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학원 로맨스물을 좋아하는 이유는 학교에 다닐 때 아무런 로맨스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지금은 중학생들은 물론 초등학생 들에게도 고백과 연애가 일상이지만, 내가 중학교를 다녔던 백만 년 전에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날라리라고 통칭되는 말 그대로 ‘노는 아이들’만 ‘이성교제’(이 역시 백만 년 전 단어다)를 했던 건 아니었지만, 중고등학생들의 연애가 흔한 일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 제일 친했던 친구는 중학교 1학년 때 연애를 시작했고, 중학교에서 제일 친했던 친구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연애를 했다. 제일 친한 친구 둘의 전격적인 연애는 내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친구들은 연애를 하는데, 하고 있는데, 하는 중인데 나는 왜 연애를 하지 못 하나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고등학교에서는 조금 다른 이유도 있었던 듯 하다. 실제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마음 속으로 이성 교제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좀 한심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중요한 시기에 남자한테 빠져서는… 뭐, 그런 생각들. 그렇다고 내가 전교 1, 2등에 전국에서 손꼽히는 대학에 갈 정도의 실력도 아니었는데,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는 연애를 미룰 수 있다고 혹은 미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Peter snags one. “Stop eating all my girlfriend’s cookies!” Even a year later, it still gives me a little thrill to hear him say “my girlfriend” and know that I’m her. (32)
이 문단을 읽을 때,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의 내가 생각났다. 일찍 연애를 시작한 내 친구들은 둘 다 예뻤다. 나는 그 애들이 예쁘고 그래서 인기가 있고 그래서 연애를 하게 되었다는 일련의 상관 관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예쁘지 않고 그래서 인기도 없고 그래서 연애를 할 수 없는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나는 연애를 못하는 게 아니라, 하지 않는 거라고 믿었다. 혹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물론 내가 연애를 해봐야겠다 생각했다고 해서 피터 카빈스키 같은 킹카를 만날 일은 없었을 테고 또 그 연애가 행복했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백만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는 알겠다.
가까운 친구들을 포함해 연애 중인 아이들을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마음 한 구석에는 그 애들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걸 말이다. 그냥 가볍게 말했으면 좋았을텐데. 있는 그대로 보았으면 좋았을텐데. 어, 너는 좋겠다. 남자친구가 있어서. 나도 너처럼 남자친구 있었으면 좋겠어. 나는 인정하는 게 싫어서 그렇게 부끄러워하고, 외면하고, 감추려 했던 것 같다. 자랑스러운 사람, 떳떳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은 사람이라면 다 똑같을 테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그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그녀’가 되는 일은 한심한 일이 아니다. 아니 사실 그건 자랑스러운 일이다. I’m her.
이 부분도 좋았다. 라라 진의 언니 마고가 영국인 남자친구 라비를 집에 데려와서 마고와 라비, 라라 진과 피터가 같이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다. 같이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네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라라 진은 생각한다.
Margot’s so lit up around Ravi. I once thought she and Josh were meant for each other, but now I’m not so sure. (96)
나는 한 사람에게 정해진 운명의 짝이 딱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생의 어느 순간, 어느 상황에서 사랑은 선택을 강요하기도 한다. 이건 최선과 차선의 문제라기 보다는 시간의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마고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 일방적으로 조시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후에 마고는 고향과 가족이 그리워 조시와 다시 시작해보려 하지만 이번에는 조시가 마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두 사람은 그렇게 헤어졌다. 그랬던 마고에게 새로운 남자가 나타난다. 예의 바르고 침착한 사람. 조시가 가진 많은 장점과는 구별되는 특별함이 있다. 마고는 라비와 함께 있을 때 행복하다. 환하게 밝아지고 절로 빛이 난다. 반짝반짝 빛난다.
나는 한 사람에게 정해진 운명의 짝이 딱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운명의 짝이 딱 한 사람이라고 믿고 싶기는 하다. 라라 진처럼 내가 그의 first가 되는 일에 연연해 하고 싶지는 않지만, 피터의 말처럼 그가 만났던 소녀들 중 그에게 가장 특별한 단 사람이 되고 싶다. 피터의 그녀가 되고 싶다.
라고 백만년 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내가 생각한다.
추석은 가고 오늘은 목요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