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셔츠나 다려라! Iron my shirt!” 2008년 초 힐러리가 뉴햄프셔주 세일럼Salem의 한 고등학교 강당에서 연설을 하는 도중 어떤 젊은 남자 한 명이 관중석에서 피켓을 들고 일어서더니 거기에 적힌 이 글을 큰소리로 외쳤다. 그의 외침은 멈출 줄 몰랐고, 또 한 사람이 야유에 동참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두 사람은 보스턴의 한 라디오 방송국 직원들이었다.
힐러리는 웃으면서 “성차별의 잔재는 여전하군요”라고 말했고, 두 젊은이가 밖으로 끌려 나간 후 이 무례한 시위를 자신의 메시지와 연결시켰다. “지금 눈앞에서 직접 확인하신 것처럼 제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또 다른 이유는 가장 높고 단단한 유리천장을 깨고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아들딸과 자녀, 이 나라, 그리고 전 세계의 여성들을 위해서요.” (270쪽)
인간의 다양한 활동 중 일부를 여성의 일, 남성의 일로 구분하고, 이에 적합한 성역할에 남성과 여성을 고정하려는 노력은 농경생활이 시작된 이래 계속되어 왔다.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은 가정 안에서 이루어졌다. 출산과 육아, 옷을 만드는 일과 음식을 만드는 것이 여성의 일이다.
여성들의 장소는 집이었다. 가장 중요한 임무는 천과 옷을 만드는 일이었는데, 양털이 실이 되고 그 실이 다시 천이 되려면 물레는 거의 쉬지 않고 돌아가야 했다. 작가 크세노폰은 물레질이 “여성에게 가장 명예롭고 가장 적합한 일”이라고 말했다.(<처음 읽는 여성 세계사>, 76쪽)
여성이 고정된 성역할을 거부할 때 조롱과 멸시가 이어진다. 미국의 양당 중의 하나인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힐러리에게 “내 셔츠나 다려라!”라고 말할 수 있는 조건은 그녀가 여자라는 이유 뿐이다. ‘셔츠를 다리는 일’ 자체로 말한다면 그것은 중성적이고 무성적인 일이다. 남성과 여성에 따라 다르게 작동하지 않는 일이다. 자궁의 유무와 상관없는 일이다. 하지만, 집에서 남편의 셔츠를 다리는 일을 오랫동안 해왔던 집단에 속한 여성에게 “내 셔츠나 다려라!”라고 말하는 것은 모욕적이고 적대적인 언사다.
“내 셔츠나 다려라!”의 자매편이라면 “집에 가서 샌드위치나 만들어라!”가 있겠다. 나는 스브스의 이 카드 뉴스를 보고 16세의 호주 소녀 “제이드 하미스터”의 야무진 유머감각에 완전 반해버렸다. 제이드 하미스터는 14살에 최연소로 북극을 탐험하며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테드 강연 영상이 온라인에 게재된 후 “샌드위치나 만들어 달라!”는 댓글들이 여러 개 달렸다.
“샌드위치나 만들어라!”는 문구는 미국에서 여성을 비하할 때 자주 쓰는 표현으로, 2008년 대선 당시 힐러리 클린턴을 반대하던 온라인 커뮤니티 이름도 ‘힐러리, 대선 나가지 말고 샌드위치나 만들어줘”였다고 한다. 하지만 제이드는 일부 남성들의 이런 질시에 굴하지 않고 남극과 북국, 그린란드까지 가로질러 또다시 최연소 기록을 깼다. 그리고 이런 기념 사진을 남긴다. <SBS 스브스 뉴스, 2018.02.13>
“샌드위치 만들었으니 37일 동안 600km 스키 타고 남극으로 와서 먹어.”
그녀/그의 피부색이나 태어난 계급의 조건에 맞는 직업, 감정표현, 옷차림, 섹슈얼리티, 가사 노동 등 일생 전반에 걸친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계급 역할(당신은 가난하므로 공부하면 안 된다)”이나 “인종 역할(당신은 흑인이므로 실업자가 자연스럽다)” 같은 표현은 없다. 반면, 성 역할(gender role, “여자는 애를 낳아야지”)이란 단어의 존재는 성차별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상의 정치인지, 젠더가 얼마나 인식하기 어려운 사회적 구조인지, 얼마나 탈정치화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24쪽)
젠더가 정치의 영역이라는 것을, 성차가 계급으로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남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요즘 가끔 한다. 젠더가 사회 구조 속에 인식하기 어려운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이고, 문화라는 이름으로 덮어졌기 때문이고, 본성이라는 거짓 속에 감쳐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조차 사회 속에서 여성이 받는 부당한 대우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온실 정도는 아니었을지라도 두꺼운 보호막이 쳐진 조직 속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살아왔다는 걸 아주 최근에서야 알았다. 가장 약한 사람, 고통 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사람, 공감하는 사람, 공감할 줄 아는 사람들이 먼저 알아차린다. 이 거대한 구조 속에 깊이 감춰진 안타까운 모순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