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 영화 - 배혜경의 농밀한 영화읽기 51
배혜경 지음 / 세종출판사(이길안) / 2017년 11월
평점 :
품절




책을 읽었다. 배혜경의 농밀한 영화읽기고마워 영화』는 총 51편의 영화를 소개한다. 보았던 영화보다 보지 않은 영화가 훨씬 많은 나는, 보았던 영화에 대한 꼭지부터 읽어 나간다. <우리도 사랑일까>는 좋아하는 벗이 선물해 주어 보게 된 영화인데, 알콩달콩한 사랑의 시작과 쓸쓸한 뒷모습이 한데 엉켜 내내 마음에 남았던 영화였다. 저자는 이 영화에 대해 이렇게 쓴다.

 



이 영화는 틈, 인생을 살면서 생기는 틈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 사이에 생기는 틈은 물론이다. 틈은 언제나 생기게 마련이다. 그건 허기 같은 것일 수 있는데 허기가 온다고 아무 것으로 배를 채우면 포만감은 잠시이고 환멸감만 더한다. … 틈이란 비우고 있을 수 있는 기회다. 그런 능력이 있을 때 틈은 관계를 더 견고하게 한다. 나와 세상, 타자와의 관계에 완충작용을 해주는 것도 틈이다. (94)

 


나는 마고가 느끼는 삶에 대한 열망, 사랑에 대한 희구가 이라는 단어로 모아질 수 있다는 걸 알지 못 했다. 그녀의 표정을 통해 어렴픗이 짐작만 했을 뿐, 알아채지 못 했다. 그랬다. 마고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기는 을 견뎌내지 못 했다. 틈이 주는 시간, 틈이 주는 거리, 틈이 주는 허기를 극복하고자 혹은 이해하고자 그녀는 그렇게 사랑하고 또 떠났는지도 모르겠다. 틈이 주는 시간 속에 갇혀 있을 수 없어서. 틈이 주는 시간을 견딜 수 없어서.

 


용서라는 주제를 전면으로 다룬 <오늘>이라는 영화는 감독의 이름을 각인시킬 정도로 강렬하다. 다큐멘터리 PD 다혜는 자신의 행복과 미래를 파괴한 17살 가해자를 용서한다. 가해자를 위해서라고 생각했지만, 1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 그녀는 차츰 자신의 용서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의심하게 된다. 자신이 쉽게 용서해버린 17살 가해자가 또 한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쉽게 용서를 말하는 것만큼 무서운 것은, 용서를 강요하는 일이다. 가해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죄하지 않았는데도, 우리는, 우리 사회는, 우리 문화는, 피해자에게 용서를 강요한다. 이제 그만하라고, 그 정도 했으면 됐다고, 이미 지난 일이 아니냐고.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니, 이제 그만 용서하라고. <혐오 사회> 속 카롤린 엠케의 말이 겹쳐진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이런 뜻이었다. 아우슈비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이제 그만 하라고 말한다. 마치 이 엄청난 일에 대한 단죄에도 요구르트처럼 유통기한이 있는 것처럼.

 


이 책을 읽으면서 제일 관심이 생긴 영화는 기네스 펠트로 주연의 <실비아>이다.  

 


새벽 서너 시, 실비아가 창작에 매달리는 시간이다. 이미 다른 여자에게로 간 남편, 홀로 두 아이를 키우며 미칠 듯이 시를 쓰며 고갈되어가고 있는 그녀가 안쓰러워 가끔 아이를 봐주며 휴식 시간을 주던 아파트 이웃노인이 있었다. … 허름한 복도 천장의 낡은 등을 올려다보며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꿈을 꾸는 그녀. 순간이었다! 생의 결정적인 순간! 똑똑똑… (290)

 


천재 시인 실비아, 계관 시인 테드 휴즈와의 결혼, 파경과 곤궁한 생활. 그리고 자살. 그녀의 이름을 구글에 넣어 검색한 후에는 테드 휴즈가 선택한 다른 여자가 애시어 웨빌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이미 9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 자살을 시도했던 실비아 생애의 마지막 불행이 모두 테드 휴즈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다. 실비아를 덜 사랑했다는 것이 그의 잘못일 수는 없다. 하지만,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던 실비아가 자신의 자리라고 선택한 가정, 사랑과 행복의 자리라고 믿었던 그 자리를 테드 휴즈는 하찮게 여겨 떠나버렸고, 실비아는 가난과 추위와 독감과 우울증과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다. 그렇다면 애시어 웨빌은? 테드가 선택한 또 다른 여자 애시어 웨빌은 그와 행복했을까?

 

She was continually distraught at his seeming reluctance to commit to marrying and setting up a home with her, while treating her as a "housekeeper".Most of Hughes's friends indicate that while he never publicly claimed Shura as his daughter, his sister Olwyn said he did believe the child was his. … On 23 March 1969, Wevill gassed herself and four-year-old Shura in their London home. She had sealed the kitchen door and window, taken and given to Shura sleeping pills dissolved in a glass of water, and turned on the gas stove. She and Shura were found lying together on a mattress in the kitchen. <https://en.wikipedia.org/wiki/Assia_Wevill>

 



실비아도, 애시어 웨빌도, 테드 휴즈와는 행복할 수 없었다. 테드는 자신이 선택한 여자를, 사랑했던 여자를,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자를 이렇게 떠나버렸다. 쉽게 버렸다.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이 책의 마지막이 실비아 이야기여서, 아프면서 슬프다.


사랑이 충만한 시간 크리스마스에 내가 만난 실비아는, 잃어버린 사랑에 절망했으니. 그 누구보다 사랑을 갈구했던 그녀는, 사랑받지 못했다. 그렇게나 열망했던 사랑이 보답 받지 못 했다.

실비아는 그리고 애시어 웨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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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12-23 23: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실비아 책을 샀는데 단발님도 같은 감상을 가진 것 같아 무척 기뻐요 :)

단발머리 2017-12-24 23:06   좋아요 0 | URL
제가 좋아하는 배우가 연기해서 그런가 비극적인 이야기가 더 슬픈거 있죠.
그리고 실비아만큼 불행했던 애시어 웨빌 이야기도 맘에 걸리더라구요.

저도 기뻐요~~ 우리가 같은 감상을 갖고 있다는 게, 그리고 그걸 서로에게 말할 수 있다는게요^^

2017-12-24 19: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24 2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8-01-03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제목이 좋으네요~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

내가 본 영화 리뷰만 먼저 골라 읽었어요~13편 뿐이지만...

단발머리 2017-12-27 09:41   좋아요 0 | URL
네~~~~ 정말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책이예요. 영화와 영화읽기가 천생연분처럼 잘 어울려서 저도 좋은 시간을 보냈어요.
물론 저는 본 영화가 거의 없어서~~ 영화 읽기가 주였지만요~~ ㅎㅎㅎㅎㅎㅎㅎ

잘 지내시죠~~~~~
올해도 너무 수고많으셨어요, 순오기님~~
한 해 마무리 잘 하시고요~~복되고 희망찬 한 해 맞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