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에 한 권꼴로 <로마인 이야기>가 출간될 때마다 크게 화제가 되었던 기억이 난다. <로마인 이야기>를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책 뒤표지의 광고는 들어봄직했던, 말 그대로 ‘로마인의 시대’.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족이나 게르만족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르투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 로마인들이
광대한 제국을 이루고 번성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인가.
시리즈 15권을 다 읽었다고 해도 간단히 답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로마인 이야기>가 던진 질문은 다양하게 인용되고 회자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로마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로마인의 입장에서만 역사를 기술한 것은 아닌가 의심받았던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에서의 생생한 현장취재로 역사적 사실에 살을 붙였고, 고증이 부족한 부분은 소설적 상상력으로 채워나갔다. 기원전의 로마를 현대로 끌어온 그녀의 필력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2015년 <로마의 일인자>부터 출간되었던 콜린 매컬로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는 이번 여름에 7부가 번역됨으로써 시리즈가 완성됐다. 1부 <로마의 일인자>를 마치고 잠시 쉬는 사이, 시리즈가 완성됐다. 방법은 2가지가 있는데, 먼저는 2부 <풀잎관>을 지나 3부 <포르투나의 선택>을 건너 4부 <카이사르의 여자들>을 만나고 5부 <카이사르>와 잠시 대화를 나눈 후 6부 <시월의 말>을 차근히 읽는 방법과 따끈한 7부를 먼저 읽는 방법이다. 첫번째 방법을 선택하면 3 * 5 = 15. 열다섯권의 책을 지나쳐와야 하기에, 7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먼저 읽기로 한다. 제목과 표지가 암시하는 바, 특정한 종류의 즐거움을 예상하고 전진, 또 전진했다. <로마인 이야기> 15권을 읽으며 로마군의 전투 현장을 목격한 듯 체험하고 로마의 사회와 문화를 가까이에서 엿보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읽는 즐거움’, 글자를 ‘따라 읽는’ 즐거움으로 남아있다. 기억에 남는 건 매력만점 카이사르의 죽음에 대한 아쉬움과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호감 뿐이다.
카이사르 사후 혼돈의 시대에 로마 최고의 실력자가 되기 위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운명적 대결. 죽음의 위기에서 더욱 더 강해지는 옥타비아누스. 예쁘장한 어린애라 무시했던 옥타비아누스를 만날 때마다 안토니우스는 작아지는 스스로를 느낀다. 옥타비아누스도 안다. 자신이 안토니우스를 제압하고 있다는 것을, 안토니우스는 약해지고 자신은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풍요의 땅 이집트를 찾은 안토니우스와 제국을 지켜내야만 하는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만남. 잊지 못할 카이사르와의 사랑과 이제서야 깨닫게 된 카이사르의 배신. 카이사르의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던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점점 빠져들게 되고, 클레오파트라 역시 남성적 매력의 안토니우스를 다르게 보게 된다. 그렇다. 내가 이 책을 펼칠 때의 기대는 어디까지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것이다. 공백을 허락하지 않는 권력의 공백기. 카이사르 없는 로마. 카이사르와 비견할 수 없지만 카이사르에 가장 근접한 위치를 점했던 안토니우스. 상남자이되 여자의 마음을 헤아릴 정도의 감수성을 지녔던 안토니우스가 그를 무시했던 여왕, 살아있는 신, 클레오파트라와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나. 나는 그게 알고 싶었다. 하지만 『Antony and Cleopatra』는 한글책으로는 세 권 분량이다. 내가 읽은 1권은 3분의 1 지점이라는 계산. 두 사람은 만났으되 아직 사랑에 빠지지는 않았다.
내가 기다리는 사랑은 다른 커플에게서 피어 났으니 옥타비아누스와 리비아에게서다.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모든 설명에는 향기가 난다. 꽃향기. 꽃미남의 끝판왕. 잘생겼다 혹은 멋지다라는 수식보다 예쁘장하다,는 수식이 더 어울리는 청년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남자는 자주색 단을 댄 토가를 걸쳤으며 황금빛 머리칼이 풍성했다. 걸음걸이는 우아하고 자신감 넘쳤으며 느슨하게 걸친 옷 안의 몸은 날씬하고 젊었다. 남자가 불과 몇 걸음 앞으로 다가왔고 그녀는 그의 얼굴을 또렷이 보았다. 매끈하고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고 은색 눈동자에 금색 테가 둘러져 있었다. 리비아 드루실라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293쪽)
고귀한 혈통인 카이사르의 첫번째 후계자. 투명한 눈동자 사이로 자신의 진의와 감정을 감추고 냉정한 판단으로 죽음의 위기를 이겨내고 한 걸음, 한 걸음 권력의 핵심부로 걸어가는 사람.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운, 매끈하고 아름다운 얼굴의 옥타비아누스. 자신의 권력을 위해, 정치적 타협을 위해 결혼을 이용하는 사람. 그렇게 결혼한 정치적인 아내들을 손끝 하나 대지 않고 받아들여 잠시 보관해두었다가 입고된 상태 그대로 반납하는 사람(203쪽).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시시하고 불쾌한 질병에 굴복하는 인간들을 경멸하는 사람(275쪽). 임신이 필요하다면 아내와 감정 없이 잠자리를 갖는 사람(204쪽). 그런 옥타비아누스가 새로운 난관에 봉착했다. 다른 남자의 아내이며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여인, 리비아 드루실라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래, 신들을 도발하면 어찌되는지 잘 알겠지? 옥타비아누스는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자문했다. 나는 저급한 감상주의를 혐오해왔어. 큐피드의 화살에 맞아 여자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주장하는 사내들을 나약한 인간으로 여겼지. 그런데 여기 내 가슴팍에 화살이 꽂혀 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를 헤아릴 수 없이 사랑하게 되었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어떻게 내가, 늘 이성적이고 초연하던 내가 지금까지 믿어온 모든 것과 상치되는 감정에 굴복한단 말인가? 그 여자는 어느 신이 내려보낸 환영이었어, 그랬어야만 해!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내가! 나는 이성적이고 초연한 사람이라고! 그런 내가 어떻게, 어떻게 사랑이라는 감정의 파도에 이리도 휩쓸린단 말인가? (301쪽)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주인공은 오래오래 살아남아 찬란하고 영롱한 사랑의 결실을 맺듯 옥타비아누스의 사랑은 이루어진다. 느닷없이 찾아온 사랑의 열병에 들떴던 옥타비아누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 현재의 아내와 이혼하고 그녀를 집에서 내쫓는다. 리비아의 남편을 찾아가 종교적인 이유를 내세워 그의 아내 리비아와 이혼하라고 압박하며 리비아와 이혼할 경우 그의 재정적 어려움을 완벽하게 해소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렇게 옥타비아누스는 임신 6개월의 리비아를 아내로 맞는다. 유서 깊은 콘파레아티오 결혼식. 로마의 세 가지 결혼 형태 중 가장 오래되고 엄격한 결혼 형태. 이혼이 어려워 인기가 없는 콘파레아티오 결혼으로 그렇게 두 사람은 남편과 아내가 된다.
물론이다. 어젯밤에 나는 리비아가 되어 내 앞에 나타난 옥타비아누스의 말을 기억하고 또 기억했다. 나를 다시 찾아 오겠다는 말, 나와 결혼하겠다는 말. 그 말을 남기고 떠나간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운 그 남자를 생각했다. 그와 사랑에 빠져 버렸다는 걸 난 알았다. 프레겔라이의 허물어진 성벽과 오래된 건물 사이에서 그와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처음 내게 말을 걸었을 때 난 이미 알고 있었다. 로마에서 가장 고귀하고 높은 사람. 젊고 아름다운 사람. 그가 나를 사랑한다. 나를 여신으로 만들겠다고, 프레겔라이를 나에 대한 기념비로 바치겠다고 그가 말했다. 나를 가장 가까운 동료로 여기겠다고, 나의 남편이 되겠다고 그가 말했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난 스크리보니아가 되었다. 남편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크게 슬프지는 않았다. 그는 다정했고 항상 예의와 존중을 갖추었다. 난 이제 막 예쁜 딸을 낳았다. 아기는 누가 봐도 예쁜 아이였다. 이제 그의 아들을 낳고 싶다고, 그의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유노 소스피타와 마그나 마테르와 스페스 신에게 기도할 참이었다.(303쪽) 그런데 그가 이혼을 요구했다. 아니, 이혼을 명령했다. 그리고는 떠났다. 사랑에 빠져, 다른 여자에게 빠져, 처음부터 정해졌던 자신의 짝을 찾았다며 그가 떠났다. 나를 떠났다. 나와 내 딸을 버렸다.
나쁜. 나쁜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