 양이 비담뱀이 싫다고 하면 동물원으로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프리카가 고향이 드레퓌스 양은 비담뱀을 보고 혐오감을 느끼지 못하고 어느 날은 비단뱀과 지금도 살고 있냐고 물으며 그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처럼 말을 건다. 그는 그 물음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 본다. 그의 아파트에는 오르지 두사람 분의 것만 갖추어져 있다. 침대는 더블이며 그외 것은 모두 두개씩이다. 그런 가운데 드레퓌스 양이 비단뱀을 보러 오겠다고 하여 자신은 최선을 다해 식탁을 꾸미고 비단뱀이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두지만 그녀는 혼자 오지 않고 동료 둘과 함께 온다. 그렇게 하여 그의 마음이 모두에게 들통이 나고 말았다. 정말 그 순간을 기다려 왔고 잘 되면 그녀와 결혼을 생각하고 있던 쿠쟁은 일생일대의 혼란을 겪게 된다. 뱀이 허물을 벗어도 똑같은 뱀이듯 그 또한 어쩌면 결혼이라는 껍질에 쌓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벗어나 다른 자신으로 태어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많은 사람이 자기 껍질 속에서도 불편해 하는 것은 그 껍질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이 껍질로 사는 사람이 있을까. 사회에 맞추어지고 사회화 되면서 자신의 본래의 껍질을 잃어하는 것이 우리 사회인지도 모른다. 그런 속에서 뱀이 허물을 몇 번이나 벗는 것을 지켜 보았지만 그래도 역시나 뱀이다. 사회 또한 허물을 벗듯 변화한다고 해도 역시나 '사회' 일 수 밖에 없다. 그 속에서 그는 자신이 변화지 않는다면 '군중속의 고독' 을 언제고 느끼게 될 것이다. 자신은 자신안에 '자유' 가 깃들어 있다고 보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저 적응력이 부족하고 소심한 남자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 소심함이 잠시 비단뱀으로 인하여 허물을 벗는듯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쿠쟁이고 말듯 드레퓌스 양하고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녀가 그에게 말도 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만 것이다. 제비꽃이 시들까봐 물컵에 꽂아 그녀를 기다려 보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고 그는 사창가에 가서 창녀와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 그곳에서 뜻하지 않게 만난 드레퓌스 양, 그녀와 사랑의 시간을 갖고 그녀에게 결혼하자고 말을 해 보지만 그녀는 그를 자유롭게 놓아주면서 지금의 자신의 일이 좋다고 한다. 쿠쟁은 집으로 돌아와 비단뱀인지 쿠쟁인지 알 수 없는 존재로 거듭난다. '안 했지만 만찬가지에요. 별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생물학적 돌연변이를 일으켜야 할 겁니다. 탈피해봤자 그게 그거고 오히려 점점 심해지지만 할 거요.' '매일 저녁과 주말 내내 이인용 침대와 함께 지내노라면, 어쨌거나 혼자라는 것에 핑계를 만들어주는 일인용 침대 속에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혼자라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파리에 사는 비단뱀의 고독이 한껏 드러나 쑥쑥 커지기 시작한다. 비단뱀을 두르고 있어도 이인용 침대 위에 혼자 있는 것은 끔찍하다.' 자신을 칭칭 감고 놓아줄줄 모르는 비단뱀이 자신의 안식처와 같았고 자신 안에는 드레퓌스 양이라는 사랑이 자라고 있었지만  그 모든것이 오롯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비단뱀에게도 자연으로 돌아가 살아야 할 자신만의 자리가 있는 것이고 드레퓌스 양에게는 그가 아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쿠쟁은 그들이 없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새로운 변태를 해야 하는 것일까. '탈피는 착한 파충류들이 전혀 다른 종, 즉 완전히 진화된 허파를 가진 종에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일깨운다.' 그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 또한 허파를 가진 파충류이며 비단뱀과 같은 탈피를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어쩌면 다른 사람과의 '소통' 을 원했는지 모른다. 그가 사람과 좀더 가까워지기 위하여 찾았던 비좁은 중국식당, '그 식당은 비좁아서 테이블도 인간도 모두 다닥다닥 붙어 있기 때문에 아주 편안하다. 다른 테이블과 다정하게 팔꿈치를 맞대고 있기 때문에 혼자 가도 여럿이 온 기분이 든다.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면 곁에서 같이 듣는다. 내게 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가슴에 와닿는다.' 쿠쟁이 원하는 것은 누군가와 팔꿈치를 맞대고 또는 누군가와 어울려 대화를 나누며 소통을 원하고 있는데 그럴 대상이 없다는 것이다. 철처히 혼자가 되었기에 자신의 마음을 누군가에게 열지 못했기 때문에 소통의 부재 속에서 그가 감내해야 했던 외로움이나 고독이 그를 비단뱀화 하게 했는지 모른다. 

로맹가리, 필명인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도 소설을 내기도 해서 공쿠르 상을 두번이나 받는 이변을 토해낸 그가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기 위하여 택했던 '자살' 이란 극단적인 방법이 너무도 아쉬움을 남게 한다. 그의 소설은 이번이 첫 작품이다. 좀더 그를 알고 싶어 <새들은 페루에서 죽다> 와 <자기 앞의 생>을 구매를 해 놓았고 조만간에 읽어보려 한다. 소설속 쿠쟁이나 비단뱀은 강한 인상을 남겨 놓고 얼마 동안은 내게서 떠나지 못할듯 하다. 서른 일곱이지만 그가 하고 있는 일처럼 통계학적이지 못하고 사람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면서 비단뱀을 애완으로 키우며 외로움을 달랬던 남자, 희망을 놓치 않았기에 이 미터 이십센티의 비단뱀도 혐오스럽지 않게 비춰졌던 소설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쿠쟁인지 비단뱀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것처럼 나온 것을 보면 그 또한 사회에 적응을 하여 사회적 동물로 살아가지 않나 싶다. 이 소설로 인해 다른 작품들이 더 궁금하게 만드는 로맹가리, 그 또한 마지막 순간에는 그로칼랭처럼 누군가 자신을 열렬히 포옹해 줄 상대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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