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관심이 많은 대중들의 사랑을 잃은 데에는 역사학자들의 책임도 크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특히 세 가지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폭증하는 새로운 자료를 제대로 정리하고 보급하지 못했다. 매년 지하에서 수만 점의 유물이 출토되면서 과거의 통설이 무너지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자료를 활용한 역사의 복원에 소홀한결과, 고대사 해석의 일등 사료인 고고학적 자료가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둘째, 역사하 고유의 방법이라는 도그마에 빠져 눈부시게 발전하는 자연과학과 공학, 통계학, 법의학 등 인접 학문의 방법론을 활용한 융복합적 연구에 소홀했다. 대형 고분이나 토성 축조의 과학적 원리를 설명할수 있는 역사가는 없다. 학제간 연구가 절실한 시점이다.

셋째, 한반도라는 좁은 공간만을 대상으로 연구와 교육을 전개했다. 그 탓에 한국 고대사회의 특징을 외국의 사례와 비교하여 세계사적 보편성과 한국적 특수성을 설명해내는 비교사적 시각이 크게 부족하다.

유물과유적,
삼국시대의 타임캡슐을 열다

한국 고대사학자는 이제 옛 서적만을 뒤적이며 책상에 앉아 고고하게 연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딛고 선 땅 위, 혹은 땅 아래 남겨진 흔적을 찾아다니며 보물을캐듯 유물과 유적을 찾아 나선다. 한계가 분명했던 우리 고대사 연구를 가능성의 영역으로 확장시킨 유적과 유물의 가치 그리고 융합연구의 필요성을 함께 살펴보자.

한국 고대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런 푸념을 접한 사람들은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 같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냐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실제 참고할  내용은 그렇게 많지 않다. 조금 과장하자면 아침 일찍일어나 맘먹고 읽기 시작하면 저녁 즈음 더는 넘겨볼 책장이 남지 않을 정도다. 게다가 『삼국사기』는 12세기, 『삼국유사』는 13세기에 쓰였으니 삼국이 형성되고 천 년이 더 지난 후에야 작성된 것이다. 그러니 각 책의 저자인 고려시대 유학자나 불교 승려의 역사 인식에 따라 상당 부분 잘려 나가고 왜곡되었을 터. 

두 사료 모두 삼국시대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금석문과 목간 자료를 통한 연구
다행히 불타거나 소실된 사료 외에 채 발견되지 않은 사료가 남아 있다. 우리가 두 발로 딛고 서는땅 위 혹은 아래에 말이다. 하나의 사료를 발굴할 때마다 학계는 극적인 순간을 맞이한다. 중진 원로들이 쓴 논문 수십 편이 와르르 무너지는 도미노처럼 힘을 잃을 정도로 정설을 뒤집는 사실들이드러나기 때문이다.

유물과 유적, 땅에서 나오는 빅데이터
땅에 누워 입을 벌리고 떨어지는 사과를 기다릴 수만은 없는 것처럼 가끔, 우연히 발견되는 금석문과 목간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다. 반면 땅속에서 발견되는 매장문화재, 즉 발굴되는 실물자료는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조금 힘들더라도 쏟아지는 고고학적 물질자료에 눈을 돌려 보석을 캐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토기, 기와, 철기, 목기 등이 쏟아져 나오는데 우리는 이것을 ‘남겨진 물건‘이라 해서 유물이라 부른다. 유물이 묻혀 있던 무덤이나 집 자리, 토기나 기와를 굽던 가마 같은 구조물들은 유구라 부르며, 유구와 유물이 묻혀 있는 공간은 유적이라 부른다.

현행법률상 유적을 발굴하면 2년 이내에 반드시 정식 보고서를 발간해야 하는데, 어떤 경우는 한 권으로도 충분하지만 어떤 경우는 유적 한군데를 조사한 후 기록한 내용이 보고서 10권 분량을 훌쩍 넘기는 경우도 있다. 매년 엄청나게 많은 자료가 쏟아지는 셈이다.

당시 한반도 남부에 살던 사람들은 금속기 문명을 기초로 쌀농사를 지으며 잉여 생산물을 거두는 문화를 영위했다. 한정된 농지와 물을 둘러싼 경쟁이 심해지면서 자연스럽게 갈등과 분쟁이 일어났고, 그것이 증폭되어 전쟁과 살인이 나타났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각종 방어시설을 설치한 방어취락은 당시 사회가 극도의 긴장 관계에 놓여 있었음을 증명하는 자료다. 쌀농사로 풍요를 누렸지만, 결코 평화롭지는 않았던 금속기 문화는 일본 북부 규슈를 기점으로 일본 열도 곳곳에 급속도로 번져나갔다.

정치사적으로 국가 형성 과정을 밝히려는 연구자에게도 고고학 자료는 좋은 재료다. 평화롭고 평등한 사회가 전쟁을 거치면서 어떻게 군사를 조직해 나갔는지 추적할 수 있다.

무덤이 말해주는 고대의 지배구조
한반도 청동기시대의 대표 유적인 고인돌을 통해서도 당시의 사회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먼저 밝혀둘 것이 있다. 고인돌의 원래 모습은 상석이라고 부르는 큰 돌 아래 사면을 돌로 감싼 폐쇄 형태다. 우리가 쉽게 접하는 만화나 교과서 속 고인돌 이미지는 대개 큰 돌(상석)을 두 개의 고임돌(지석)이 받치고 있는 형태인데, 이는 후대에 도굴꾼에 의해 양쪽 돌이 떨어져나간 후의 모습이다.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은 있는 자와 없는 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구분을 의미한다.

무덤에서 나오는 무기와 마구는 당시의 군사조직과 전쟁방식을 대변한다.

초대형 무덤들은 5세기 즈음 성행하더니 6세기에 이르러 점점 축소되고 유물부장량도 줄어들었다. ‘율령에의한 지배‘가 본격화되며 나타난 변화다.
결국 율령 지배 이전의 무덤은 사람의 등급을 매기며 지배구조를 표현하는 장치로활용되었던 것이다.

부산 동래구 복천동 고분군에서 처음 발견된 쇠로 만든 말 투구는 4세기 중엽 고구려 고분인 안악 3호분의 벽화를 떠올리게 한다. 기수만이 아니라 말까지 온통 갑옷과 투구로 무장하고 있는 그림으로, 중장기병을 표현한것이며 비유하자면 현대의 탱크부대와 같다. 긴 창을 들고 말의 돌파력으로 적진을 붕괴시킨 후 보병들이 들이닥쳐 뒷마무리하는 탱크부대의 전술로 동북아시아 최강자로 우뚝 선 이가 바로 광개토대왕이다.

대성동 이외에도 한반도 남해안에서는 일본에서 제작했거나 일본의 영향을 받은 왜계 토기가 종종 출토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자료를 가지고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학자는 없다. 가야와 백제, 신라 등 한반도의 주민들이 일본 열도에 건너가 남긴 유물의 양에 비하면 왜인들이 한반도에남긴 유물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 열도 곳곳에서 한반도 주민들이 무리를 이루어 건너간 흔적이 엄청나게 많이 발견되었고 그후 문명이 발전하는 양상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밥그릇까지 규제한 율령의 고고학
삼국시대의 법령, 즉 율령에 표현된 다양한 물질문화의 양상을 밝히는 것을 ‘율령의 고고학‘이라부른다. 이와 관련해 사비기라 불리는 6세기 전반부터 7세기 후반 백제의 무덤에 적용된 율령의 고고학을 살펴보자.

당시 사용한 시루의 모습은 충청,전라, 경상지역의 것과 비슷하다. 한반도 남부 주민들이 규슈 북부에 이주, 정착하면서 식문화를 이어간 것이다.

5세기에 접어들자 규슈 북부를 넘어 나라, 오사카,
교토, 시가 등지에서도 시루를 사용하는 가구 수가 엄청나게 증가했는데, 그 형태가 규슈의 경우와같이 충청도나 전라도 지역의 것을 쏙 빼닮았다. 이는 백제계 주민들이 일본 열도의 심장부로 대거이주, 정착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나라의 난고유적은 한반도 주민들이 대거 이주해 일본 사회의 문명화에 크게 공헌한 사실을 입증하는 대표 사례다. 이 유적을 발굴한 일본의 고고학자들은 한반도 이주민들이 철기와 구슬을 만들고, 말을 키우는 문화를 영위하며 일본 사회의 문명화에 크게 공헌했음을 밝혔다. 

고대 사회에서 말은 군사력과 정보력, 물류의 수단이었고 고기와 가죽으로 부를 축적하는 재산이었다.

비명횡사한 부왕을 기리는 부여의 능사, 먼저 죽은 아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왕흥사 역시 발굴조사 결과 전모가 드러난 유적이다.

한편 익산 미륵사가 무왕과 신라 출신 선화공주의 협력으로조성되었다고 우리에게 말해준 문헌은 13세기에 쓰여진 『삼국유사』인데, 미륵사지 서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사리봉안기가 발견되면서 800년 통설이 무너졌다. 문헌에는 보이지 않던 사택씨 왕후가 등장했고 무왕의 왕비가 누구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시작됐다. 결국 미륵사를 창건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까지 논쟁이 이어졌는데, 결과적으로 무왕의 왕비가 여러 명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이제는 익산 쌍릉에 묻혀 있는 인물이 누구인지를 밝히려는 발굴조사가 이어지면서 7세기전반의 백제사를 새로 써야 할 정도로 통설을 뒤엎는 사실이 속속 발견되고 있다. 이처럼 땅에서새롭게 출토되는 자료에 의해 기존 정설은 붕괴되며 새로운 연구 과제가 지속적으로 창출되고 있다.

역사학자의 연구는 역동적이어야 한다
1부의 결론은 고대사를 연구하는 사학자의 엉덩이가 더 가벼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정된 문헌자료만 가지고 연구실에 틀어박혀 씨름하던 시대는 지났다. 국내는 물론이고 국외 답사가 필수인 시대다.

이때 개로왕이 감행한 대규모 토목공사를 『삼국사기』는 증토축성土築城이라 부른다. 그러데 그 표현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았으니, 수수께끼 같은 의문을 풀겠다며 많은 역사학자들이 달려들었다.
‘증토‘란 ‘흙을 찌다‘란 의미인데, 흙을 단단하게 다진 것이라고 보거나 많은 흙을 모았다는 식으로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명확한 답을 얻었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해답은 바로 옆 나라중국의 섬서성 유림 지역의 통만성에 있었다. 중국 역사서인 『진서」에서 대하라는 나라를 세운흉노족 출신의 혁련발발이 ‘만 가지 오랑캐를 통일했다‘는 의미의 통만성을 쌓는 정황을 설명할 때증토축성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중국 학자들이 통만성을 발굴조사해 성을 쌓은 재료를 분석하니 황토와 석회가 사용되었음이 밝혀졌다. 황토와 석회에 물을 섞으면 화학반응이 일어나 많은수증기가 발생하는데, 고대인들은 이 현상을 보고 흙을 찌다, 즉 증토라고 표현한 것이다. 결국 백제도 토목, 건축 공사에 석회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커졌다. 이 사례는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는 연구자가 한국이란 틀 안에만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앞으로 역사학자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같은 역할을 맡아야 한다. 고고학자가 발굴한 유물을 가지고 화학자와 함께 분석하기도 하고, 토목공학자와 함께 공학적 원리를 규명하는 식으로 새로운연구 방법론을 개발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역사 연구는 퇴보할 수밖에 없다.

사학자라면 과거의 해석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역사는 그런 질문과 대답으로 시작되고 이어지며 미래로 나아간다.

무덤과 인골,
고대인이 말을 걸다.

긴 시간 동안 과거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해온 무덤과 인골은 미처 알지 못했던우리 역사를 밝히는 길잡이가 된다. 그렇지만 인골이 중요한 연구 자료로 인정받기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 고고학과 고대사 연구에서 인골은 어떤 방식으로 다뤄졌을까. 인골 연구의 궤적을 살피며 죽음이 아닌 삶을말하는 생생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땅속에서 복원한 인류의 자서전

고고학 연구의 블루오션, 인골
무덤은 오래전부터 고고학적 자료이자 유구로 중요하게 다뤄졌지만, 인골의 경우는 좀 달랐다. 간혹 인골 자체나 그 흔적이 출토되었다 하더라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이를 고고학적 자료로 인식하는 자세도 부족했다. 인골이 고대사 연구의 일 등급 자료라는 것을 깨달은 것도 최근의 일이다.

인골의 체계적인 수습, 정리에서부터 사망 원인이나 생시에 앓던 질병, 습관, 영양 상태 등을 밝히기 위해서는 여러 분야 전문가들의 협업이 필요하다. 발굴조사 기술이 향상되고 체질인류학이나법의학 등 유관 분야 전문가들과의 융복합적인 협동 연구가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하였으니 과거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영역과 깊이로 연구의 범위가 확장될 것이라 믿는다. 이제부터는 소중한고고학적 자료로서 인골이 우리에게 전해준 이야기들을 살펴보자.

사망할 때 이나이가 모두 제각각이기 때문에 매장의 과정을 상세하게 고려하지 않고서 가족 관계를 추정하는것은 옳지 않다. 이후 고고학적 발굴조사에 법의학자와 형질인류학자가 참여하면서 기존 연구에서빚어졌던 오류가 대거 수정되었다.

심지어 경상도 내륙지방에서도 외이도골종에 걸린 여성 인골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해안가의해녀가 내륙으로 시집을 갔다는 조금 과감한(?) 추정도 가능하게 한다.

경산 임당동 고분군은 진한에서 신라에 걸쳐 장기간 만들어진 무덤들인데, 발굴 결과 유례가 없을정도로 많은 인골이 출토되었다. 현재 발견된 인골 대부분은 영남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200여 개체의 인골 중에서 편두를 한 두개골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진한과변한은 물론 신라와 가야에서도 편두를 실시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고구려 벽화 고분 중에 개마총이란 무덤이 있는데, 여기 금동관을 쓰고 있는 무덤의 주인공역시 편두로 표현되어 있다. 삼국시대에 편두는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광범위하게 시행되던 풍습이었을까.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한국만이 아니라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태평양, 중남미 등편두를 시행했던 지역을 대상으로 삼아 비교 연구할 필요가 있다. 역사학자만이 아니라 고고학자,인류학자, 민속학자, 법의학자 등 여러 분야의 협업 없이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다.

먼저 와 있던 조몬인과 뒤늦게 들어온 야요이인이 섞이면서 현재의 일본인의 얼굴 생김새를 갖췄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이런 설을 뒷받침해준 것이 야마구치현 도이가하마#유적이다. 동해를 바라보며 해안가에 직교하는 방향으로 형성된 사구 위에서 수많은 야요이시대 무덤이 발견됐고 이후 상태가 양호한 인골을 300 개체 이상 발굴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됐다. 가슴에 가마우지를 안고 매장된 무당 여인, 상반신에 15발 이상 화살촉을 맞고 사망한 영웅적인 인물 등의 유골로 유명세를 탔지만, 가장 중요한발견은 이들의 형질적인 특징이 선주민인 조몬인과 달랐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렇게 단순한 기준으로 인종을 나눌 수는 없다. 수천 년 간 서로 다른 인종 간 혈통이 섞였기에 전형적인 조몬인과 야요이인의 얼굴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주나 원거리 혼인이 활발하지 않았던 일본 역사의 특징 때문인지 몰라도 일본의 거리를 걷다 보면불시에 과거의 조몬인이나 야요이인을 마주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수많은 유물이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거나, ‘태왕릉‘이란 글자가 떡하니 새겨진 전돌이 발견되어도 주인공을 쉽게 확정할 수 없는 신라와 고구려 왕릉에 비해,
변변한 유물도 발견되지 않았던 쌍릉대왕묘의 주인공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인골 덕분이다.

한편 북한 학계는 발견된 인골을 과학적 방법으로 측정한 결과 5011년 전에 탄생한 사실이 밝혀져서 기원전 3000년 이전에 단군이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기원전 2333 년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는『삼국유사』 기사보다 단군 조선의 실제 건국 연대가 훨씬 이전이라는 주장인 셈이다. 무덤의 구조와 금동관이 고구려식인 것은 훗날 고구려인들이 단군릉을 개축하고 금동관을 넣은 결과라고 강변했다. 기원전 30세기 이전에 고대 국가가 발생했다는 주장은 세계사의 상식을 뒤엎는 것인데, 북한학계는 이러한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거듭 무리수를 두고 있다.

결과적으로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대동강 문명이 세계 4대 문명보다 더 오래되고 우수하다는 주장, 나아가 인류의 기원지가 아프리카 동남부가 아니라 평양이라는  기상천외한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나가도 너무 나간 북한 학계의연구 성과는 과학과는 동떨어진 처지에 빠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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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三國史記)
현존하는 한국의 역사서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성립부터 고려 초기까지 약 천 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본기 28권, 지 9권, 표 3권, 열전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김부식이 집필한 원본은 남아 있지 않으며 필사본 중 일부는 보물 제722호, 국보 제322-1호와 제322-2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한(三韓)
삼국시대 이전 한반도 중남부지역에 형성되어 있었던 마한, 진한, 변한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편의상 셋으로 분류하지만 각각 수십 개의 소국으로 구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문헌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이들은 이후 각각 백제, 가야, 신라로 발전하면서 북쪽의 고구려와 함께 삼국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가야(加耶)
삼국시대 초중반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여러 국가를 가리키며, 삼한의 하나였던 변한에서 기원했다. 초기에는 지금의 김해에 터전을 잡은 금관가야가, 후기에는 고령의 대가야가 주도권을 잡았다고 알려져 있다. 가야의 역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와 겹치지만 사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아 심하게 왜곡된 적이 있다.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説)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에 있는 임나(가야 지역)에 통치 기구를 두고 백제와 신라를 간접 통치했다는 주장이다. 일본의 정사서 『일본서기』를 바탕으로 전개되면서 한일 역사학계에서 오랜 기간 논란이 되었다가, 가야 고분군의 발굴 등으로 유물들이 발견되면서 2010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폐기되었다. 고고학적 발굴로 역사 왜곡을 이겨낸 좋은 사례 중 하나이기도 하다.

고분(古墳)
일반적으로는 옛 무덤을 가리키나 고고학에서는 일정한 형식을 갖춘 한정된 시대의 지배층의 무덤을 말한다. 고분이 모인 것을 고분군이라고 하며, 매장된 각종 껴묻거리(부장품)의 발굴을 통해 과거의 시대상을 파악할 수 있다.

순장/후장(殉葬/厚葬)
후장은 큰 규모로 후하게 장례를 치르는 것을, 순장은 후장에서 더 나아가 다른 사람도 같이 묻는 것을 말한다. 두 가지 장례 풍습은 한국 고대의 장례 문화를 대표함과 동시에 고대 계급 사회의 시대상과 고대인들이 사후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 지를 보여준다.

수도유적(首都遺蹟)
국가의 중앙 정부가 자리 잡은 수도의 유적으로, 중앙인과 지방인의 차이가 컸던 고대 국가의 심장 역할을 했다. 이 책에서는 보통 왕성, 왕경, 도성 등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한다.

위례성(慰禮城)
백제 왕조의 수도유적으로, 기원전 18년 온조왕에서부터 475년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하기까지 492년간 백제의 왕성으로 전해진다. 풍납토성 발굴 전까지 다양한 견해가 난립했으나 1997년 풍납토성이 발굴되면서 지금은 풍납토성 혹은 몽촌토성이 하남 위례성이라는 설이 유력해졌다.

실크로드(Silk road)
비단길이라고도 하며, 중국과 유럽을 연결해 동서 간의 활발한 왕래를 이끌었던 무역로를 말한다. 경로에 따라 초원길, 오아시스와 사막길 등 다양한 종류가 있으며, 고대 한국이 이 길을 통해 동북아시아를 넘어 서아시아까지 교류했다는 자료들이 발굴되고 있다.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는 한국이란 틀 안에만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 역사학자는 민족사를넘어서 인류 공동의 역사 연구에 앞장서야 한다."

이제는 역사를 새롭게 바라봐야 할 때

고대사는 그 불확실성으로 인해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신화와 전설이 역사적인 사실과 뒤섞이면서 때로는 장대한 판타지 소설의 소재가 되기도 하고,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는 사극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그 누구도 객관적인 진실을 확신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수수께끼 풀듯 고대사의 수많은 주제에 도전한다. 특히 문헌 자료가 부족한 초기 고대사, 이른바 상고사는 전문 연구자만이 아니라 역사에 관심이 많은 일반 시민들이 수많은 설을 자유롭게 주장하는 백가쟁명의 장이기도 하다. 수십 년간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연구자나 종교적 신념에 사로잡힌 유튜버가등가로 취급받는 분야이기도 하다.

‘객관적 자료에 기초한 합리적 추론‘이라는 고대사 연구의 기본 원칙이 완전히 무시된 난폭한 주장이지만 민족주의 사관이라는 이름만으로 면죄부를 받고, 이러한 폭거에 대한 비판은 식민사학자의 커밍아웃으로 치부되는 것이 현실이다. 세계 학계에서 우스갯거리로 취급될 것이 분명한 주장들이 국내에서 열광적으로 갈채를 받는 현실이 분명 정상은 아니다. ‘민족주의‘라는 한마디로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다.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더욱 엄격한 논리가 요구된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학은 인문학임과 동시에 과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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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미의 장례는 구립장례식장에서 치를 예정이었다. 그저께 병리 해부한 시신이 어제 반송되어 가족만 모여 경야"를 치렀다고 들었다.
* 장례를 치르기 전, 친족끼리 곁에서 밤새도록 지키는 것.

시즈카처럼 여생이 짧아지면 모르는 사람의 장례식도 남의 일 같지 않게 된다. 장례식장의 규모, 예상 조문객, 어느 스님에게 경을 부탁할지, 답례품으로는 무엇이 어울릴지 등을 상상하는 동안 시간이훌쩍 흘러 버린다.

단 음울한 감상과는 거리가 멀다. 장례식은 긴 인생에서 주역이 되는 마지막 기회다. 할 수 있다면 남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이 직접 기획하고 싶지 않은가. 장송해 주는 사람들이 봄날처럼 따뜻하게, 그리고 축제처럼 즐겨 주길 바란다. 이것이 시즈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장례식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관에서 잠든 후루미는 자신의 장례식을 어떻게 보고 있을 텐가. 후회가 남는 인생이었을까, 아니면 웃으며 잠들 수 있는 인생이었을까. 공장을 접고 빚이 남아 있었다고 해서 꼭 후회할 거라는 법도 없다. 사람의 만족은 사람의 수만큼이나 존재하는 것이니까.

"오늘 같은 날에는 검은색으로 칠한다든가 하는 배려를 하실순없나요?"
"TPO*를 생각하면 결혼식용 흰색이나 히나마쓰리용** 핑크색 휠체어를 준비해야지."
*시간(time), 장소(place), 경우(occasion)의 머리글자를 딴 것으로, 옷차림의 기본원칙을 의미한다.

**여자아이의 건강한 성장과 건강을 기원하기 위해 매년 3월 3일에치르는 일본 전통 축제.

부친이 자네에게 가업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한 것도  아들을 믿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었어. 재무상태가  엉망인 회사를 아들에게 부담 지우고 싶지 않았던 거지.  그러니 아버지를 너무 원망하진 마. 보내드릴 때만큼은 조금이라도 위로해 드리라고

"그거야말로 나와는 안 어울려. 참회는 무슨,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도 메롱을 해 볼까 계획 중이라고."

"배를 꿰맬 때, 그 입도 함께 꿰맸으면 좋았겠네요."

오리가 파를 짊어지고 온다*는 말은 이런 걸 두고하는 말일 것이다. 신문 보도 직후라서 미기와가 왜찾아왔는지는 대강 짐작이 간다. 도대체 겐타로가사건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건지, 아니면 사건이 겐타로에게 다가가는 건지

* 오리가 파를 짊어지고 옴으로써 오리요리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가 갖춰지는 매우 편한 상황을 뜻하는 일본 속담. 즉 상대가 좋은 일을 들고 와 본인이 편해지는 상황을 뜻한다.

여기서 시즈카는 로카르의 교환법칙을 떠올렸다.
서로 다른 물질이 접촉하는 순간, 서로가 서로에게접촉 사실을 가리키는 증거를 남긴다는 법칙이다.

재능이 좌우하는 세계에서는 관을 얻는 것이 비약의 조건이 되는 경우가 많다. 재능은 외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아 보증할 만한 그 분야의 무언가가필요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위한 것, 남을 위한 것이라면 법률 따위지키지 않아도 돼. 대체로 법률은 악행을 제지하는것이지 선행을 독려하는 건 아니야. ‘
법률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시즈카 자신도 뼈저리게 알고 있지만 겐타로에게 지적받자 어쩐지 부아가 치밀었다.

제1게이힌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향하던 가베무라의 자동차는 하마마쓰초 1번지에 접어들었다. 왼쪽에는 신칸선의 고가가, 그 맞은편에는 하마리큐*일부도 보일 듯 말 듯한다. 그 주변 일대는 비즈니스거리이지만 상업빌딩의 틈새에 가정집도 들어서 있다. 오늘날의 제1게이힌 도로는 원래 도카이도**의요점으로 에도 시대에는 조카마치***로서 번성한 장소다. 그렇게 생각하면 번화한 현재의 모습에도 친근감이 느껴진다.

* 도쿄에 있는 옛 별궁.
**에도 시대 교토와 에도를 잇는 교통로.
***에도 시대에 형성된 계획도시로, 무사와 상공업자가 모여 성의 방위시설이자 행정도시, 상업도시의 역할을 했다.

늙는다는 것은 매일매일 무언가를 내려놓는 과정이다. 오랜 친구들, 체득한 기술, 지식, 그리고 기억.
본인이 아무리 발버둥 친다고 해도 소중한 것이 손가락 사이로 주르르 흘러내린다. 면허증 반납을 거부하는 사람은 그런 일상에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노인들의 생각은 필요할 때도 필요하지 않을 때도 있어. 눈앞에서 젊은이가 늙어빠진 노인 두 명에게 고개를 숙여. 의료를 보고 행하지 않음은 용기가 없음이니라."

"아이들에게 돌진하기 직전에 핸들을 꺾었다니 정말 대단하시네요."
"그렇죠. 하지만 요즘처럼 고령 운전자에 의한 사고가 다수 발생하면 이런 호평도 악평에 묻히기 쉽습니다. 남는건 고령 운전자에 대한 책임 전가와 의분의 탈을 쓴 울분 해소뿐이고요."

시즈카는 바로 그렇게 결론 지었다. 화장터로 향하고 있던 영구차가 다시 돌아온다. 이런 비합리를 해치우는 건그 규격 밖의 영감 정도다.

화장터의 노후화는 지진대책의 측면에서도 지자체에는 골치 아픈 문제야. 우리 회사의 영업부 정보에 의하면화장터 한두 곳은 곧 멈출 거야. 원래 멈추지 않으면 위험한 화장로가 아직도 많이 가동 중이거든. 이걸로 성공적으-로 보수 공사 수주가 날아 들어오면 그거야말로 야케부토리*란 거지. 하하하하.
시즈카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 화재 후, 살림이나 사업이 더욱 번창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

무엇이 옛날 솜씨란 건가. 판사 시절에는 이런 막 나가는 짓을 한 적은 없다. 곰곰이 생각해 보건대 시즈카가 이렇게까지 공격적으로 된 것은 겐타로에게 안 좋은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
훌륭한 반격이든 공갈이든 내뱉는 순간에는 상쾌해도 곧 부메랑처럼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 내뱉는 기세가 강하면 강한 만큼 수중에 되돌아올 때의 위력도 크다.

"어차피 사람은 죽으면 재가 되거나 흙으로 돌아가거나 물고기 먹이가 돼. 중요한 건 시신이 어떻게 되는지가 아니라 그 녀석이 생전에 무엇을 남겼는가야 시즈카 씨 동료였던 다지마라는 판사는 정당한 재판을 해 왔겠지. 그렇다면 그걸로 괜찮지 않아?"

니시고리의 이야기는 매우 현실적이다. 시즈카나 겐타로 같은 노인이 되면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애정과 돈을 같은 선상에 두지 말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가족도 하기 싫어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시키려면 아무래도 돈 이야기가 나오는 건 피할 수 없다. 무급으로 환자의 오물에 젖고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은 모두마더 테레사가 될 것이다.

"감정만으로는 길을 잘못 들고 논리만으로는 추진력이 부족하게 돼."
그럴싸한 말을 하지만 겐타로 자신도 마음먹은 대로 행동한다는 점에서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다만 겐타로에게는 경영자로서의 판단력이 있어서 길을 잘못 들지 않을 뿐이다. 무엇보다 이 영감은 길을 잘못 들어도 목적지에 도착할 것만 같다.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인생이었을까. 마지막 순간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웃으며 죽음을 맞이 할 수 있을까

사적인 것보다는 공적인 것. 세간보다는 법조계를우선하는 삶의 방식이 판사로서 과연 옳을까, 어떨까.
그것은 분명 아무도 모른다. 아니 알 필요도 없다.
당사자가 웃으며 죽을 수 있느냐 아니냐만이 문제일것이다.

"그래. 그건 올바른 판결이었어."
"올바른 일을 했는데 어째서 미움받아야 하는 거야?"
"세상은 옳고 그른 것만으로 나눠질 만큼 단순하지 않아서 그래."

"자신이 정한 자신의 규칙을 따라. 간단하지만 꽤어려워. 어려우니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신뢰를 받는 거고."
"알 것 같아."

"남을 저주하면 자기에게도 재앙이 돌아와. 남에게 못된 짓을 하면 그대로 복수 당하지. 그런 걸 반복하는 동안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고, 마도카나 시즈카 씨와는 안 어울려."

"당신은 판결에 불복했겠지만 난 재판이란 건 공평한 데다가 죄인에게도 관대한 것 같아. 적어도 저런 말도 안 되는 사회적 제재라는 녀석보다는 나으니까."

"불운하지 않은 직업이 어디 있겠나. 누군가를 만족시키면 다른 누군가가 불만족하지. 세상사람들이처세술에 능한 사람을 질투하는 것도 다 그래서야."

"겐타로 씨가 말하니 설득력이 있네요."
"시즈카 씨가 말하면 더욱 설득력이 있지."
"왜 그럴까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관철하는 사람이니까.
뭐 그런 성격이 아니면 판사는 못 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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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루메의 말에서 뾰족한 가시가 느껴졌다. 돌이켜생각해 보면 경시청 강연에서 경찰의 예측 수사에의한 원죄에 관해 일장 연설을 했었다. 오인체포에서 발달된 원죄 사건이 발각된 타이밍이기도 하고주의도 환기할 겸 강의한 것이지만, 청중에는 구루메처럼 반감을 가진 자도 있었던 듯하다.

구루메는 은연중에 계획 살인을 암시한다. 경찰의관점에서는 그럴 만하다. 절반의 확률로 사망한다면모 아니면 도라는 생각으로 계획 살인을 실행해 볼가치가 있다.

B간염 바이러스 보균 여성이 유방암 적출 수술을 받은 후, 스테로이드제를 병용한 화학요법 중에 전격간염이 발병해 사망한 사건이었다. 유족은 의료 과실을 의심해 소송까지 제기했지만 공판이 시작되자마자 곧 합의했다.

"합의라고 해봤자 병원 측 변호사가 굉장히 실력이 좋은 남자여서요. 아무리 패배가 확실한 재판이라도 돈만 지불하면 의뢰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말죠. 합의했다고 해도 유족 측은 몹시 괴로웠을 거예요."

변함없는 겐타로의 트집이지만 내용자체는 틀리지 않는다. 경찰의 직감이든, 과학수사의 분석 결과든, 원죄 사건의 원흉은 절반 이상이 지나친 확신이다. 용의자를 의심하는 한편, 자기 자신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오만함이 진실을 왜곡한다. 

시즈카가과거에 저지른 오판결도 그랬다. 99.9퍼센트의 유죄율과 검찰 측이 제출한 물증을 과신해죄없는 사람에게 잘못된 판결을 내렸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자기자신의 처지를 저주한 피고인에게 얼마나 미안했던가.

"링거팩이 바꿔치기 되어서 그러시겠죠. 제게는 납득되지 않는 의문투성이입니다. 약제가 뒤바뀌는건 아주 큰 사고여서, 병원에서는 삼중 체크가 의무년입니다. 방금 설명했듯이 약국에서 체크, 담당 간호사가 체크, 그리고 환자 본인의 체크요."

시즈카는 마음속으로 탄식했다. 가능성을 넓히는것은 나쁘지 않지만 구루메는 전례 때문에 생긴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다. 선입견은 선글라스와 똑같다. 필터가 본래의 색채를 왜곡해 희미하게 반짝이는 빛을 망가뜨린다.

개구리 낯짝에 물붓기"라는 속담이 있는데, 겐타로를 당황시키려면 황산을 끼얹는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개구리 낯짝에 물붇기
어떤 자극에도 조금도 반응하지 않거나 어떤 일을 당해도 태연함을비유적으로 이르는 일본 속담.

그 말을 듣는 순간, 시즈카는 기분이 복잡해졌다.
과학수사가 진보하면 검거율도 올라가고, 물증의 증거능력도 비약적으로 올라갈 것이다. 하지만 좋은측면이 있으면 언제나 나쁜 측면도 있는 법이다. 각각의 증거능력이 올라감과 동시에 증거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짙어진다. 사람은 자신이 한번 옳다고 믿은 것을 다시 의심하기란 어렵다. 한순간의 실수로잘못된 증거물이 채택된 경우, 금세 원죄가 발생한다.

감식과 남자가 자신만만하게 내뱉은, 나날이 발전한다는 말도 어딘가 수상쩍다. 나날이 발전한다는말은 현재의 상식이 미래에는 시대에 뒤처질 가능성을 내포한다. 실제로 지금, 항간에서 높이 평가하는DNA 감정 등도 증거로 막 채택되기 시작할 즈음에는 정확도가 낮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 DNA감정이 결정적인 증거가 되어 유죄가 확정된 사건은전부 미심쩍다는 결론에 이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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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기로 한 이상 저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모두 사법고시를 통과한 인재들이죠. 엄격히 지도할 생각인데,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꼭 군기를 바싹 잡아 주세요."

요즘 같은 시대에 학생들의 군기를 잡아 달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옛날 사고방식이다. 분명 마시코의 사고는 시대착오적일 것이다. 법조계의 인식이 대중과 괴리되는 것은 이런 사고와 변하지 않는 체제 때문임은 쉽게 상상할 수있다. 낡은 가죽 부대에 새 술을 담는다는 비유까지는 아니지만, 낡은 교육체제이기 때문에 바로 자신 같은 노인들이 참신한 수업을 해야 한다.

사명감이 활활 타오르는 순간, 마시코에게서 예상 밖의 질문이 날아들어 왔다.
"고엔지 판사님. 최근 건강검진은 받으셨습니까?"
"아뇨."

"겐타로 씨가 즐거워하실 때는 대개 주변 사람한테 폐를 끼치고 계시거든요."
과연 온종일 겐타로를 보살피는 만큼, 미치코는 겐타로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시즈카는 저도 모르게 끄덕거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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