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과연 ‘역사의 페이스메이커’였을까?
15~16세기는 물론이고 18~19세기까지 세계 경제에서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두 나라, 포르투갈과 스페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아시아와 아메리카대륙 진출의 선두주자였을 뿐 아니라 15~16세기에 세계 경제를 하나로 만든 ‘글로벌리제이션(globalization)‘을 추진한 나라였다. 당시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영향력은 상상 이상으로 막강했다. 두 나라는 18~19세기에도 여전히 세계 경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세계를 제멋대로 양분한 두 개의 조약, 토르데시야스 조약과 사라고사 조약
한편 스페인은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계기로 아메리카대륙을 차근차근 정복했다. 그 결과 브라질을 제외한 중남미 대부분의 지역이 스페인 영토가 되었고 오늘날에도 이 지역의 공용어는 스페인어다. 이 지역을 흔히 ‘라틴아메리카(Latin America)‘라고 부르는데 이는 ‘라틴족의 아메리카‘라는 의미다. 라틴아메리카는 ‘이베로아메리카(Iberoamérica)‘라고도 하며 여기서 ‘이베로‘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자리한 이베리아반도를 말한다.
1494년 이 경계선을서쪽으로 1,500킬로미터 옮기는 일에 양국이 동의하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체결된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1494년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스페인의 토르데시야스에서 만나각자의 세력 확장 범위를 확정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이는 전 세계를 두 가톨릭 세력이 제멋대로 나누어 먹은, 현대인의관점으로는 믿기 어려울 만큼 황당하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결정이었다.
아무튼 가톨릭의 기준에서는 가톨릭을 대표하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세계를 사이좋게 나누어 가진 셈이었다. 로마 교황이 세계를 제멋대로 분할할 수 있었던 논리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세계는 신(기독교의 하느님)이 창조했으며 그것을 관리하고 다스릴 권리를 로마 교회가 상속받았다는 믿음과 교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물리적인 영토의 너비와 산업국 여부를 가지고 한 나라의 국력을 판단하는 것은 산업자본주의 관점, 제국주의 관점의 역사관이다. 이는다소 편협한 시각으로, 한나라의 국력을 그 시대 관점에서 국제적으로 평가할 때는 교역에서 얼마나 우월한 지위를 차지했는지, 국민 소비 생활은 얼마나 향상되었는지 등과 같은 다른 기준도 함께 적용해야 한다.
1571년 오스만제국을 격파한 레판토해전,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 해군에게 무참하게 패배한 칼레해전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투가 모두 펠리페 2세 시대에 일어났다.
사실은 ‘좀처럼 쇠퇴하지 않은 두 나라‘ 포르투갈과 스페인
마찬가지로 대서양 노예무역에 있어서도 기존에는 영국 선박이 노예무역의 상당 부분을 담당했다고 알려졌으나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흑인 노예를 가장 많이 운송한 것은 포르투갈 선박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16~19세기에 영국이 실어 나른 노예는 326만여 명이던 데반해 포르투갈과 브라질은 585만여 명에 달했다.
포르투갈은 사탕수수를 대규모 플랜테이션으로 생산하는 방식을 최초로 완성했다. 이 과정에서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아프리카에서 포르투갈령 브라질로 대량의 노예를 끌고 왔다.
천재 수학자 페르마가 고안한 ‘확률론‘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보험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가입하는 보험료율은 사고와 재해 등이 어느 정도 확률로일어날지를 예측해 보험사에서 결정한다. 이를 판단하기 위한 데이터 준비 작업이 ‘통계‘이며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을 계산하는 작업이 ‘확률론‘이다.
그러한 확률론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 페르마다. 여기에 또 한명의 천재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이 힘을 보탬으로써 확률론이 완성될 수 있었다.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만나지 않고 오로지 편지로만 확률론 분야를 함께 개척한 두 천재, 파스칼과 페르마
확률론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 페르마다. 여기에 또 한 명의 천재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이 힘을 보탬으로써 확률론이 완성될 수 있었다.
파스칼이 편지를 보낸 이후 100년 사이에 평균여명표가 영국 종신연금의 기초가 되었고 런던은 해운 보험 사업의 중심지로 거듭났다. 만일이 보험이 없었다면 해운업은 거대한 리스크를 감수할 수 있는 부유층의 독점 사업으로 남았을 것이다.
해상 운송 사업에서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를 분담하기 위한 한자동맹의 시스템, 파르텐레더라이
일회성 사업을 기본으로 여긴 중세 상인은 보험제도와는 다른 리스크 헤지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 한 예가 한자동맹에서 활용한 ‘파르텐레더라이(Partenreederei)‘로, 일종의 파트너십이다.
흥미로운 것은, 19세기에 이르러 큰수의 법칙이 사회 기본 법칙으로 여겨지게 된 일이다. 벨기에 수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아돌프 케틀레(Adolphe Quetelet)는 ‘사회 물리학(Social Physics)‘이라는 이름으로범죄율, 혼인율, 자살률 등을 고찰하고 국세(國勢)조사를 지도했다. 케틀레 덕분에 통계학으로 인간 행동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고가 정립되었다.
17세기 후반 영국에는 이미 생명보험 회사가 존재했다. 그러나 보험료 계산의 명확한 근거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사실 도박에 가까운사업이었다. 이러한 때 근대 생명보험의 기초를 마련한 것은 영국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 (Edmond Halley)의 연구였다.
런던에 커피하우스 하나가 문을 열었다. 1688년 무렵의 일이다. 이후 1730년대에 커피하우스가 금융가인 롬바드가로 이전하자 무역상과 선원이 가게에 몰려들었다. 오늘날 세계 보험시장의 중심 ‘로이즈’는 이렇게 ‘로이즈 커피하우스’에서 시작되었다.
• 페르마, 파스칼 등이 확립한 수학적 확률론 • 정치 산술 등 사회를 통계적으로 파악하는 발상, • 그러한 발상을 뒷받침하는 사회 조사 기법과 통계학의 발전 • 영구적으로 사업을 추진하는 근대 기업 그리고 해상보험이 성립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조건이 있다. • 증기선의 도입으로 정기 항로 확립, 항해 수 증가.
18~19세기 영국은 이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런던에서 탄생한 로이즈 해상보험이 세계를 아우르는 보험의 중심이 될수 있었다.
18~19세기에 영국은 천문학적 부채, ‘남해 버블 사건’, 수많은 전쟁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승승장구할 수 있었을까?
영국은 어떻게 천문학적인 부채에 시달리면서도재정파탄을 면할 수 있었을까? 사실 빚더미에 올라앉은 나라는 영국만이아니었다. 근세 유럽 각국은 대부분 막대한부채에 짓눌려 있었는데, 전쟁이 주요 원인이었다.
영국 사회학자 존 브루어(John Brewer)는18세기 영국은 ‘재정-군사국기(nical-military state)‘였다고 했다. 즉 영국은 전쟁을 위해 거액의 빚을 내어 막대한 재정을 운영하며 강력한 전쟁 수행 국가를 만들었다는주장이다. 실제로 영국과 프랑스를 비교해보면 영국의 조세 부담이 프랑스보다 훨씬 무거웠다. 애초에 프랑스 인구는 영국 인구의2~4배였기에 넉넉한 세수를 기대할 수 있었다.
프랑스가 토지세 같은 직접세를 주체로 세금을 징수했다면 영국은 간접세, 특히 소비세를 중심으로 세수를 충당했다.
똑같은 ‘버블 사건’의 위기에 대한 전혀 다른 대응으로 백팔십도 다른 운명을 맞이한 두 나라 영국과 프랑스
18세기 초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거의 같은 시기에 유명한 버블 사건이 일어났다. 영국의 남해 버블(South Sea Bubble, 일본의 ‘버블 경제(Bubble Economy)’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과 프랑스의 미시시피 버블(Mississippi Bubble). 이 두 사건은 발단에서부터 붕괴 과정까지 소름끼치게 닮았다. 그러나 이후 처리 과정에서 명암이 갈렸다.
남해회사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하며 획득한 라틴아메리카 무역권을 목적으로 세워졌으며, 그중에서도 아프리카와 서인도제도를 잇는 노예무역 이권을 주로 노렸다. 그런데 남해회사의 진정한 목적은 급격히 늘어난 영국 정부의 채무를 상환하는 것이었다.
월폴은 남해회사가 안고 있던 정부 부채를 절반으로 줄이고 나머지는 회사 이사와 정쟁에서 패배한 정치인의 재산을 몰수하고 잉글랜드은행에 부담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처리하고 투자가에게도 보상했다.
월폴이 여당인 휘그당을 이끌며 의회의 지지를 기반으로 사태를 수습하고 뒤처리에 나섰다는 사실이다.
남해 버블을 겪으며 영국은 잉글랜드은행을 중심으로 재정 제도를 일원화했다. 이처럼 정부, 의회, 중앙은행이 하나가 된 펀딩 시스템(자금 조달 시스템)이 바로 영국의 비결이었다. 영국은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도 이 시스템 덕분에 전쟁 자금 조달에 성공하며 재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자크 네케르(Jacques Necker)의 재정 개선책 역시 번번이 귀족층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네케르는 혁명 이후에도 프랑스 재정 관리를 맡아 아시냐 지폐(Assignat, 국유화된 토지를 담보로 발행한 불환지폐)를 발행해 재정난을 타개하고자 했지만 대규모 인플레이션 사태로 끝나고 말았다.
유럽 제일의 경제 선진 지역으로 도약한 네덜란드는 영국과 반복적으로 전쟁을 치르면서 차츰 유럽의 선두 자리를 내주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금융, 투자에 있어서는 여전히 암스테르담이 유럽 금융 시장의 중심이었고 전 유럽의 금융 정보가 암스테르담으로 모여들었다.
프랑스는 신용을 잃어 네덜란드 자본 유입마저 끊겼으며 반대로 영국은 버블 대처 능력으로 좋은 평가를 받음으로써 신용 점수가 높아졌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다르게 영국 남해 버블 사건은 영국 경제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역할을 했다.
영국 해군은 ‘강제 징집(press gang)’이라는 상당히 험한 징집 제도를 시행했다. 전쟁이 터지면 승조원을 강제로 징집한 것인데, 쉽게 말해 길에 지나다니는 장정을 붙잡아 배에 태우는 식으로 군인을 보충한 것이다.
유럽의 다른 국가와의 승부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낸 것은 다름 아닌 영국의 경제력, 재정 능력이었다.
결국 자금 조달에 성공한 나라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공채를 발행해 전쟁 비용을 조달하고, 자금이 장기적으로 상환되도록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경제적 역량을 다진 영국이 유럽 최강 국가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부채 액수가 아니라 빌린 돈을 확실하게 갚을 수 있는지가 가장 중요했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후 오랫동안 인도에 비해 한참 뒤처졌던 영국의 면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비결은?
세계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 그 흐름을 뒤바꾼 상품을 꼽으라고 한다면 ‘면’을 빼놓을 수 없다. 면의 역사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세계 경제에서 아시아와 유럽 사이의 균형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영국은 글로벌 생산 체제를 구축했는데, 이때 본보기가 된 것은 설탕무역이었다.
대서양무역은 기본적으로 서아프리카에서신세계로 노예를 공급하고 이 노예를 활용해신세계에서 사탕수수(설탕)를 생산하는 세제로 이루어졌다.
포르투갈은 브라질에서, 네덜란드는 카리브해 식민지에서, 영국은 서인도제도에서, 프랑스는 아이티에서 플랜테이션 방식으로 설탕을 생산해암 스테르담과 함부르크, 보르도 등의 항구로 들여왔다.
어째서 영국만 이러한 면 생산 제세를 성공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을까? 그 답은 간단하다. 영국이 세계 최대 해양제국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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