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三國史記)
현존하는 한국의 역사서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성립부터 고려 초기까지 약 천 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본기 28권, 지 9권, 표 3권, 열전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김부식이 집필한 원본은 남아 있지 않으며 필사본 중 일부는 보물 제722호, 국보 제322-1호와 제322-2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한(三韓)
삼국시대 이전 한반도 중남부지역에 형성되어 있었던 마한, 진한, 변한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편의상 셋으로 분류하지만 각각 수십 개의 소국으로 구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문헌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이들은 이후 각각 백제, 가야, 신라로 발전하면서 북쪽의 고구려와 함께 삼국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가야(加耶)
삼국시대 초중반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여러 국가를 가리키며, 삼한의 하나였던 변한에서 기원했다. 초기에는 지금의 김해에 터전을 잡은 금관가야가, 후기에는 고령의 대가야가 주도권을 잡았다고 알려져 있다. 가야의 역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와 겹치지만 사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아 심하게 왜곡된 적이 있다.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説)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에 있는 임나(가야 지역)에 통치 기구를 두고 백제와 신라를 간접 통치했다는 주장이다. 일본의 정사서 『일본서기』를 바탕으로 전개되면서 한일 역사학계에서 오랜 기간 논란이 되었다가, 가야 고분군의 발굴 등으로 유물들이 발견되면서 2010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폐기되었다. 고고학적 발굴로 역사 왜곡을 이겨낸 좋은 사례 중 하나이기도 하다.

고분(古墳)
일반적으로는 옛 무덤을 가리키나 고고학에서는 일정한 형식을 갖춘 한정된 시대의 지배층의 무덤을 말한다. 고분이 모인 것을 고분군이라고 하며, 매장된 각종 껴묻거리(부장품)의 발굴을 통해 과거의 시대상을 파악할 수 있다.

순장/후장(殉葬/厚葬)
후장은 큰 규모로 후하게 장례를 치르는 것을, 순장은 후장에서 더 나아가 다른 사람도 같이 묻는 것을 말한다. 두 가지 장례 풍습은 한국 고대의 장례 문화를 대표함과 동시에 고대 계급 사회의 시대상과 고대인들이 사후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 지를 보여준다.

수도유적(首都遺蹟)
국가의 중앙 정부가 자리 잡은 수도의 유적으로, 중앙인과 지방인의 차이가 컸던 고대 국가의 심장 역할을 했다. 이 책에서는 보통 왕성, 왕경, 도성 등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한다.

위례성(慰禮城)
백제 왕조의 수도유적으로, 기원전 18년 온조왕에서부터 475년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하기까지 492년간 백제의 왕성으로 전해진다. 풍납토성 발굴 전까지 다양한 견해가 난립했으나 1997년 풍납토성이 발굴되면서 지금은 풍납토성 혹은 몽촌토성이 하남 위례성이라는 설이 유력해졌다.

실크로드(Silk road)
비단길이라고도 하며, 중국과 유럽을 연결해 동서 간의 활발한 왕래를 이끌었던 무역로를 말한다. 경로에 따라 초원길, 오아시스와 사막길 등 다양한 종류가 있으며, 고대 한국이 이 길을 통해 동북아시아를 넘어 서아시아까지 교류했다는 자료들이 발굴되고 있다.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는 한국이란 틀 안에만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 역사학자는 민족사를넘어서 인류 공동의 역사 연구에 앞장서야 한다."

이제는 역사를 새롭게 바라봐야 할 때

고대사는 그 불확실성으로 인해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신화와 전설이 역사적인 사실과 뒤섞이면서 때로는 장대한 판타지 소설의 소재가 되기도 하고,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는 사극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그 누구도 객관적인 진실을 확신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수수께끼 풀듯 고대사의 수많은 주제에 도전한다. 특히 문헌 자료가 부족한 초기 고대사, 이른바 상고사는 전문 연구자만이 아니라 역사에 관심이 많은 일반 시민들이 수많은 설을 자유롭게 주장하는 백가쟁명의 장이기도 하다. 수십 년간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연구자나 종교적 신념에 사로잡힌 유튜버가등가로 취급받는 분야이기도 하다.

‘객관적 자료에 기초한 합리적 추론‘이라는 고대사 연구의 기본 원칙이 완전히 무시된 난폭한 주장이지만 민족주의 사관이라는 이름만으로 면죄부를 받고, 이러한 폭거에 대한 비판은 식민사학자의 커밍아웃으로 치부되는 것이 현실이다. 세계 학계에서 우스갯거리로 취급될 것이 분명한 주장들이 국내에서 열광적으로 갈채를 받는 현실이 분명 정상은 아니다. ‘민족주의‘라는 한마디로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다.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더욱 엄격한 논리가 요구된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학은 인문학임과 동시에 과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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