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지왕 대에 이르러 왕에 대한 칭호가 이사금에서 마립간(麻立干)으로 변경되었다. 김대문에 따르면 마립이란 말뚝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직위에 따라 놓는 것이니 조선 시대의 품석(品石, 품계를 새겨 나열한 돌)과 같은 것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조선의 품석은 임금의 것이 없지만, 신라의 마립엔 임금의 것도 있다는 점이다. 즉, 신라 조정에는 왕의 마립이 최상석 한가운데 있고, 그 아래로 신하들의 마립이 나열되어 있는 형태였다. 따라서 마립간이란 마립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곧 임금을 의미했다.

신라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불리는 박제상에 대해 『삼국사기』는 박혁거세의 후손이며, 파사이사금의 5세손으로 조부는 아도갈문왕이고, 아버지는 물품 파진찬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는 제상의 성(姓)을 김씨로 기록하고 있다. 그의 성이 김씨라는 것은 그가 혁거세의 후손이 아니라 김알지의 후손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영해(영덕) 박씨 족보에는 그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전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박문량이며, 414년에 신라의 충절 박제상의 막내로 태어난 것으로 적혀 있다. 눌지왕 2년인 418 년에 그의 아버지 박제상이 왜에서 순절하자, 어머니 김씨와 누나인 아기와 아경이 비보를 듣고 자결하였고, 둘째 누나 아영만 살아남아 그를 양육하였다고 한다. 아영은 몇 년 뒤에 박제상이 탈출시킨 미사흔과 결혼하여 궁궐로 들어갔고, 문량도 그녀를 따라 입궐하여 궁중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장성해서는 각간 이수현의 딸과 결혼하여 관직에 머물기도 하였다.

"무릇 죽고 사는 것에는 운명이 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어,
그것이 와도 막을 수 없고 그것이 달아나도 좋을 수 없는 법이오.
그런데 그대는 어찌하여 마음 아파하는 거요? 내가 그대를 위하여 방아소리를 내어 위로해 주겠소이다."
백결은 곧 가야금을 타서 방아소리를 연주했다고 한다. 이 음악은 후세에 방아악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졌다고 한다.

"백성들은 국왕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노파가 대답했다.
"많은 사람이 그를 성인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내가 듣건대, 왕은 날이에 사는 여자와 관계하면서 자주평복을 입고 나다닌다 하오. 무릇 용의 겉모습이 고기와 같이 생겼다면, 어부의 손에 잡히게 되어 있어요. 지금의 왕은 만승의 지위에 있는데 스스로 신중하지 못하니, 이런 사람을 성인이라고하면 누가 성인이 아니겠소?"

재위 4년에는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기도 했다. 그때까지 신라는 사라, 사로, 계림, 벌, 서라벌, 신라 등 여러 가지로 불리는 바람에 국호가 하나로 통일되지 못했다. 그래서 지증왕은 신하들에게 국호를 하나로 일원화하도록 지시했고, 결국 시대의 추이에 맞게 한자어로 된 ‘신라’가 정식 국호로 채택되었다. 신라는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져 사방을 모두 덮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증왕은 군주의 칭호도 국제화의 흐름에 맞게 왕으로 변경하였다. 그때까지 신라는 거서간, 이사금, 마립간 등 족장을 의미하는 신라 방언을 군주의 칭호로 사용했는데, 이때부터 국제어인 왕을 칭호로 확정했다.

514년 7월에 왕위에 오른 법흥왕은 국가 기반 확립을 위한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재위 4년(517년) 4월에는 후에 6조 체제의 근간이 되는 병부(兵部)를 설치하여 국방 및 병력 행정 체계를 일원화했다. 7년(520년) 정월에는 법령을 반포하고 관리들의 관복을 제정했다. 관복은 붉은빛과 자줏빛 두 가지 색으로 구분하여 등급을 표시하도록 했다. 또 18년(534년)에는 상대등이라는 직위를 신설, 이찬 철부를 초대 상대등에 임명하여 국사를 총괄하게 함으로써 이른바 ‘재상정치’ 시대를 열었다. 23년(539년)에는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고, ‘건원(建元)’ 원년이라고 했다.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제19대 눌지왕(417~458년) 때에 묵호자에 의해서다. 묵호자(墨胡子)는 이름이라기보다는 생김새를 보고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부른 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이는데, 글자대로 풀이하자면 ‘검은 오랑캐 자식’이다. 이는 묵호자가 피부색이 검은 인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그 소식을 들은 법흥왕은 곤룡포를 적시며 울었고, 신하들은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법을 비방하거나 헐뜯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법흥왕은 이듬해인 528년에 마침내 불교를 공인하였다. 법흥왕은 이차돈의 순교로 뜻을 이뤘고, 신라인들은 불법을 새로운 눈으로 대하게 되었다.

김대문은 『화랑세기』에서 ‘어진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가 화랑도에서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또한 이에서 생겼다’고 했다. 김대문이 『화랑세기』에서 거론한 풍월주는 총 32명이다. 그는 이 시기의 화랑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화랑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 이때는 뛰어난 인물 중에 화랑도 출신이 많았다. 신라의 삼국 통일에 가장 크게 기여한 김유신이 화랑의 제15세 풍월주이고,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제18세 풍월주였으며, 김춘추의 아버지 김용춘이 제13세 풍월주였다. 또한 가야 정벌의 영웅 사다함이 제5세 풍월주였고, 화랑 중의 화랑으로 이름을 날린 문노가 제8세 풍월주였다. 그 외에도 일일이 이름을 댈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장수가 화랑도 출신이었다. 김대문의 말대로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말엽까지 신라 사회를 떠받친 인물들은 모두 화랑도 출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벌은 서로 자기 파에서 풍월주를 배출하려고 경쟁을 하였고, 급기야 681년에는 파벌 싸움이 극에 달해 김흠돌의 난이 일어났다. 이에 신문왕은 화랑도를 폐지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내렸다.
그 후 화랑도는 부활하지만, 풍월주는 사라지고 국선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따라서 풍월주 위주의 화랑도 조직은 커다란 변화를 겪어야 했고, 조직의 힘도 크게 약화되었다.

최치원은 화랑을 ‘풍류’라고 하면서 ‘유불선의 세 가지 교를 포괄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해석했다.

왕위에 오를 당시 선덕왕의 남편은 김용춘이었다. 그러나 선덕왕이 용춘에게서 자식을 잉태하지 못하자 즉위 후에는 흠반과 을제가 보태져 남편이 세 명으로 늘었다. 이는 삼서(三)제도를 따른 것이었다. 삼서제도란 왕녀가 자식을 가지지 못할 때, 남편을 셋 얻게 하는 신라의 전통적인 제도였다. 선덕왕은 즉위년 2월에 그들 중에서 을제를 택해 국정을 맡겼다.

막상 김춘추와 결혼은 했지만 문희는 정실이 되지 못했다. 당시에도 정실 부인은 오직 한 명만 될 수 있었는데, 김춘추에겐 이미 아내 보량궁주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희는 한동안 첩의 신분으로 지내다가 보량이 죽고 난 뒤에야 정실의 신분을 획득했다.

흔히 신라의 통일을 삼국 통일이라고 말하지만, 신라가 장악한 땅은 백제의 한반도 영토와 고구려의 일부 지역에 불과하므로 그렇게 부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신라는 애초부터 삼국 통일을 외친 것이 아니라 삼한의 통일을 외쳤고, 대개 삼한의 영토가 대동강 이남에 한정된 것을 감안할 때, 그 목표를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신라의 통일은 삼국 통일이 아닌, 삼한 통일로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신라가 삼한을 통일한 것은 우리 민족의 영토를 크게 축소시켰다는 사실 때문에 그 의미가 폄하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신라의 통일이 한민족의 활동 영역을 한반도로 축소시킨 원인이라고 말하는 이도 많다.

물론 그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 때문에 신라의 삼한 통일을 무의미한 것으로 평가해서는 곤란하다.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여 통일을 했다는 것이나 통일로 인해 우리 민족의 활동 반경이 좁아졌다고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민족적 개념이 형성된 고려 이후의 사관에 해당한다.

문무왕 연간은 원효와 의상이라는, 신라 불교를 대표하는 두 승려가 활동하던 시기였다. 원효는 일심, 화쟁, 무애 사상을 바탕으로 왕과 왕비를 비롯한 왕족들은 물론이고, 일반 귀족, 서민, 천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계층을 교화하여 사상적인 면에서 신라 불교의 대중화에 획기적인 공헌을 하였다. 의상은 화엄사상을 기반으로 많은 제자를 길러 전국에 거대 사찰을 대거 건립함으로써, 신라 불교의 양적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여행 도중 어느 동굴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밤중에 목이 말라 손에 잡히는 대로 물을 마셨는데, 그것은 해골에 괸 물이었다. 아침에 그 사실을 알고, 그는 기겁을 하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것은 다시 큰 깨달음으로 변했다. ‘진리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관리가 남산 문천교에서 원효를 만나니, 원효는 일부러 물에 옷을 적신 뒤에 궁으로 향했다. 궁에 도착한 원효는 옷을 갈아입고, 젖은 옷을 말렸다. 이 때문에 옷이 마를 때까지 대궐에서 묵게 되었다. 그리고 요석공주와 관계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신라 10현 가운데 한 사람인 설총이다.

원효 사상의 요체는 대개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모든 것이 오직 마음에 달렸다는 일심론이요, 둘째는 철저한 자유를 추구한 무애론이요, 셋째는 모든 백가의 설이 옳지 않음이 없고 팔만법문이 모두 이치에 맞다는 화쟁론이다.

원효 사상은 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지만, 이 세 가지는 알고 보면 하나이다. 일심론, 무애론, 화쟁론의 본질은 자유이며, 그 자유가 깨달음을 향해 있을 때, 그 어떤 것도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곧 깨달음을 위한 정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삶이 수행이며 정진이라는 뜻이다. 원효의 위대함은 바로 깨달음을 배움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삶 자체로 보았다는 데 있다.

하지만 원효와 의상의 삶은 극히 달랐다. 원효가 당대의 승려들에겐 이단아이자 아웃사이더였다면, 의상은 당대의 우등생이요 주목받는 주류였다. 원효가 중류층 출신인 것에 비해 의상은 왕족 출신의 상류층인 것부터가 달랐다. 말하자면 그들은 출발부터 다른 처지였다. 그러나 그들은 처지와 방법과 방향이 달랐을 뿐 추구하는 본질은 동일했다. 그들은 우주와 자아의 동일성을 인정했고, 우주의 그 어떤 것도 자기 자신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었다. 원효의 화쟁론에 따르면 의상의 삶도 팔만법문의 하나로서 이치에 맞는 깨달음의 길이고, 의상의 화엄론에 따르면 원효의 삶도 대립을 초월하여 융합을 구현한 꽃의 세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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