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수는 좋아하는 만화책과 오래된 동전, 아버지의 안경처럼 특별한 물건을 보관해두는 트렁크 뚜껑 안쪽에 레슬링 선수 역도산 사진을 붙여놓았다. 이 조선인 레슬링 선수와 달리 모자수는 상대에게너무 가까이 붙어서 몸싸움을 오래 벌이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역도산은 가라테촙으로 유명했고, 이와 비슷하게 모자수도 상대를 정확하게 겨냥해서 쳤다.
한달 전에도 노아는 특히 조선인은 처신을 바르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모자수는 자신이 또다시 문제를 일으켜서 속상했고 형의 실망한표정을 보기가 두려웠다.
잠들지 못한 요셉은 여자들이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여자들은 부엌에서 노아의 등록금을 걱정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노아가 입학시험 공부를 할 때부터 걱정했고, 이제 합격하고 나니 어떻게 등록금을 낼지 걱정했다. 노아의 봉급 없이 어떻게든 살아야 했고, 노아의학비를 마련해야 했으며, 요셉의 약값을 치러야 했다. 차라리 요셉이 죽으면 훨씬 나을 터였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사카에는 산짐승이 없었다. 비싼 약값을 뜯어가는 한의사와 의사가 있을 뿐이었다.
요셉은 더 말하고 싶었다. 그들을 먹여 살리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자기 때문에 많은 돈을 쓰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이 말을 할 수 없었다.
"주님께서 채워주실 거예요." 경희가 말했다. "주님께서 항상 우리가 필요한 것을 다 돌봐주셨어요. 주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구하셨을 때 우리 목숨도 구하신 거예요."
경희가 불만스럽게 입술을 꽉 오므렸다. 성경에서 지혜로운 자는자기 혀에 재갈을 물려야 한다고 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면 안되는 법이었다.
"그리고…… 자네가 기다리면………… 내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면 경희와 혼인할 수 있어." 요셉이 말했다. "하지만 경희를 거기 데려가서는 안 돼. 부탁해. 자네한테 부탁할게." "뭐라고요?" 창호가 고개를 저었다.
요셉이 한숨을 쉬었다. 입술이 바싹 말랐다. "자네가 경희를좋아하는 거 알고 있어. 난 자네를 믿어. 자네가 그 깡패 밑에서 일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여기에 일자리가 그다지 많지 않지. 이해해. 그냥 내가 죽을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겠어?" 요셉은 말할수록 이것이 옳다고 느꼈다. "여기 계속 있어. 난 곧 죽을 거야. 느낌이 와, 여기에 자네가 필요하기도 하고, 자네가 그 나라를 바로잡을 수는 없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야."
창호는 남편을 배신하지 않을 사람을 사랑했고 어쩌면 그것이 경희를 사랑한 이유일 터였다. 경희는 자신의 본질을 훼손할 수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검소하게 살았고 어떻게든 매달 돈을 조금씩 집에 보냈다. "공부만해라." 한수가 말했다. "모든 것을 다 배워. 네 머릿속을 지식으로 채워. 그건 누구도 너한테 빼앗아 갈 수 없는 유일한 힘이야." 한수는 ‘공부하라‘는 말 대신 ‘배우라‘고 말했고, 노아는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두 해가 흐른 후에도 그저 와세다대학교에 들어앉아 책을 읽을 수 있는 조용한 방이 있다는 사실에 여전히 매혹돼 있었다.
굶주린 사람처럼 좋은 책을 탐욕스럽게E읽어 머리를 가득 채웠다. 디킨스, 새커리, 하디, 오스틴, 트롤럽 같은 작가들의 책을 모두 읽고 나서유럽 대륙으로 넘어가 발자크, 졸라, 플로베르를 읽었으며, 뒤이어 톨스토이와 사랑에 빠졌다.
노아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괴테였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적어도 여섯 번은 읽었다.
그날 아침, 노아는 조지 엘리엇 토론 수업을 들으러 교정을 가로질러 가다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반도 상, 반도 상." 한 여자가 외쳤다. 학교에서 제일가는 미인인우메키 아키코였다.
노아는 지도자의 말이 항상 옳은 대부분의 환경과는 다른 대학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느꼈다. 그렇지만 노아는 교수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아키코의 말을 제대로 듣기 전까지 스스로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사람들 앞에서 남의 의견에 반대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 노아는 혼자 집으로 걸어가면서 아키코 생각에푹 빠져 있었다. 쉽지 않겠지만 아키코와 가까워지고 싶었다. 다음주 화요일,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노아는 아키코의 옆자리를 차지하려고 일찍 갔다. 구로다 교수는 노아의 변절에 상처받은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지만, 상처받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손님이랑 이야기하려고 여기 있는 게 아니에요. 손님 몸에 옷이잘 맞는지 보려고 있는 거예요."
"아니요, 고맙지만 괜찮아요, 모세. 하지만 부디 가난한 사람들을돕는 것을 잊지 말아요, 모세. 우리 중에 가난한 사람들이 많답니다."
"파친코 돈은 제 것이 아니에요, 존 목사님. 저희 사장님은 부자지만 전 아직 부자가 아니에요. 언젠가 전부자예요." "부자가 될 거예요." "맞다, 전 부자가 될 거예요, 존 목사님. 남자한테는 돈이 있어야해요."
존은 자신이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 몰랐다. 부모님이 마르틴 루터의 생일인 11월 10일을 존의 생일로 정해주었다.
유미는 모자수의 행동에 창피해서 고개를 숙였지만 모자수에게화를 낼 수 없었다. 모자수에게는 결코 화를 낼 수 없었다. 모자수는유미에게 난생처음 생긴 유일한 친구였다.
한수는 노아가 공부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배울 수 있는모든 것을 배워라. 모든 조선인들을 위해서, 와세다대학교 같은 학교에 갈 수 없는 모든 조선인들을 위해 배워라."
아키코가 찻잔을 내려놓고 장난스럽게 노아를 요로 밀어 뒤로 넘어뜨렸다. 아키코는 노아 위로 다리를 벌리고 올라앉아 셔츠를 벗었다. 하얀 면 브래지어와 팬티 차림이 됐다. 노아는 대단히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까만 머리카락이 윤기가 흐르는 무지갯빛 깃털처럼 얼굴 주위로 흘러내렸다.
한수는 민족주의나 종교나 심지어 사랑까지도 믿지 않았으나 교육은 믿었다. 무엇보다도 사람은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고 믿었다.
어떤 종류의 낭비도혐오했고, 세 딸 모두 쓸데없는 장신구나 소문 때문에 학교를 그만뒀을 때 그렇게 내버려둔 아내를 경멸하는 마음이 커졌다.
"아키코, 왜, 왜 항상 네가 옳다고 생각해? 왜 항상 네가 주도권을잡아야 해? 개인적인 인연이 있는 사람에게 널 언제 어디서 소개시킬지 왜 내가 결정하면 안 돼? 나라면 절대 너한테 이러지 않을 거야. 난 네 사생활을 존중할 거라고." 노아가 식식거리더니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분이 네 아빠잖아, 안 그래?" 아키코가 말했다. "너랑 꼭 닮았던데. 넌 아빠가 돌아가셨다고 했지만 돌아가시지 않았어. 넌 그냥내가 그분을 만나는 걸 원치 않았던 거야. 내가 네 야쿠자 아빠를 만나는 게 싫어서. 그리고 넌 네 아빠가 폭력배라는 것을 나한테 알리기 싫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터무니없는 고급 자가용과 제복 입은운전기사를 어떻게 설명하겠어?"
"누구한테도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 말 들어봐라, 노아야 니 아버지가 되기로 선택한 사람은 백・・"
새로 시작하느라고 돈이 좀 들었어요. 돈을 더 버는 대로 될 수 있는한 자주 돈을 보낼게요. 제 의무를 소홀히 하지는 않을 거예요. 고한수에게 돈도 갚을 거예요. 그 사람이 저한테 절대 연락하지 못하게 해줘요. 결코 그 사람을 알고 싶지 않아요.
요셉은 아이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었지만, 아이에게 이야기할 기회가 한 번이라도 있기를 바랐다. 남자는 용서하는 법을배워야 하고 무엇이 중요한지 알아야 한다고, 용서 없이 사는 것은 숨을 쉬고 움직이기만 할 뿐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요셉은 친자식처럼 사랑하는 조카를 찾으러 갈 힘은 커녕 요에서 일어날 힘도 없었다.
나는 민족의 정의를 이렇게 제안한다. 민족은 상상의 정치 공동체이다. 본성적으로 제한돼 있으며 주권을 지녔다고 상상된다. 민족은 ‘상상된다. 제일 작은 민족의 구성원일지라도 동포 대부분을결코 알거나 만나거나 심지어 소식을 듣지도 못하지만, 각자의 마음속에 동질감이라는 관념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민족은 ‘제한돼 있다고 상상된다. 인구가 10억 명에 달하는 제일 큰민족이라도 유동적일지언정 한정된 경계가 있고 그 너머에는 다른민족들이 있기 때문이다…………. 민족은 ‘주권을 지녔다고 상상된다. 이 개념이 계몽사상과 혁명이 신성하게 부여된 계급적 왕국을 무너뜨린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민족은 ‘공동체‘로 상상된다. 각자에게 만연할지 모르는실제의 불평등과 착취에도 민족은 항상 깊은 수평적 동포애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이동포애가 지난 두 세기 동안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그런 제한된 상상의 산물들을 위해 남을 죽이기보다기꺼이 자기 목숨을 내던지게 했다. 베네딕트 앤더슨
노아는 기독교인으로 자랐지만 불교 신자들, 특히 속세의 부귀영화를 저버린 불교 신자들을 존경했다. 노아가 교회에서 배운 대로면 주님은 어디에나 있었다.
주님이 이교도의 사찰이나 신사를 멀리할까? 하나님이 그런 곳들을 불쾌하게 여길까, 아니면 무엇이라도 믿고 따르려는 사람들을 이해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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