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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순간들 - 2002년 노무현 대선승리의 기록
구술자 12인 지음, 노무현재단 엮음 / 생각의길 / 2016년 11월
평점 :
김원기(2002년 노무현이 새천년민주당 국민창여경선에 나서자 당내 중진으로는 유일하게 지지를 선언. 후보의 정치 고문, 선거 캠프의 실질적 좌장)
대권을 잡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별 짓을 다하는 것이 그동안의
정치였는데, 그 사람이 협력하면은 대통령 될 가능성이 많고 그렇지 않으면 낙선할 것이 십중팔구인 상황에서
‘자리 약속하는 짓하고 대통령은 안 되겠다’라는 결심을 해서
단호히 거절할 수 있는 정치인은 노무현밖에 없을 거예요. 나는 그것이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의 남다른 면모를
웅변해 주는 좋은 일화라고 생각해요. 사실 내가 가장 감동받은 것의 하나가 그 사건이었어요. (42쪽)
이해찬 (2002년 대선에서 새천년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기획본부장)
여론조사 상으로 단일화한다고 할 때는 한 80만 표 이기는 걸로 나왔었거든. 근데 결과는 50 몇 만 표 이겼잖아요? 한
20만 표는 달아난 거지. 마지막에 인터넷이나 젊은 사람들 전화가 안 터졌으면 질 뻔했지. 나중에 들어 보니까 그날 하루에만 2천만 통화가 이뤄졌다고 하더만. KT 역사상 최고라고 그러더구만. 그게 전부 투표 독려하는 전화인
거지. (SK 텔레콤 집계에 따르면 이날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 두 시간 동안 통화량은 1천 800만 건에 달했다. KT는 18일
밤 11시부터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시외 통화량이 1천만 통에 달해 평상시보다 30%이상 증가했고, 서울 시내 통화량까지 합하면 총 통화량이 2천만 건에 이른다고 밝혔다.) (74쪽)
이재정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 주임사제, 2002년 대선에서 후보
교육특보, 중앙선거대책위 유세본부장)
나는 늘 그렇게 생각합니다. 굽이굽이
그런 감동의 이야기들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가슴으로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결국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동력이 되는 것이지 그냥 통상적인 보통의 생각으로는 역사를 뒤집어 낼 수 없다고 생각해요. 대통령선거, 국회의원선거가 기본적으로는 정책 선거죠. 정책은 분명히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당선자를 만드는 요인은 감동입니다. 감동적인 상황이
있어야 되는 거죠. (98쪽)
안희정
(2001년 노무현 대통령후보 경선캠프 사무국장,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후보 비서실 및 대통령당선자 비서실 정무팀장)
아마 6월 지방자치선거
끝나자마자 얘기가 나왔을 거예요. 내가 노무현 대통령을 모시면서 느꼈던 현실은, 우리는 우승해도 우승컵을 절대로 집에 못 가져가더라고. 내가 내
책에도 썼지만 후보가 되고 대통령이 되는 전 과정을 보면,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보면 우리의 승리에
대해서 사람들이 인정을 안 해. 안 하더라고 ‘깜이 안 되는
애한테 졌다. 이 승부의 결과를 난 인정할 수 없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래. 후보가 돼서도 당이 그러지. (125쪽)
이광재
(노무현 대통령후보 선거캠프와 새천년민주당 대통령후보 비서실 및 대통령당선자 비서실 기획팀장)
제 기억으로는 1993년도
최고위원선거 전후인가 잘 모르겠는데 광주역에 갔었어요. 저녁 술자리에 갔었죠. 누가 뭐라고 하니까 노 대통령이 그 자리에서 술잔을 깨 버렸죠. ‘내가
부족한 게 없어 가지고 민주당 하는 줄 알아? 이 나라가 이렇게 분열되면 죽는 거 아니냐. 나 같은 놈이 없으면 호남은 고립되는 거야’ 그래 가지고 자리를
숙연하게 한 적도 있었거든요. 그런 기개가 있는 사람이죠. <웃음> 그러니까 나는 노 대통령 스스로가 인생을 굉장히 절실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유인데,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그냥 느끼는 게 아니고 자기의 아픔으로 느껴서 그걸 절실하게 이해하죠. (148쪽)
그 다음에 후보 단일화 얘기 나오면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가, 단일화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다시 모였다가, 정몽준 후보가 지지 안
해 주니까 거의 후보를 협박하는 수준으로 갔다가, 단일화에 성공하고 나니까 정말 당사가 미어터지도록, 엘리베이터가 네 대인가 여섯 대인데 엘리베이터를 탈 수가 없어. 그런데
마지막 하루 전날 후보 단일화가 깨졌어. 깨져 가지고 내가 일찍 출근했어요. 그 때 안희정, 명계남, 천호선, 나, 몇이 모여 있는데 정말 선거 당일 날 당사 전체의 그 썰렁함이란. 사람이 없어, 당사에. (154쪽)
유시민
(2002년 새천년민주당 국민참여경선 과정에서 후보 노무현을 도움. 개혁국민정당을
창당)
노무현이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가진 정치인이, 그 개인의 경력으로 보나 사회적 기반으로 보나 정치적 기반은 비주류의 비주류고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요소가 없어요. 근데 그 시기에 사람들로 하여금 ‘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매력적인 요소를 가진 분이었어요. 사람들이 나름대로,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노무현이라는 이 캐릭터에서 어느 한 대목인가를 자기 마음에 들어 하고 ‘그래서 난 노무현’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해 준 사람이에요. 많은 결점과 더불어서 많은 미덕을 가진 분이었잖아요. 이분이 지금
대선에 나온다면 안 된다고 봐요. 또는 그전에 나왔더라면 역시 안 됐으리라고 봐요. 이거는 그때 딱 일회적으로 벌어진 사건이었어요. 그리고 그런 캐릭터를
가진 분이 대통령이 되는 일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동안 안 생길 거라고 봐요. 우리나라 같은 조건에서는
대통령이 될 수 없는 분이에요. (214쪽)
문성근 (늦봄 문익환의 3남. 2001년부터
‘노사모’, ‘노문모(노무현을
지지하는 문화예술인 모임)’ 활동을 통해 노무현을 응원)
우리의 국민후보 노무현. 군사독재
잔존세력과 족벌신문의 공격으로, 그 스스로 자신있다고 얘기하고 있지만,
온 몸에 피멍이 든 채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다 찢어진 민주당 깃발 들고 서있습니다. 애초에 이 깃발을 만들어 세울 때 달려들었던 사람들이 마치 개뗴처럼 달려들어서 스스로 자기 깃발을 찢어발기고
있습니다. 그렇게 찢어발기는 동안 이 깃발도 한 번 본 적 없는 우리 노무현 후보는, 이 우직한 사람은, 그래도 그것이 민주화 세력의 법통을 잇고 있는
깃발이라면서 손에서 놓지 않고 벌판에 서서 비바람을 맞고 있습니다. 노무현 후보, 당당하게 얘기합니다. 외롭지 않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의 가슴에 흐르는 피눈물을 왜 보지 못하겠습니까? 편안한
길, 비단길 다 마다하고 국민을 위해서 가시밭길을 걸어온 그 사람입니다. 지역감정의 저 놓은 벽을 향해서, 제 머리 짓이기며 저항해 온 사람, 그렇게 처참하게 깨지고도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면서 우리를 울린 사람입니다. (237쪽)
탄핵이 결정나기 전날 밤부터 이 책을 읽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탄핵 결정을 앞둔 대통령을 앞에 두고, 대한민국
국회로부터 탄핵 소추되었던, 하지만 많은 수의 국민들로부터 ‘탄핵
무효’, ‘국회 퇴장’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던, 헌법재판소의 기각 결정으로 업무에 복귀했던 대통령이,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는지에 대한 구술 기록을 읽었다. 가까이 있지 않았다면 몰랐을 일들, 들여다보지 않았다면 사라졌을 이야기가 많았다.
2002년 3월 9일 제주를 시작으로 전국 열여섯 개 시도에서 치뤄진 민주당
국민경선에서 펼쳐진 각본 없는 드라마는 16일 광주경선이 하일라이트였다.(12쪽) 광주의 위대한 선택. 나는
그 날을 이 문구로 기억한다. 4월 5일 대구 경선에서 노무현이 누적득표 1위를 탈환하자, 전후로 이인제 측은 색깔론으로 맞섰고, 노무현의 장인 좌익 시비를
제기한데 이어 4일 노무현이 언론사 국유화와 폐간 등을 언급했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이 내용을 5일자 1면 머리기사로 냈다. 다음날 6일
인천경선장 단상에 오른 노무현은 말했다. ‘언론 국유화, 과거에도
앞으로도 그럴 생각 해 본 적 없습니다. 소유지분 제한 포기하라는 언론의 압력에 굽히지 않아 이렇게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동아, 조선은 민주당 경선에서 손을
떼십시오.’ 장인을 둘러싼 색깔론에도 ‘이런 아내를 제가
버려야 합니까? 그렇게 하면 대통령 자격이 있고 이 아내를 그대로 사랑하면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까?’라며 정면 대응했다. (13쪽)
27일 서울경선 승리를
더해 노무현은 새천년민주당의 공식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었다. 그러나(우리가
두려워하는 단어, ‘그러나’) 6.13 지방선거와 8.8 재보선 참패로 민주당은 내홍을 겪었고, 급기야 의원 34명이 주도한 ‘대통령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후단협)’이 발족되어 후보 흔들기에 나섰다. ‘후보 흔들기’에 맞선 ‘후보
지키기’ 움직임도 있었으나, 당 안팎의 후보 단일화 요구
속에 월드컵 4강 신화와 모종의 상관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월드컵 4강 신화의 열기를 등에 업는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공식 제안한다. 정몽준의
국민통합 21과 민주당 선대위와의 합의가 난항을 거듭하자, 노무현
후보는 ‘후보 단일 협상의 걸림돌이 되어 온 마지막 쟁점에 대해 국민통합 21 쪽의 주장을 전격 수용하겠다’고 발표한다. 거센 내부 반발을 무릅쓴 노무현 후보의 결정은 승리로 돌아왔다. 노무현
후보가 단일 후보로 확정되었다. 단일화가 이루어진 뒤에도 정몽준은 한동안 유세에 동참하지 않고, 공동정부 운영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서면으로 요구했으나 노무현의 강력한 반대에 뜻을 이루지 못한다. 대선을 엿새 남긴 12월 13일, 첫 공동 유세가 이루어졌다. 투표를 여덟 시간 정도 앞둔 12월 18일 밤 10시경, 종로유세 직후 국민통합 21측은 노무현과의 지지철회를 공식발표한다. 노무현은 참모들의 거듭된 설득에 정몽준의 서울 평창동 자택을 찾았지만 문은 끝까지 열리지 않았다. 지지철회가 나온 18일 밤부터 투표 참여를 호소하는 문자와 전화, 인터넷 글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고, 오후 6시에 출구조사 결과는 모두 노무현이 앞서는 것으로 나왔다. 1천 201만 4천 277표(48.9%)의 지지를 얻어 노무현은 대한민국 제 16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사료번호 16299는
2002년 12월 18일, 서울 명동 유세 모습이다. 나는 현장에 있었는데, 5개월 임산부의 몸이라 앞쪽 가까이는 갈 수 없어, 한 쪽 구석에서
흐뭇한 미소를 띄며 노후보님을 응원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같이
갔던 회사 동료와 마주보며 이야기했고, 웃었고, 그리고 박수를
쳤다. 바라보며 웃을 수 있는, 응원할 수 있는, 진심으로 좋아하는 정치인을 가질 수 있다는 게 행복했다. 행복했던
기억이 아주 선명하다.
진지하게 마치지 전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 책의 모든 구술자들은 노무현 후보의 대통령 당선에 본인이 크게 기여한 것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그
일들의 역사적 중요성과 더불어 본인의 역할에 대해 ‘긍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김원기 전 국회의장님은 이미 노무현 후보가 경선 운동할 때 사람들에게 모두 뒷받침을 해주도록 앞에서 뒤에서
지시했던 분이고, 이해찬 전 국무총리는 정몽준과의 단일화 제안에서부터 단일화가 실제로 이루어지기까지
그 모든 과정을 총괄하신 분이다. 이재정 경기교육감은 정몽준과의 단일화가 파기되었을 때 집에 가겠다는
노무현 후보를 설득해 정몽준의 집 앞까지 모셔 갔던 분이고, 안희정 충남지사는 노무현 후보가 힘든 시절, 마구 퍼붓는 화도 담아냈던 사람이다. 유시민 작가님은 노무현 후보가
식사도 잘 못하시고 좀 그런 상태일 때, 수행팀에서 ‘후보님
좀 만나달라’고 전화하는 사람이고, 문성근씨는 750만원짜리 캠프의 카메라를 본인의 돈으로 구입해 전국을 다니며 노후보를 지지하는 연설을 했던 사람이다. 명계남씨는 광주경선이 있기 직전, 노사모 회원들과 함께 돌아다니며, 대의원 다섯 명 모아 놓은 데 가서 무릎 꿇고 빌고 막 울고 하면서 노후보에게 한 표를 부탁해 광주경선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던 사람이다. 노사모 회원들은 하루 종일 자기 돈으로 택시를 타고 다니며 노무현 후보를 소개했고, 손편지 쓰기 운동을 통해 노무현 지지를 호소했다.
모든 구술자들 중, 아니
노후보를 도왔던 사람들 중 한 명만 없었어도 노무현 후보는 대통령 노무현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시간과 돈을 투자해가며, 마음과 정성을 다해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면서,
그의 당선을 도우면서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말했다. 자랑스러운, 사랑할 만한, 존경할 만한 정치인을 가질 수 있어서, 역사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대통령이 우리 앞에 있어서, 참 좋다고
말했다. 원칙을 지키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사람, 설사
그것이 자신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옳다고 믿는 그 길을 당당하게 걸어간 노무현을, 이 시대에 가질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와 같은 시대라서, 그가 우리의
지도자라서. 그가 우리의 대통령이라서.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로, 2002년 12월 18일이 다시 시작됐다. 좋아하는
사람이, 존경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모습을 기다렸던 그 밤이, 추억이
아니라 미래로 펼쳐지려고 한다. 이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