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아닌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평점 :
품절


 

 


<상류엔 맹금류>

 


나는 오래전에 제희와 헤어졌다. 헤어질 무렵엔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나는 것이 없다. 나눈 대화가 거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즈음엔 제희네까지 갈 일이 있어도 안에는 들르지 않고 집 앞에서 헤어졌다. (65)

 

 

나는 오래전에 제희와 헤어졌다. 수목원 나들이가 있고 이 년쯤 지난 시점이었을 것이다. 헤어질 무렵엔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모르겠다. 무슨 일을 계기로 헤어지게 되었는지도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째서일까? 그날의 나들이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는데. (86)

 

 


황정은 소설집 『아무도 아닌』을 읽었다. 단편 전부를 읽은 건 아니고, <상류엔 맹금류>, <상행> 그리고 <명실>을 읽었는데, 2014 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서 읽었던 <상류엔 맹금류>가 좋았다. 전에 읽고 다시 읽으니 좋은 건지, 이 작품이 내게 맞는 작품이라 그런 건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상류엔 맹금류>가 좋았다.

 



지난번에 읽었을 때는, 이 부분이 좋았다.


 

제희네 부모님은 비탈 위쪽을 단념하고 근처 식물원이나 둘러보자고 말했다. 피곤해 보였고 나들이에 관한 의욕도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느리게 이동했다. 나는 비탈을 다 내려온 곳에서 아까는 보지 못 했던 안내판을 보았다. 맹금류 축사라고 적힌 안내판이 화살표 모양으로 비탈 위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뒤처진 채로 그 앞에 한동안 서 있다가 일행에게 돌아갔다.

위쪽에 맹금류 축사가 있더라고 나는 말했다. 똥물이에요.

저 물이 다, 짐승들 똥물이라고요. (86)

 

 


지난번에 읽었을 때는, 이 단락이 주는 충격이 좋았다. 제희네 가족과의 수목원 나들이. 제희네 아버지는 신분증을 가져오지 않았고, 자동차 안에서는 에어컨디셔너를 켜나 마냐 문제로 입씨름이 벌어졌다. 정성껏 준비한 도시락이 너무 많아 산책길에 어울리지 않는데도, 제희네 어머니는 다 필요한 거라며 몽땅 가지고 가야한다고 고집했고(75), 뜨거운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짐을 쌓고 내리고 다시 쌓기를 반복하던 제희는 고무줄을 당기다가 수리 발톱처럼 생긴 금속 고리에 복사뼈를 다쳤다. 제희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제희를 카메라에 담아보려 했지만, 누군가는 앵글 바깥에 있어 결국 무궁화와 반송, 당단풍을 찍었다. 늙어버린 제희네 아버지와 그를 원망하는 제희네 어머니.

 


깎아낸 산비탈과 야트막한 물이 흐르는 계곡에 이르러, 제희네 어머니는 아래로 내려가고 싶다고 말했다. 제희네 아버지가 동의했다. ‘는 그게 싫었다. 무엇보다도 직관적으로 그 장소가 싫었고, 눈물이 날 정도로 그리로 가고 싶지 않아서 다른 곳을 찾아보자고 했다. (83) 하지만, 결국 그 계곡 어디쯤에 돗자리를 펴고 도시락을 먹게 되는데그 다음이 이렇다.

 

 


위쪽에 맹금류 축사가 있더라고 나는 말했다. 똥물이에요.

저 물이 다, 짐승들 똥물이라고요. (86)

 


 

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생각한다. 만약 가 제희네 부모님과 함께 맹금류 축사 아래서의 점심 만찬을 마음껏 즐겼더라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그편이 모두에게 좋지 않았을까. 그러는 게 옳지 않았을까. (87) 그리곤 생각한다.

 


어째서 제희가 아닌가. (87)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부딪히는 순간이 있다. 첫눈에 반한다는 건 내 마음이 흘러가 그에게 가 닿았다는 뜻이고, 내가 그 사실을,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이 내 몸을 떠나 그에게로 흘러가버렸다는 걸 눈치챘다는 뜻이다.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와 상관없이, 서글프고 외로운 일방통행일지라도, 이미 그렇게 되어 버렸음을 알아채는 순간이 있다. 극적으로 연출된, 영화같은 장면이 아니더라도, 내 마음이 나도 모르게 움찔대는 그런 순간 말이다.

 


어째서 제희가 아닌가,는 왜 안 되는가,의 문제다. 제희와 제희네는 무뚝뚝해 보이고 다소간 지쳤지만 상냥한 사람들인데 (87), 나에게 친절하고 다정하고, 그리고 좋은 사람들인데. 그런데도 제회와는 헤어졌다. 무슨 일 때문인지도 기억나지 않은 채로 그렇게 헤어졌다. 수목원 나들이에서의 그 사소한 어긋남이, 불편함들이 나와 제희를 멀어지게 한 걸까. 제희네 아버지의 사람 좋은 웃음이, 제희네 어머니의 억지가, 계곡 바닥 돌의 노란 줄무늬가, 맹금류 축사 안내판이, ‘와 제희를 헤어지게 한 걸까. 모른 척 마주 앉아 웃어 주지 못한 나 때문인가. 등지고 앉아 먹지 않는 나, 그런 나를 눈치 챈 제희 때문인가.

 


무엇 때문에 는 제희와 헤어졌는가.

 


어째서 제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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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6-12 05: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아, 마치 칼이 꽂힌 듯 찍으셨군요.

단발머리 2017-06-12 14:59   좋아요 0 | URL
사진 찍을 때는 그 생각을 못했는데, 말씀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책 뒷면입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