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관심이 많은 대중들의 사랑을 잃은 데에는 역사학자들의 책임도 크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특히 세 가지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폭증하는 새로운 자료를 제대로 정리하고 보급하지 못했다. 매년 지하에서 수만 점의 유물이 출토되면서 과거의 통설이 무너지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자료를 활용한 역사의 복원에 소홀한결과, 고대사 해석의 일등 사료인 고고학적 자료가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둘째, 역사하 고유의 방법이라는 도그마에 빠져 눈부시게 발전하는 자연과학과 공학, 통계학, 법의학 등 인접 학문의 방법론을 활용한 융복합적 연구에 소홀했다. 대형 고분이나 토성 축조의 과학적 원리를 설명할수 있는 역사가는 없다. 학제간 연구가 절실한 시점이다.

셋째, 한반도라는 좁은 공간만을 대상으로 연구와 교육을 전개했다. 그 탓에 한국 고대사회의 특징을 외국의 사례와 비교하여 세계사적 보편성과 한국적 특수성을 설명해내는 비교사적 시각이 크게 부족하다.

유물과유적,
삼국시대의 타임캡슐을 열다

한국 고대사학자는 이제 옛 서적만을 뒤적이며 책상에 앉아 고고하게 연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딛고 선 땅 위, 혹은 땅 아래 남겨진 흔적을 찾아다니며 보물을캐듯 유물과 유적을 찾아 나선다. 한계가 분명했던 우리 고대사 연구를 가능성의 영역으로 확장시킨 유적과 유물의 가치 그리고 융합연구의 필요성을 함께 살펴보자.

한국 고대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런 푸념을 접한 사람들은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 같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냐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실제 참고할  내용은 그렇게 많지 않다. 조금 과장하자면 아침 일찍일어나 맘먹고 읽기 시작하면 저녁 즈음 더는 넘겨볼 책장이 남지 않을 정도다. 게다가 『삼국사기』는 12세기, 『삼국유사』는 13세기에 쓰였으니 삼국이 형성되고 천 년이 더 지난 후에야 작성된 것이다. 그러니 각 책의 저자인 고려시대 유학자나 불교 승려의 역사 인식에 따라 상당 부분 잘려 나가고 왜곡되었을 터. 

두 사료 모두 삼국시대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금석문과 목간 자료를 통한 연구
다행히 불타거나 소실된 사료 외에 채 발견되지 않은 사료가 남아 있다. 우리가 두 발로 딛고 서는땅 위 혹은 아래에 말이다. 하나의 사료를 발굴할 때마다 학계는 극적인 순간을 맞이한다. 중진 원로들이 쓴 논문 수십 편이 와르르 무너지는 도미노처럼 힘을 잃을 정도로 정설을 뒤집는 사실들이드러나기 때문이다.

유물과 유적, 땅에서 나오는 빅데이터
땅에 누워 입을 벌리고 떨어지는 사과를 기다릴 수만은 없는 것처럼 가끔, 우연히 발견되는 금석문과 목간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다. 반면 땅속에서 발견되는 매장문화재, 즉 발굴되는 실물자료는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조금 힘들더라도 쏟아지는 고고학적 물질자료에 눈을 돌려 보석을 캐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토기, 기와, 철기, 목기 등이 쏟아져 나오는데 우리는 이것을 ‘남겨진 물건‘이라 해서 유물이라 부른다. 유물이 묻혀 있던 무덤이나 집 자리, 토기나 기와를 굽던 가마 같은 구조물들은 유구라 부르며, 유구와 유물이 묻혀 있는 공간은 유적이라 부른다.

현행법률상 유적을 발굴하면 2년 이내에 반드시 정식 보고서를 발간해야 하는데, 어떤 경우는 한 권으로도 충분하지만 어떤 경우는 유적 한군데를 조사한 후 기록한 내용이 보고서 10권 분량을 훌쩍 넘기는 경우도 있다. 매년 엄청나게 많은 자료가 쏟아지는 셈이다.

당시 한반도 남부에 살던 사람들은 금속기 문명을 기초로 쌀농사를 지으며 잉여 생산물을 거두는 문화를 영위했다. 한정된 농지와 물을 둘러싼 경쟁이 심해지면서 자연스럽게 갈등과 분쟁이 일어났고, 그것이 증폭되어 전쟁과 살인이 나타났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각종 방어시설을 설치한 방어취락은 당시 사회가 극도의 긴장 관계에 놓여 있었음을 증명하는 자료다. 쌀농사로 풍요를 누렸지만, 결코 평화롭지는 않았던 금속기 문화는 일본 북부 규슈를 기점으로 일본 열도 곳곳에 급속도로 번져나갔다.

정치사적으로 국가 형성 과정을 밝히려는 연구자에게도 고고학 자료는 좋은 재료다. 평화롭고 평등한 사회가 전쟁을 거치면서 어떻게 군사를 조직해 나갔는지 추적할 수 있다.

무덤이 말해주는 고대의 지배구조
한반도 청동기시대의 대표 유적인 고인돌을 통해서도 당시의 사회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먼저 밝혀둘 것이 있다. 고인돌의 원래 모습은 상석이라고 부르는 큰 돌 아래 사면을 돌로 감싼 폐쇄 형태다. 우리가 쉽게 접하는 만화나 교과서 속 고인돌 이미지는 대개 큰 돌(상석)을 두 개의 고임돌(지석)이 받치고 있는 형태인데, 이는 후대에 도굴꾼에 의해 양쪽 돌이 떨어져나간 후의 모습이다.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은 있는 자와 없는 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구분을 의미한다.

무덤에서 나오는 무기와 마구는 당시의 군사조직과 전쟁방식을 대변한다.

초대형 무덤들은 5세기 즈음 성행하더니 6세기에 이르러 점점 축소되고 유물부장량도 줄어들었다. ‘율령에의한 지배‘가 본격화되며 나타난 변화다.
결국 율령 지배 이전의 무덤은 사람의 등급을 매기며 지배구조를 표현하는 장치로활용되었던 것이다.

부산 동래구 복천동 고분군에서 처음 발견된 쇠로 만든 말 투구는 4세기 중엽 고구려 고분인 안악 3호분의 벽화를 떠올리게 한다. 기수만이 아니라 말까지 온통 갑옷과 투구로 무장하고 있는 그림으로, 중장기병을 표현한것이며 비유하자면 현대의 탱크부대와 같다. 긴 창을 들고 말의 돌파력으로 적진을 붕괴시킨 후 보병들이 들이닥쳐 뒷마무리하는 탱크부대의 전술로 동북아시아 최강자로 우뚝 선 이가 바로 광개토대왕이다.

대성동 이외에도 한반도 남해안에서는 일본에서 제작했거나 일본의 영향을 받은 왜계 토기가 종종 출토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자료를 가지고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학자는 없다. 가야와 백제, 신라 등 한반도의 주민들이 일본 열도에 건너가 남긴 유물의 양에 비하면 왜인들이 한반도에남긴 유물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 열도 곳곳에서 한반도 주민들이 무리를 이루어 건너간 흔적이 엄청나게 많이 발견되었고 그후 문명이 발전하는 양상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밥그릇까지 규제한 율령의 고고학
삼국시대의 법령, 즉 율령에 표현된 다양한 물질문화의 양상을 밝히는 것을 ‘율령의 고고학‘이라부른다. 이와 관련해 사비기라 불리는 6세기 전반부터 7세기 후반 백제의 무덤에 적용된 율령의 고고학을 살펴보자.

당시 사용한 시루의 모습은 충청,전라, 경상지역의 것과 비슷하다. 한반도 남부 주민들이 규슈 북부에 이주, 정착하면서 식문화를 이어간 것이다.

5세기에 접어들자 규슈 북부를 넘어 나라, 오사카,
교토, 시가 등지에서도 시루를 사용하는 가구 수가 엄청나게 증가했는데, 그 형태가 규슈의 경우와같이 충청도나 전라도 지역의 것을 쏙 빼닮았다. 이는 백제계 주민들이 일본 열도의 심장부로 대거이주, 정착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나라의 난고유적은 한반도 주민들이 대거 이주해 일본 사회의 문명화에 크게 공헌한 사실을 입증하는 대표 사례다. 이 유적을 발굴한 일본의 고고학자들은 한반도 이주민들이 철기와 구슬을 만들고, 말을 키우는 문화를 영위하며 일본 사회의 문명화에 크게 공헌했음을 밝혔다. 

고대 사회에서 말은 군사력과 정보력, 물류의 수단이었고 고기와 가죽으로 부를 축적하는 재산이었다.

비명횡사한 부왕을 기리는 부여의 능사, 먼저 죽은 아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왕흥사 역시 발굴조사 결과 전모가 드러난 유적이다.

한편 익산 미륵사가 무왕과 신라 출신 선화공주의 협력으로조성되었다고 우리에게 말해준 문헌은 13세기에 쓰여진 『삼국유사』인데, 미륵사지 서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사리봉안기가 발견되면서 800년 통설이 무너졌다. 문헌에는 보이지 않던 사택씨 왕후가 등장했고 무왕의 왕비가 누구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시작됐다. 결국 미륵사를 창건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까지 논쟁이 이어졌는데, 결과적으로 무왕의 왕비가 여러 명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이제는 익산 쌍릉에 묻혀 있는 인물이 누구인지를 밝히려는 발굴조사가 이어지면서 7세기전반의 백제사를 새로 써야 할 정도로 통설을 뒤엎는 사실이 속속 발견되고 있다. 이처럼 땅에서새롭게 출토되는 자료에 의해 기존 정설은 붕괴되며 새로운 연구 과제가 지속적으로 창출되고 있다.

역사학자의 연구는 역동적이어야 한다
1부의 결론은 고대사를 연구하는 사학자의 엉덩이가 더 가벼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정된 문헌자료만 가지고 연구실에 틀어박혀 씨름하던 시대는 지났다. 국내는 물론이고 국외 답사가 필수인 시대다.

이때 개로왕이 감행한 대규모 토목공사를 『삼국사기』는 증토축성土築城이라 부른다. 그러데 그 표현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았으니, 수수께끼 같은 의문을 풀겠다며 많은 역사학자들이 달려들었다.
‘증토‘란 ‘흙을 찌다‘란 의미인데, 흙을 단단하게 다진 것이라고 보거나 많은 흙을 모았다는 식으로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명확한 답을 얻었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해답은 바로 옆 나라중국의 섬서성 유림 지역의 통만성에 있었다. 중국 역사서인 『진서」에서 대하라는 나라를 세운흉노족 출신의 혁련발발이 ‘만 가지 오랑캐를 통일했다‘는 의미의 통만성을 쌓는 정황을 설명할 때증토축성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중국 학자들이 통만성을 발굴조사해 성을 쌓은 재료를 분석하니 황토와 석회가 사용되었음이 밝혀졌다. 황토와 석회에 물을 섞으면 화학반응이 일어나 많은수증기가 발생하는데, 고대인들은 이 현상을 보고 흙을 찌다, 즉 증토라고 표현한 것이다. 결국 백제도 토목, 건축 공사에 석회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커졌다. 이 사례는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는 연구자가 한국이란 틀 안에만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앞으로 역사학자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같은 역할을 맡아야 한다. 고고학자가 발굴한 유물을 가지고 화학자와 함께 분석하기도 하고, 토목공학자와 함께 공학적 원리를 규명하는 식으로 새로운연구 방법론을 개발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역사 연구는 퇴보할 수밖에 없다.

사학자라면 과거의 해석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역사는 그런 질문과 대답으로 시작되고 이어지며 미래로 나아간다.

무덤과 인골,
고대인이 말을 걸다.

긴 시간 동안 과거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해온 무덤과 인골은 미처 알지 못했던우리 역사를 밝히는 길잡이가 된다. 그렇지만 인골이 중요한 연구 자료로 인정받기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 고고학과 고대사 연구에서 인골은 어떤 방식으로 다뤄졌을까. 인골 연구의 궤적을 살피며 죽음이 아닌 삶을말하는 생생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땅속에서 복원한 인류의 자서전

고고학 연구의 블루오션, 인골
무덤은 오래전부터 고고학적 자료이자 유구로 중요하게 다뤄졌지만, 인골의 경우는 좀 달랐다. 간혹 인골 자체나 그 흔적이 출토되었다 하더라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이를 고고학적 자료로 인식하는 자세도 부족했다. 인골이 고대사 연구의 일 등급 자료라는 것을 깨달은 것도 최근의 일이다.

인골의 체계적인 수습, 정리에서부터 사망 원인이나 생시에 앓던 질병, 습관, 영양 상태 등을 밝히기 위해서는 여러 분야 전문가들의 협업이 필요하다. 발굴조사 기술이 향상되고 체질인류학이나법의학 등 유관 분야 전문가들과의 융복합적인 협동 연구가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하였으니 과거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영역과 깊이로 연구의 범위가 확장될 것이라 믿는다. 이제부터는 소중한고고학적 자료로서 인골이 우리에게 전해준 이야기들을 살펴보자.

사망할 때 이나이가 모두 제각각이기 때문에 매장의 과정을 상세하게 고려하지 않고서 가족 관계를 추정하는것은 옳지 않다. 이후 고고학적 발굴조사에 법의학자와 형질인류학자가 참여하면서 기존 연구에서빚어졌던 오류가 대거 수정되었다.

심지어 경상도 내륙지방에서도 외이도골종에 걸린 여성 인골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해안가의해녀가 내륙으로 시집을 갔다는 조금 과감한(?) 추정도 가능하게 한다.

경산 임당동 고분군은 진한에서 신라에 걸쳐 장기간 만들어진 무덤들인데, 발굴 결과 유례가 없을정도로 많은 인골이 출토되었다. 현재 발견된 인골 대부분은 영남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200여 개체의 인골 중에서 편두를 한 두개골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진한과변한은 물론 신라와 가야에서도 편두를 실시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고구려 벽화 고분 중에 개마총이란 무덤이 있는데, 여기 금동관을 쓰고 있는 무덤의 주인공역시 편두로 표현되어 있다. 삼국시대에 편두는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광범위하게 시행되던 풍습이었을까.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한국만이 아니라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태평양, 중남미 등편두를 시행했던 지역을 대상으로 삼아 비교 연구할 필요가 있다. 역사학자만이 아니라 고고학자,인류학자, 민속학자, 법의학자 등 여러 분야의 협업 없이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다.

먼저 와 있던 조몬인과 뒤늦게 들어온 야요이인이 섞이면서 현재의 일본인의 얼굴 생김새를 갖췄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이런 설을 뒷받침해준 것이 야마구치현 도이가하마#유적이다. 동해를 바라보며 해안가에 직교하는 방향으로 형성된 사구 위에서 수많은 야요이시대 무덤이 발견됐고 이후 상태가 양호한 인골을 300 개체 이상 발굴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됐다. 가슴에 가마우지를 안고 매장된 무당 여인, 상반신에 15발 이상 화살촉을 맞고 사망한 영웅적인 인물 등의 유골로 유명세를 탔지만, 가장 중요한발견은 이들의 형질적인 특징이 선주민인 조몬인과 달랐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렇게 단순한 기준으로 인종을 나눌 수는 없다. 수천 년 간 서로 다른 인종 간 혈통이 섞였기에 전형적인 조몬인과 야요이인의 얼굴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주나 원거리 혼인이 활발하지 않았던 일본 역사의 특징 때문인지 몰라도 일본의 거리를 걷다 보면불시에 과거의 조몬인이나 야요이인을 마주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수많은 유물이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거나, ‘태왕릉‘이란 글자가 떡하니 새겨진 전돌이 발견되어도 주인공을 쉽게 확정할 수 없는 신라와 고구려 왕릉에 비해,
변변한 유물도 발견되지 않았던 쌍릉대왕묘의 주인공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인골 덕분이다.

한편 북한 학계는 발견된 인골을 과학적 방법으로 측정한 결과 5011년 전에 탄생한 사실이 밝혀져서 기원전 3000년 이전에 단군이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기원전 2333 년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는『삼국유사』 기사보다 단군 조선의 실제 건국 연대가 훨씬 이전이라는 주장인 셈이다. 무덤의 구조와 금동관이 고구려식인 것은 훗날 고구려인들이 단군릉을 개축하고 금동관을 넣은 결과라고 강변했다. 기원전 30세기 이전에 고대 국가가 발생했다는 주장은 세계사의 상식을 뒤엎는 것인데, 북한학계는 이러한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거듭 무리수를 두고 있다.

결과적으로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대동강 문명이 세계 4대 문명보다 더 오래되고 우수하다는 주장, 나아가 인류의 기원지가 아프리카 동남부가 아니라 평양이라는  기상천외한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나가도 너무 나간 북한 학계의연구 성과는 과학과는 동떨어진 처지에 빠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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