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뚜껑 열린다. 실망시키지 않는다.
김씨인 이사부를 박씨로 둔갑시키다.

본책p.000
재위 6년 봄에는 전국의 주와 군의 경계를 확정하고 군의 수령을 군주로 삼았는데, 군주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군주의 칭호를 쓴 사람은 울릉도를 복속시킨것으로 유명한 박이사부(혹은 태종)였다. 지증왕은 실직주를 설치하고 그를 초대 실직 군주로 삼았던 것이다.

삼국사기2 p788 열전, 이강래 옮김
˝이사부((異斯夫) 혹은 태종(苔宗)이라고  한다)는 성이 김씨로 내물왕의 4세손이다.˝

이사부가 박이사부랜다.
신라박씨 영규님은 김씨도 박씨로 둔갑시킨다.

계속되는 신라박씨 이야기

“이런 행정적인 조치 이외에 지증왕 대에 주목할 만한 사건이 있다면 박이사부(태종, 태종은 한자식 이름이고 이사부는 향찰식 이름인 듯하다)의 울릉도 복속이다.

처음에 실직주 군주로 있던 박이사부는 지증왕 13년에 하슬라(강릉)주 군주가 되었다. 이때 그는 명주의 동쪽 바다에 있는 우산국이 험준한 지세를 믿고 신라에 항복하지 않는 것을 괘씸하게 여겼다. 하지만 우산국 백성들은 거칠고 사나운 기질을 가졌기에 쉽게 항복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에 박이사부는 한 가지 꾀를 냈다. 그는 나무로 많은 허수아비를 만들어 여러 배에 나눠 싣고 우산국 해안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곳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너희들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이 맹수들을 모두 풀어 너희들을 밟아 죽이게 하겠다.”“

ㅋㅋㅋㅋㅋ 허수아비 = 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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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계속 읽어야 할지 고민되게 만든다.

신라 소지왕 16년, 서기 494년은 고구려 문자명왕 3년의 일이다. 고구려 최대 판도를 이룬 왕이다.
그런데 신라 소지왕이 대동강을 넘어 청천강까지 군대를 북상시켰다. 고구려군은 호구인가?

소지왕 16년 살수는 괴산 청천으로 보는 설이 맞다고 본다. 견아성 또한 상주 견훤산성으로...

치양 즉 황해도 연백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군이 교전했다? 이 또한 어불성설이 아닌가 한다.
치양은 원주 치악으로? 보는설이 맞을듯 싶다.

이 시기 고구려는 한강유역을 석권한 시기였다.

백제, 신라가 어떻게 🤔 황해도까지, 대동강을 넘어 청천강까지...
그리고 돌아가던 고구려군이 치양성을~~~

고구려의 치양성공격은 다음해 8월~~

아! 신라박씨 영규님의 신라사랑이 과하십니다.

본책 p000.e북이라 몇페이진지는....
˝백제와의 동맹을 기반으로 소지왕은 고구려에 빼앗긴 영토를되찾고자 했다. 그래서 장군 실죽으로 하여금 고구려 지역을 선제 공격하도록 했다. 실죽은 북방으로 진격하여 대동강을 넘고 다시 살수(청천강)로 북상했다. 
하지만 살수벌에서 고구려군에게 밀려 퇴각하였고, 결국 견아성(충북 일대)까지 쫓겨 내려와 포위되었다. 그러나 백제의 동성왕이 병력 삼천을 보내 신라군을 돕자, 고구려군은 포위를  풀고 퇴각했다. 돌아가던 고구려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백제의 치양성(황해도 연백의 배천)을 포위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소지왕이 장군 덕지를 시켜 고구려군의 뒤를 쳤다. 신라군의 급습을 받고 고구려의 대오가 무너졌는데 치양성 안의 백제군까지 가세하자, 고구려군은 궤멸되고 말았다.˝

≪삼국사기≫에서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 부근에 있는 ‘청천(靑川)’의 옛 이름이 ‘살매(薩買)’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고, 을지문덕이 승리를 거둔 살수대첩 에서의 ‘살수’가 현재의 평양 부근에 있는 ‘청천강(靑川江)’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두 지명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한반도 중부지역의 최북단에서 고구려어 ‘살(薩)’이 ‘청(靑)’에 대응한다는 사실과 이러한 대응이 중부지역의 최남단인 청주 부근의 지명에서도 확인된다는 사실이다.
<한국미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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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지왕 대에 이르러 왕에 대한 칭호가 이사금에서 마립간(麻立干)으로 변경되었다. 김대문에 따르면 마립이란 말뚝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직위에 따라 놓는 것이니 조선 시대의 품석(品石, 품계를 새겨 나열한 돌)과 같은 것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조선의 품석은 임금의 것이 없지만, 신라의 마립엔 임금의 것도 있다는 점이다. 즉, 신라 조정에는 왕의 마립이 최상석 한가운데 있고, 그 아래로 신하들의 마립이 나열되어 있는 형태였다. 따라서 마립간이란 마립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곧 임금을 의미했다.

신라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불리는 박제상에 대해 『삼국사기』는 박혁거세의 후손이며, 파사이사금의 5세손으로 조부는 아도갈문왕이고, 아버지는 물품 파진찬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는 제상의 성(姓)을 김씨로 기록하고 있다. 그의 성이 김씨라는 것은 그가 혁거세의 후손이 아니라 김알지의 후손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영해(영덕) 박씨 족보에는 그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전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박문량이며, 414년에 신라의 충절 박제상의 막내로 태어난 것으로 적혀 있다. 눌지왕 2년인 418 년에 그의 아버지 박제상이 왜에서 순절하자, 어머니 김씨와 누나인 아기와 아경이 비보를 듣고 자결하였고, 둘째 누나 아영만 살아남아 그를 양육하였다고 한다. 아영은 몇 년 뒤에 박제상이 탈출시킨 미사흔과 결혼하여 궁궐로 들어갔고, 문량도 그녀를 따라 입궐하여 궁중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장성해서는 각간 이수현의 딸과 결혼하여 관직에 머물기도 하였다.

"무릇 죽고 사는 것에는 운명이 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어,
그것이 와도 막을 수 없고 그것이 달아나도 좋을 수 없는 법이오.
그런데 그대는 어찌하여 마음 아파하는 거요? 내가 그대를 위하여 방아소리를 내어 위로해 주겠소이다."
백결은 곧 가야금을 타서 방아소리를 연주했다고 한다. 이 음악은 후세에 방아악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졌다고 한다.

"백성들은 국왕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노파가 대답했다.
"많은 사람이 그를 성인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내가 듣건대, 왕은 날이에 사는 여자와 관계하면서 자주평복을 입고 나다닌다 하오. 무릇 용의 겉모습이 고기와 같이 생겼다면, 어부의 손에 잡히게 되어 있어요. 지금의 왕은 만승의 지위에 있는데 스스로 신중하지 못하니, 이런 사람을 성인이라고하면 누가 성인이 아니겠소?"

재위 4년에는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기도 했다. 그때까지 신라는 사라, 사로, 계림, 벌, 서라벌, 신라 등 여러 가지로 불리는 바람에 국호가 하나로 통일되지 못했다. 그래서 지증왕은 신하들에게 국호를 하나로 일원화하도록 지시했고, 결국 시대의 추이에 맞게 한자어로 된 ‘신라’가 정식 국호로 채택되었다. 신라는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져 사방을 모두 덮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증왕은 군주의 칭호도 국제화의 흐름에 맞게 왕으로 변경하였다. 그때까지 신라는 거서간, 이사금, 마립간 등 족장을 의미하는 신라 방언을 군주의 칭호로 사용했는데, 이때부터 국제어인 왕을 칭호로 확정했다.

514년 7월에 왕위에 오른 법흥왕은 국가 기반 확립을 위한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재위 4년(517년) 4월에는 후에 6조 체제의 근간이 되는 병부(兵部)를 설치하여 국방 및 병력 행정 체계를 일원화했다. 7년(520년) 정월에는 법령을 반포하고 관리들의 관복을 제정했다. 관복은 붉은빛과 자줏빛 두 가지 색으로 구분하여 등급을 표시하도록 했다. 또 18년(534년)에는 상대등이라는 직위를 신설, 이찬 철부를 초대 상대등에 임명하여 국사를 총괄하게 함으로써 이른바 ‘재상정치’ 시대를 열었다. 23년(539년)에는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고, ‘건원(建元)’ 원년이라고 했다.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제19대 눌지왕(417~458년) 때에 묵호자에 의해서다. 묵호자(墨胡子)는 이름이라기보다는 생김새를 보고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부른 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이는데, 글자대로 풀이하자면 ‘검은 오랑캐 자식’이다. 이는 묵호자가 피부색이 검은 인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그 소식을 들은 법흥왕은 곤룡포를 적시며 울었고, 신하들은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법을 비방하거나 헐뜯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법흥왕은 이듬해인 528년에 마침내 불교를 공인하였다. 법흥왕은 이차돈의 순교로 뜻을 이뤘고, 신라인들은 불법을 새로운 눈으로 대하게 되었다.

김대문은 『화랑세기』에서 ‘어진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가 화랑도에서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또한 이에서 생겼다’고 했다. 김대문이 『화랑세기』에서 거론한 풍월주는 총 32명이다. 그는 이 시기의 화랑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화랑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 이때는 뛰어난 인물 중에 화랑도 출신이 많았다. 신라의 삼국 통일에 가장 크게 기여한 김유신이 화랑의 제15세 풍월주이고,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제18세 풍월주였으며, 김춘추의 아버지 김용춘이 제13세 풍월주였다. 또한 가야 정벌의 영웅 사다함이 제5세 풍월주였고, 화랑 중의 화랑으로 이름을 날린 문노가 제8세 풍월주였다. 그 외에도 일일이 이름을 댈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장수가 화랑도 출신이었다. 김대문의 말대로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말엽까지 신라 사회를 떠받친 인물들은 모두 화랑도 출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벌은 서로 자기 파에서 풍월주를 배출하려고 경쟁을 하였고, 급기야 681년에는 파벌 싸움이 극에 달해 김흠돌의 난이 일어났다. 이에 신문왕은 화랑도를 폐지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내렸다.
그 후 화랑도는 부활하지만, 풍월주는 사라지고 국선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따라서 풍월주 위주의 화랑도 조직은 커다란 변화를 겪어야 했고, 조직의 힘도 크게 약화되었다.

최치원은 화랑을 ‘풍류’라고 하면서 ‘유불선의 세 가지 교를 포괄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해석했다.

왕위에 오를 당시 선덕왕의 남편은 김용춘이었다. 그러나 선덕왕이 용춘에게서 자식을 잉태하지 못하자 즉위 후에는 흠반과 을제가 보태져 남편이 세 명으로 늘었다. 이는 삼서(三)제도를 따른 것이었다. 삼서제도란 왕녀가 자식을 가지지 못할 때, 남편을 셋 얻게 하는 신라의 전통적인 제도였다. 선덕왕은 즉위년 2월에 그들 중에서 을제를 택해 국정을 맡겼다.

막상 김춘추와 결혼은 했지만 문희는 정실이 되지 못했다. 당시에도 정실 부인은 오직 한 명만 될 수 있었는데, 김춘추에겐 이미 아내 보량궁주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희는 한동안 첩의 신분으로 지내다가 보량이 죽고 난 뒤에야 정실의 신분을 획득했다.

흔히 신라의 통일을 삼국 통일이라고 말하지만, 신라가 장악한 땅은 백제의 한반도 영토와 고구려의 일부 지역에 불과하므로 그렇게 부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신라는 애초부터 삼국 통일을 외친 것이 아니라 삼한의 통일을 외쳤고, 대개 삼한의 영토가 대동강 이남에 한정된 것을 감안할 때, 그 목표를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신라의 통일은 삼국 통일이 아닌, 삼한 통일로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신라가 삼한을 통일한 것은 우리 민족의 영토를 크게 축소시켰다는 사실 때문에 그 의미가 폄하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신라의 통일이 한민족의 활동 영역을 한반도로 축소시킨 원인이라고 말하는 이도 많다.

물론 그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 때문에 신라의 삼한 통일을 무의미한 것으로 평가해서는 곤란하다.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여 통일을 했다는 것이나 통일로 인해 우리 민족의 활동 반경이 좁아졌다고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민족적 개념이 형성된 고려 이후의 사관에 해당한다.

문무왕 연간은 원효와 의상이라는, 신라 불교를 대표하는 두 승려가 활동하던 시기였다. 원효는 일심, 화쟁, 무애 사상을 바탕으로 왕과 왕비를 비롯한 왕족들은 물론이고, 일반 귀족, 서민, 천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계층을 교화하여 사상적인 면에서 신라 불교의 대중화에 획기적인 공헌을 하였다. 의상은 화엄사상을 기반으로 많은 제자를 길러 전국에 거대 사찰을 대거 건립함으로써, 신라 불교의 양적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여행 도중 어느 동굴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밤중에 목이 말라 손에 잡히는 대로 물을 마셨는데, 그것은 해골에 괸 물이었다. 아침에 그 사실을 알고, 그는 기겁을 하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것은 다시 큰 깨달음으로 변했다. ‘진리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관리가 남산 문천교에서 원효를 만나니, 원효는 일부러 물에 옷을 적신 뒤에 궁으로 향했다. 궁에 도착한 원효는 옷을 갈아입고, 젖은 옷을 말렸다. 이 때문에 옷이 마를 때까지 대궐에서 묵게 되었다. 그리고 요석공주와 관계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신라 10현 가운데 한 사람인 설총이다.

원효 사상의 요체는 대개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모든 것이 오직 마음에 달렸다는 일심론이요, 둘째는 철저한 자유를 추구한 무애론이요, 셋째는 모든 백가의 설이 옳지 않음이 없고 팔만법문이 모두 이치에 맞다는 화쟁론이다.

원효 사상은 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지만, 이 세 가지는 알고 보면 하나이다. 일심론, 무애론, 화쟁론의 본질은 자유이며, 그 자유가 깨달음을 향해 있을 때, 그 어떤 것도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곧 깨달음을 위한 정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삶이 수행이며 정진이라는 뜻이다. 원효의 위대함은 바로 깨달음을 배움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삶 자체로 보았다는 데 있다.

하지만 원효와 의상의 삶은 극히 달랐다. 원효가 당대의 승려들에겐 이단아이자 아웃사이더였다면, 의상은 당대의 우등생이요 주목받는 주류였다. 원효가 중류층 출신인 것에 비해 의상은 왕족 출신의 상류층인 것부터가 달랐다. 말하자면 그들은 출발부터 다른 처지였다. 그러나 그들은 처지와 방법과 방향이 달랐을 뿐 추구하는 본질은 동일했다. 그들은 우주와 자아의 동일성을 인정했고, 우주의 그 어떤 것도 자기 자신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었다. 원효의 화쟁론에 따르면 의상의 삶도 팔만법문의 하나로서 이치에 맞는 깨달음의 길이고, 의상의 화엄론에 따르면 원효의 삶도 대립을 초월하여 융합을 구현한 꽃의 세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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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규님의 실록을 읽어보자.

읽을수록 지명 비정하는데 짜증이 나는구나

실록: 실록(實錄)은 동아시아권에서 편년체 역사 기록 양식 및 이 양식에 따라 쓰여진 기록을 총칭하는 말이다. 전근대 중국, 한반도, 일본, 베트남의 왕조들이 실록을 출간했으며, 현대까지 실록을 만들고 있는 나라는 군주제(천황제)를 시행하는 일본이 유일하다. 실록이라는 명칭은 ˝실제로 있었던 일(事實)을 그대로 기록한다(直錄)˝라는 뜻.

박영규님의 고구려, 백제, 신라왕조 실록
삼국사기, 삼국유사 해설서라 부르자

다음은 신라왕조실록 중 심각한 오류?
집필 당시 넋을 놓은 것인가?

본책 p000.e북이라 몇페이진지는....
˝재위 4년 2월에는 감물(충북 괴산 감물면)과 마산(충남 보령의 남포면)에 처음으로 현을 설치하는 업적을 일궜다. 또 재위 4년 3월에는 말갈군과 대치하고 있던 장령진에 몸소 거동하여 병사들을 위로하고 군복을 하사하는 여유도 보였다.˝

재위4년은 서기157년 이때 찌질한 아달라왕이 지금의 충북 괴산과 충남 보령에 현을 설치하다니. 괴산은 눈감아 주겠다. 근데 보령이라니? 충남 서쪽 맨끝, 서해와 맞닿은 보령까지 진출하려면 보령의 동쪽 부여, 논산, 진잠(대전), 옥천까지 다 평정했단 말인가? 아님 그냥 앉아서 남의 땅에 현을 설치한 것인가? 신라는 2세기에 동해에서 서해까지 한반도를 동서로 제패했다?
신라는 6세기 말 진흥왕대에 가서 백제와 연합하여 겨우 당항성에 진출했을 뿐이다.
삼국사기의 이 기록중 감물과 마산은 지금의 어디인지 누구도 정확히 비정하지 않고 있는데 존경하는 박영규님께서는 왜 그랬을까? 박씨라서, 신라박씨라서?

괄호의 내용은 왜 집어 넣은 것인가?
그냥 사기 기록 그대로 인용했으면 좋을 것을.

마산현은 삼국사기 잡지 웅진주편에 나온다. 이는 곧 후대, 남북국 시대의 일일 것인 바.

이 책이 나온지 20년. 아직까지 이것을 수정하지 않고 있는 저의는 무엇인가?

박영규님은 옛지명을 좀더 서쪽, 북쪽으로 비정하는 경향이 있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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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12-25 17: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박영규 님의 <한 권으로 읽는 조선~>을 읽었는데 반갑네요.

대장정 2023-12-25 17:29   좋아요 0 | URL
˝한 권으로~~실록˝은 처음 읽는 책은데 시대상황과 맞지 않게 지명을 작가 맘대로 비정하는데 짜증이 좀납니다.^^~
 

"신라인들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았는가?"

이 단순한 물음에도 확실한 대답을 해 줄 수 없는 것이 우리 역사학계의 현실인 까닭이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한반도 원주민이 아닌 망명객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진시황의 지배를 피해 온 연나라 망명객과 위만에게 망한 고조선의 유민이 합쳐진 색다른 세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말과 풍속이 특이하여 마한이나 백제, 고구려와는 아주 다른 삶의 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화랑도가 철저하게 성적으로 얽혀 있는 집단이라는 사실 또한 이채롭다. 또 성을 서로 나누는 행위를 전혀 추잡하게 여기지 않았던 당시 사람들의 가치관, 정치에 여성들의 입김이 직접적으로 작용한 것이나 태후나 유력한 왕실의 여자들이 왕을 갈아치우는 일도 신라사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독특한 역사이다.

거기엔 비단 학자들의 책임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의 머릿속엔 광대한 영토에 대한 동경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 암암리에 신라의 삼한 통일에 대한 거부감으로 귀결되었다. 즉, 신라가 통일하지 않고 고구려가 통일을 했다면 우리는 지금 광활한 영토의 주인으로 살고 있으리라는 회한의 역사 의식이 강하다는 의미다. 또한 신라가 당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망하게 했다는 원망 섞인 시선도 있으리라.

신라인들이 중국 대륙에서 흘러든 종족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의 정체에 대해선 아직까지 명확한 결론이 내려져 있지 않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진한 사람들 중 일부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한 사람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곧 신라인의 정체를 밝히는 일이 될 것이다.

신라인들은 두 부류의 망명객들에 의해 형성됐다. 첫째는 진시황의 중국 통일(B.C. 221년)로 인해 고통받던 연나라 망명객들이고, 둘째는 B.C. 194년에 위만에게 쫓겨난 고조선의 준왕이 이끌고 온 유민 세력이다. 이들은 마한의 배려로 한반도 동남부 지역에 터전을 잡았다. 이것이 신라와 가야의 모태인 진변 24국이다.

신라 말의 대학자 최치원은 ‘진한은 본래 연나라 사람으로서, 도피해 온 자들’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다른 기록에서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에 나뉘어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뤘는데, 이것이 진한의 6부’라고 하면서, 이 진한의 6부가 곧 신라가 되었다고 쓰고 있다. 이 기록에서 주목할 것은 진한의 6부가 ‘조선의 유민’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여기서 조선이라 함은 물론 고조선을 일컫는다).

『삼국유사』에서는 혁거세를 고허촌장 소벌공이 혼자 발견하여 키운 것이 아니라 마을 촌장들이 함께 발견한 것으로 쓰고 있는 점이 『삼국사기』의 기록과 크게 다른 부분이다. 그러나 양산촌 나정 우물 곁에서 혁거세를 발견했다는 점은 두 기록이 일치하고 있다. 즉, 분명한 것은 혁거세가 양산촌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사량리는 바로 고허촌이다. 고허촌 사람들이 급량부 출신인 혁거세를 왕으로 내세운 것은 바로 고허촌 출신의 알영을 왕비로 내세우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진한과 변한의 망명족들은 바로 이런 마한의 약화를 틈타 독립을 모색했고, 혁거세의 옹립은 바로 마한으로부터의 독립선언이었던 것이다.

‘혁거세’는 ‘불구내’라고도 불렸다고 하는데, 이는 광명으로써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아마도 ‘혁거세’는 ‘불구내’의 뜻을 한자로 옮겨 적은 것인 듯하다.

신라인들이 왕을 거서간(居西干)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마한에서 왕을 파견하던 일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거서간의 한자 의미를 풀어 보면, ‘서쪽에 살던 왕’이란 뜻이다. 신라인들은 마한을 ‘서한’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서쪽에 살던 왕’은 곧 마한에서 온 왕을 가리킨다. 원래 진한의 왕을 마한에서 파견했기 때문에 진한인들이 왕을 거서간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따라서 거서간이라는 말은 마한 속국 시대의 용어라고 할 수 있다.

마한이 그처럼 분열 상황으로 치닫고 있을 때, 마한 땅에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고구려에서 망명한 온조의 세력이 서기전 18년에 마한의 북방 변경 지역에 백제를 세웠던 것이다. 백제의 건국은 세력을 팽창시켜 마한 땅 전체를 장악하려던 신라국에겐 대단히 위협적인 복병이 아닐 수 없었다.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만에 왕이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레 뒤에 유해가 땅에 떨어졌으며 왕후도 역시 죽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혁거세왕의 죽음이 결코 자연사가 아님을 알려 주고 있다. 더구나 왕후도 함께 죽었다는 것은 두 사람이 살해되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삼국유사』의 기록은 혁거세왕이 살해되었음을 한층 명확하게 전해 주고 있다.

"두 분(혁거세와 알영)의 성인이 세상을 떠나시고 내가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나, 이는 잘못된 일이다."

이 기록에 따르자면 남해왕은 혁거세왕에게 왕위를 넘겨받은 것도 아니고 왕위 계승권자도 아니었다. 그는 불의의 사고로 혁거세왕과 알영이 죽자, 백성들에 의해 추대되었다.

그 무렵, 석탈해라는 인물이 현명하고 용맹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남해왕은 그를 불러 만나 본 후 사람됨이 남다르다고 판단하고 장녀 아효를 그에게 시집보내 그를 사위로 맞아들였다. 이후, 탈해를 대보에 임명하고 군사와 정치에 관한 일을 전담시켰다.

차차웅이라는 용어에 대해 『화랑세기』의 저자 김대문은 이렇게 말한다.

"방언으로는 무당이다. 사람들이 무당을 귀신으로 섬기고 제사를 지내 줬으며, 그들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다가 마침내 존경받는 어른을 자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탈해는 훌륭하고 지혜 있는 사람은 이가 많다고 하면서 떡을 깨물어 유리와 자기의 이의 수를 헤아려 보았다. 그 결과 유리의 이 수가 더 많자, 탈해는 자기의 측근들과 함께 유리를 받들었다. 그후로 ‘잇자국’이라는 뜻의 ‘이사금’을 왕호로 하였다고 전한다.

재위 9년에는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씨를 하사함으로써 중앙집권적 기틀을 잡았다. 양산부는 양부로 고치고 이씨 성을, 고허부는 사량부로 고치고 최씨 성을, 대수부는 점량부(또는 모량부)로 고치고 손씨 성을, 간진부는 본피부로 고치고 정씨 성을, 가리부는 한기부로 고치고 배씨 성을, 명활부는 습비부로 고치고 설씨 성을 내렸다.

6부를 정한 뒤에는 이를 두 편으로 나눠서, 두 왕녀로 하여금 각각 부 내의 여자들을 거느리게 하였다. 이들 두 편으로 하여금 7월 16일부터 8월 15일까지 매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길쌈 시합을 하도록 했다. 그 결과 길쌈을 적게 한 편에서 술과 음식을 차려 이긴 편을 대접하였다. 이때 노래와 춤과 온갖 오락이 곁들여졌다. 이 행사를 가배라고 했는데 한가위, 즉 추석의 기원이 되었다.

유리왕은 관직도 17등급으로 나눠 정부 조직을 정비하였는데, 이때 확립된 관등제는 신라 말기까지 이어진다. 제1등급은 이벌찬, 2등급은 이찬, 3등급은 잡찬, 4등급은 파진찬, 5등급은 대아찬, 6등급은 아찬, 7등급은 일길찬, 8등급은 사찬, 9등급은 급벌찬, 10등급은 대나마, 11등급은 나마, 12등급은 대사, 13등급은 소사, 14등급은 길사, 15등급은 대오, 16등급은 소오, 17등급은 조위라 하였다.

신라는 갈문왕 제도를 뒀는데, ‘갈문왕(葛文王)’이란 왕의 아버지 또는 장인, 유력한 왕족에게 붙이는 추증 시호로써 조선의 대원군이나 부원군, 고구려의 고추가 등에 해당한다. 대개는 죽은 사람에게 시호를 내리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 책봉된 경우도 있다.

이사금이라는 왕호는 제3대 유리왕부터 제16대 흘해왕까지 이어지며, 지금도 ‘임금’이라는 단어로 남아 왕을 지칭하고 있다. 이사금이 임금으로 변한 과정은 대개 ‘이사금 - 니슨금 - 닛금 - 니은금 - 임금’으로 보고 있다.

석탈해, 박혁거세, 김알지는 모두 알이나 황금 상자에서 태어났고, 신라 왕실을 일군 박, 석, 김, 세 성씨의 시조라는 공통점이있다. 이들뿐 아니라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과 가야를 세운 김수로도 한결같이 알에서 태어났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나오는 탈해 이야기는 가야의 개국을 저지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달려온 탈해와 수로왕의전쟁 이야기에 용성국에서 내쫓긴 탈해의 신라국 망명 이야기가덧붙여져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유리왕의 재위 기간은 33년 1개월간이지만, 『삼국사기』는 그의재위 20년부터 34년까지 약 14년 동안은 거의 기사를 남기고 있지 않다. 31년과 33년 기사가 있긴 하나, 그것은 천체와 기후에관련된 것일뿐 유리왕의 정책과는 상관없다. 이 14년은 신라본기」를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기록이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 더구나 33년 4월의 다음 기사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33년 여름 4월, 금성 우물에서 용이 나타났는데, 얼마 후에 소나기가 서북에서 몰려왔다. 5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공교롭게도 유리왕 20년(서기 43년)은 탈해가 신라의 아진포에도착했다는 혁거세왕 39년(서기전 19년)으로부터 62년째 되는해이다. 즉, 아진포에 도착한 서기전 19 년을 탈해의 출생 연도로잡을 경우에 유리왕 20년에 그의 나이가 62세가 된다.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너무 아귀가 잘 맞아떨어진다.

다시 말해서 탈해는 혁거세왕 39년에 신라국에 도착했고, 그 시점을 출생한 때로 계산하여 62세 되던 유리왕 20년에 왕위를 넘겨받았으며, 유리왕은 왕위를 넘겨준 뒤에도 14년을 더 살다가서기 57년에 죽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후대의 학자들은 유리왕이 물러난 때부터 사망 때까지의 기사를 고의로 삭제하고, 유리왕이 죽은 때를 탈해의 즉위 시점으로 삼아 역사를 정리했을것이다.

탈해가 대보로 있던 시절의 한반도 정세는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삼한의 맹주였던 마한은 서기 8년(온조왕 26년)에 백제의 공격을 받아 도성이 무너졌고, 마한 왕실은 북쪽으로 달아나고구려에 의탁했다. 이후, 마한 잔여 세력은 원산성과 금현성에병력을 집결하고 1년 동안 강력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백제에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나 마한의 저항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마한군은 곳곳에서 군대를 일으켜 부흥운동을 전개하였고, 그 같은 형국은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다. 서기 16년에는 마한 장수 주근이 우곡성을 거점으로 군대를 일으켰으나 패배하였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약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수로‘라는 단어는 단순히 ‘처음으로 나타났다‘는 뜻보다는 ‘우두머리 왕‘이라는 의미가 더 클 것이다.
수로(首露)라는 명칭을 분석해 보면 ‘수‘는 머리이고,  ‘로‘는 왕을 의미한다. 수로왕 당시의 백제 왕들은 ‘다루‘, ‘기루‘, ‘개루‘ 등의 묘호를 사용했는데, 여기서 ‘루(婁)‘는 망루 또는 별을 지칭하는 것으로 마한 말로 왕을 의미한다고 밝힌 바 있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는 수로왕이 158세 되던 건안 4년(199년)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이 158 년이라는세월을 살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그 때문에 이 158년을 한 사람의 생애로 치부하는 것은 무리다. 즉, 수로왕은 한 사람을 일컫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158년이라는 기간은 수로라는 명칭을 사용하던 세월, 즉 여섯 가야가 하나로 통합되어 다스려지던 햇수로 보아야 한다.

이는 단군이 1908세에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대하여, 단군이라는 단어를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닌 왕을 칭하는 보통 명사로 보고, 1908년을 단군 조선이 지속된햇수로 보는 해석법에 따른 것이다.

신라는 박석·김 세 성씨에 의해 왕조가 유지되었다. 총 56명의신라 왕 중에서 박씨가 10명, 석씨가 8명, 김씨가 38명이다. 초기 8대까지는 탈해왕을 제외하고는 모두 박씨이며, 제9대부터 제16대까지는 미추왕을 제외하고는 모두 석씨이다. 그리고 제17대부터 제52대까지는 모두 김씨이고, 제53대부터 제55대까지는다시 박씨이며, 마지막 왕인 제56대 경순왕은 김씨이다.

왕이 좋은 날을 받아 그를 태자로 책봉하였으나, 그는 파사에게양보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그가 황금궤짝에서 나왔으므로성을 김씨라 하였으니 알지가 열한을 낳고, 열한이 아도를 낳고,
욱보가 구도를 낳고, 구도가 미추를 낳으니, 미추가 왕위에 올랐는데, 신라의 김씨가 알지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탈해왕은 왜 김알지를 양자로 받아들였으며, 그를 대보로 삼았을까? 왕이 양자로 받아들일 정도면, 필시 김알지는 아주 귀한 신분이어야 한다. 탈해가 그랬듯이 그도 어느 나라의 왕자 신분이었거나 그에 버금가는 집안 출신이었을까?
중국의 『수서』는 신라 왕실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기고 있다.

신라의 왕은 본래 백제 사람이었는데, 바다로 달아나 신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나라를 왕으로 다스리게 되었다.

『서』의 기록대로 정말 신라의 김씨 왕실의 시조, 즉 김알지는백제 사람일까? 어떻게 보면, 김알지를 백제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김알지는 백제 사람이 아니라 마한 사람이라고 보아야 한다.
김알지가 신라에 온 때인 서기 60년에서 65년 사이의 한반도 상황을 점검해 보면, 알지가 마한에서 왔을 것이라는 추론을 쉽게얻어 낼 수 있다.

이제 김알지의 출신과 정체는 자명해진 셈이다. 김알지는 마한의 마지막 왕의 직계 후손이며 부흥운동의 상징적 존재였다. 그런 그가 신라에 와서 탈해왕의 양자로 취급되고, 재상 격인 대보의 벼슬까지 부여받는 등 왕족에 버금가는 대접을 받은 것은 바로 마한 왕실을 대표하는 왕자였기 때문이다. 그가 신라에 귀부함으로써 신라는 마한의 적통임을 자부하며 백제에 대하여 마한의 영토를 돌려 달라는 주장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삼국사기』는 그의 생활 태도에 대해 "절도 있고 검소하며 물자를 아꼈고, 백성을 사랑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칭송하였다."
고 적고 있다. 파사왕은 스스로 검소한 삶의 모범을 보이며 백성과 신하들의 신망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유리왕의 적장자인 일성(逸聖)왕은 유리왕이 죽은 후 77년이나 지난 뒤에 왕위에 올랐는데, 이 때문에 그는  유리왕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이거나 그 후대의 자손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있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여러 곳에서 일성왕을 유리왕의 아들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일성왕이 유리왕이 만년에 낳은 장자가확실하다면 그는 여든이 다 된 나이에 왕위에 오른 셈이다.
이렇듯 늦게 왕위에 올랐지만, 그의 즉위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않았다.

일성을 제치고 파사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파사의 부인사성부인이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김알지의 손녀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일본서기』의 연도는 인덕천황 시대 이전의 것에 대해서는 2갑자 더한 연도로 계산한다. 『일본서기』의 기년에 2갑자를 더하는 것은 『일본서기』 신공황후 대의 근초고왕, 근구수왕, 침류왕 등의 죽음과 즉위에 관한 기록들이 『삼국사기』의 기록과 정확하게 120년 차이가 나고, 그런 현상은 응신, 인덕천황 대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인덕천황 이전의 기년에 2갑자를 더해서 연도를 환산하게 된 것이다.

『일본서기』에 이처럼 120년이라는 공백이 생기는 것은 『일본서기』 편자들이 고의로 여왕들의 비중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역사적 사실들을 은폐하고 조작한 결과이다.

『삼국사기』는 이 해로부터 10년간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다가 184년 3월에 아달라왕이 죽었다는 기록만 남기고 있다.

아마도 이 10년 동안 신라 사회엔 엄청난 동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굶주린 백성들은 유랑민으로 전락하여 또 하나의 사회 불안 요인으로 작용했을 법하다.

그렇다면 비미호와 일여에 대한 기록을 폐기한 것은 그들이 혹시 왜국 천황족이 아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말하자면 비미호는 왜국의 천황족과는 전혀 다른 종족으로 천황족을 무너뜨리고 왕국을 건설한 외방족의 인물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일식(日蝕)의 ‘식(蝕)’은 ‘벌레가 먹어 치운다’는 뜻인데, 이때 ‘蝕’ 대신에 ‘食’을 쓰기도 한다. 즉, 고대인들에게 일식이라는 것은 ‘벌레가 해를 잡아먹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런데 태양을 갉아먹는 이 벌레들을 잡아먹을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 있었다. 그 동물이 바로 까마귀였다. 고대인들에게 까마귀는 길조였으며 신령스런 동물이었다. 또 그 새까만 깃털 탓에 불에도 타지 않는 동물로 여겨졌다. 새까맣게 타 버린 숯은 더 이상 불에 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로 생각했던 것이다.

연오랑과 세오녀는 바로 일식 때에 까마귀를 하늘로 날리는 소임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오랑이라는 이름을 풀이하면 ‘까마귀를 끌어들이는 남자’라는 뜻이다. 즉, 연오랑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그의 소임을 나타내는 직업적인 명칭으로서, 일식이 일어나면 까마귀를 불러들여 잡은 뒤, 다시 태양을 향해 날아가도록 풀어 주는 소임을 맡았다는 뜻이다.

벌휴왕 재위시 특이한 일들이 몇 가지 기록되어 있는데, 재위 10년인 193년 3월에 한기부 여인이 한 번에 4남 1녀의 다섯 쌍둥이를 낳았다. 다섯 쌍둥이도 매우 드문 일인데 모두 산 채로 나왔으니, 당시로선 큰 경사요 이적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럴 경우 대개 나라에서 상으로 쌀을 내리고 왕이 직접 축하 서신을 띄우곤 하였다.

벌휴는 내례부인이 이끌고 있던 박씨 종실과 부인 김씨 집안의 후원을 받아 왕위에 올랐지만, 어쨌든 석씨 집안의 이름을 걸고 왕위에 오른 것이다. 이는 자신의 후손에게 왕위를 물려줄 기반을 만들었다는 의미다. 벌휴 이후에 내해(제10대), 조분(제11대), 첨해(제12대), 유례(제14대), 기림(제15대), 흘해(제16대) 등이 모두 그의 후손이라는 것이 이 점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제13대 미추왕이 비록 김씨이긴 하지만, 그도 석씨 집안의 사위로서 왕위에 오른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석씨 왕실의 집권은 184년부터 356년까지 172년간 지속된 셈이다.

『삼국사기』는 내물왕과 실성왕의 부인들이 미추왕의 딸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신빙성이 전혀 없다. 내물왕은 미추왕의 사망 시점으로부터 72년 후에 왕위에 올라 46년간 머물렀다. 만약 내물왕의 부인이 미추왕의 딸이라면 내물은 청년 시절에 팔순 노파와 결혼한 꼴이 된다. 실성왕은 미추왕 사망 시점으로부터 118년 후에 왕위에 오른 인물인데, 그가 미추왕의 딸과 결혼했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무덤 속에서 썩어 없어진 시신과 결혼한 것이나 진배없다. 내물왕과 실성왕의 부인을 모두 미추왕의 딸로 기록해 놓은 것은 그들이 왕위를 얻기 위한 명분을 만드는 과정에서 조작된 결과일 것이다. 어쨌든 내물왕과 실성왕의 왕비는 미추왕의 딸들이 아닌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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