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박경리 시집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2008년 5월 5일 우리문단의 큰 별인 박경리선생님이 작고하고 고인이 남긴 유고시들 39편이 한데 묶여 시집으로 나온것이다.제목에서 처럼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했듯이 작가는 욕심없이 한평생을 살아온것 처럼 마지막 길에도 훌훌 털고 가신듯 하다.팔십평생 많은 일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농부처럼 땅을 일구며 원고지와 만년필을 벗하여 지낸 겸허하게 보낸 그의 생이 우러러 보인다.
속박과 가난의 세월
그렇게도 많은 눈물을 흘렸건만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 산다는 것 중에서 -
달빛이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옛날의 그 집 중에서 -
기차를 타고
혹은 배를 타고
그런 여행은 아니었지만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는
그런 여행은 아니었지만
보다 은밀하게 내면으로 내면으로
촘촘하고 섬세했으며
다양하고 풍성했다
- 여행 중에서 -
벼개에 머리 얹고 곰곰이 생각하니
그것 다 바느질이 아니었던가
개미 쳇바퀴 돌 듯
한 땀 한 땀 기워 나간 흔적들이
글줄로 남은 게 아니었을까
-바느질 중에서 -
차분하게 자신의 삶을 정리하듯 써 내려간 시들이 가슴에 깊게 박힌다. 외할머니 어머니 천성등 자신을 뒤돌아 보는 시들에 자신이 살아온 팔십평생을 고스란히 담아 버리고 비운것 같아 읽는 내내 마음이 짠 하다. 팔십평생 글을 쓰며 여행도 글 속에서 하고 자신의 삶을 바느질 하듯 글로 다 풀어 놓은 우리문단의 큰 별,위대한 작가 박경리 선생님의 마지막 시편들이 작가의 뒷모습을 비추어주듯 고운 바느질로 이렇게 우리앞에 나와 더욱 기쁘기도 하고 오래도록 간직하고 프며 내 자신에게 채찍질을 하고 싶을때 언제 어디서나 들여다봐야 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