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이 없는 사람에게는 다음주의 일정 하나, 다음달의 일정 하나가 무척이나 큰 법이어서 약속 없는 내게 ‘4월 11일’의 약속은 아주 중요한 일정이었다. 집에서 이루어지는 약속이어서 집을 쓸고 닦고 치워야 했는데, 시작이 ‘집도 좀 치우고’였다면 나중에는 ‘집을 치우는 게 우선’이 되어버려 중간중간 쉬는 시간에 책을 펼치기는 했지만 집중해서 읽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람의 일은 또 알 수 없는 것이어서 부담100배의 일이지만 아무튼 집을 쓸고 닦고 이모저모 소소한 것들을 준비하며 오늘 ‘4월 11일’을 그렇게나 기다렸는데, 어제 오후 늦게 예상치 못 한 일이 발생해 오늘의 약속은 무기한으로 연기되고 말았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억지로라도 집을 쓸고 닦고 치우며 바로 오늘을 기다려왔는데, 결국 내 마음 깊은 곳의 소원대로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자, 그간 나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오늘 밤 느껴보려 했던 날아갈듯한 홀가분함과 자유의 느낌은 실망과 어이없음으로 대체되고 말았다. 내가 정말 원했던 것, 내 맘 깊은 곳에서 간절히 원했던 건 뭘까. 위와 아래, 앞과 뒤, 오엑스가 뒤바뀐 이러한 상황은 결국 내가 진짜 원하는 그 무엇이 이루어진것은 아닐까. 나의 진심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렇다면 원하는 것이 이루어져버린 바로 지금, 나는 마땅히 기뻐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책읽기에 대한 도전은 다른 곳에서도 있었다. 올초에도 어김없이 ‘외국어 배우기’ 혹은 ‘외국어 익히기’를 ‘올해의 결심’으로 선택했는데, 돌고 돌아 또 다시 나의 도전 상대는 ‘이 죽일 놈의 사랑’인 ‘영어’로 정해졌다. 근래에 읽은 영어 학습법 책에서 얻은 ‘팁’은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영어 학습법’이었다. ‘하루에 한 시간씩’ 꾸준히 하는 방법이 아니라, 일정기간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방법. 집에 있는 책 『Grammer in Use』를 호기롭게 펼치고 역시나 호기롭게 ‘10번 읽기’에 도전했으나, 아…. 첫 날. Chapter 5까지 15분의 읽기를 마친 후, 나는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으니, 이 세상 가장 힘든 공부법은 낭독임이 분명하다.
좀 더 쉬운 방법을 찾아보기로 하고, 영화 100번 듣기, 영화 100번 읽기 방법을 변주해 20분짜리 프렌즈 에피소드 6개 ‘100번 읽기’ 계획을 세웠다. 하루에 12시간씩 30일, 그렇게 두 달여를 공부한 사람의 공부시간이 12 * 30 * 2 = 720시간이니까, 하루에 5시간씩 22일, 그렇게 7개월을 소리내 따라 읽으면 총 5 * 22 * 7 = 770시간이 확보되는 셈이다. 계획은 세워졌으나, 그러려면 하루에 프렌즈 에피소드 15개를 읽어야 하는데, 아… 저 멀리 보이는 절망의 구렁텅이. 하루에 에피소드 3개를 읽기도 벅차다. 하지만 유투브 보며 쉬는 시간 (일명 노는 시간), 하염없이 음악 듣는 시간이 좀 줄어들기는 했다.
『페미니즘과 기독교적 맥락들』을 다 읽었고, 『여자 전쟁』, 『질의 응답』, 『비유로 말하라』를 읽고 있는 중인데, 어제 도서관에 가서는 이렇게 세 권을 대출해왔다. 북클럽 4의 제목, 『성부와 성자 자본은 어떻게 자본이 되는가』를 보고 그의 통찰과 설명에 또 다시 경이로움을 감출 수 없었다. 한마디를 보태기도 송구하지만, 고병권은 천재다. 천재가 분명하다.
“… 마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같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음으로써 비로소 아버지가 됩니다. 그런데 한 순환을 마치고 나면 둘은 하나가 됩니다. 100억은 10억을 낳음으로써, 다시 말해 10억이라는 잉여가치에 의해 자본이 됩니다. 둘은 함께 출발점에 다시 섭니다. 100억과 10억이 따로 서지 않고 110억으로 함께 섭니다. 이 신비한 과정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은 생물학이 아니라 신학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주셨으되 성부와 성자는 하나입니다.”
저자의 말은 또 어떤가.
머리는 마음 가는 쪽으로 가는 법이죠. 공부에도, 연애에도, 전쟁에도, 심지어 사기에도 천재가 있습니다. 마음 쓰이는 곳에 머리도 쓰입니다. 반대로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머리도 돌아가지 않습니다.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지요.
고병권을 사랑할까 보다. 그를 확 사랑할까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