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의 힘 - 능청 백단들의 감칠맛 나는 인생 이야기
남덕현 지음 / 양철북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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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3] 내 기억 속의 아버지 2...
― 소나기로 보지 못한 야구, 담을 넘으신 아부지

1982년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프로야구가 처음 시작된 해였고, 나는 국민학교 2학년이었다. 아부지와 형, 나 이렇게 셋이 대전에 사시는 큰고모님 댁에 갔다. 당시 큰고모님은 자양동에 살고 계셨다.

큰고모님 댁에는 삼 남매가 있었다. 맏이인 누나는 나보다 나이가 제법 많았다. 훗날 가수 신승훈과 같은 대학 같은 학과를 다녔다고 들었는데, 동창이었는지 선후배 사이였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 아래로 우리 형보다 한 살 많은 형과, 나보다 한 살 어린 여동생이 있었다.

그날 나와 형은 큰고모님 댁의 형을 따라 한밭야구장으로 갔다. 아부지는 야구장에는 함께 가지 않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대전과 충청도를 연고로 한 프로야구팀은 OB 베어스였다. 프로야구가 처음 출범했을 때 충청도 사람들에게 OB 베어스는 분명 우리 지역의 팀이었고, 그해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차지한 원년 챔피언이었다.

그렇게 충청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원년 우승까지 해 놓고, 나중에는 배신 때리고 서울로 튀었다.

OB가 떠난 자리는 뒤에 빙그레 이글스가 채웠다. 장종훈·이정훈·이강돈 선수를 앞세운 강력한 타선은 ‘다이너마이트 타선’이라 불렸고, 빙그레 이글스는 훗날 지금의 한화 이글스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밭야구장 안으로 들어서자 관중석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야, 사람 참 많네.”

어린 나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한곳에 모여 있는 모습부터 신기했다. 프로야구가 막 시작된 때라 사람들의 관심도 대단했다. 당시 대통령은 전두환이었고, 이른바 3S 정책 가운데 하나가 스포츠였다는 것은 훗날 알게 된 일이다. 어찌 됐든 그 시절 프로야구의 열기는 대단했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선수들은 그라운드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신경식 선수와 김우열 선수 같은 당시의 쟁쟁한 선수들이 바로 눈앞에서 움직였다. 특히 신경식 선수가 1루에서 다리를 일자로 쫙 벌리며 공을 받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해야 공을 0.01초라도 더 빨리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도 난다.

마운드 쪽에서는 박철순 선수가 피칭 연습을 하고 있었다.

당시 어린 내 눈에 박철순 선수는 그야말로 투수의 제왕이었다. 그가 너클볼로 이름난 투수라는 이야기도 그 무렵 귀동냥으로 들었다. 구종을 알아볼 나이는 아니었지만, 당대 최고의 투수가 눈앞에서 공을 던지는 모습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아직 경기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야구장은 벌써 흥분의 도가니였다. 나 역시 곧 눈앞에서 펼쳐질 첫 프로야구 경기를 생각하며 잔뜩 들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금세 지나갈 소나기인 줄 알았다. 잠시만 기다리면 비가 그치고 경기가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는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야구장을 흠뻑 적실 만큼 계속 퍼부었다.

결국 경기는 우천으로 취소되었다.

그토록 기대했던 나의 첫 프로야구 관람은 선수들이 몸을 푸는 모습만 바라본 채 끝나고 말았다. 야구장 안까지 들어갔지만 정작 경기는 한 이닝도 보지 못했다.

그날 이후 나는 지금까지 야구장에서 프로야구 경기를 아예 본 적이 없다.

훗날 나는 한밭야구장에서 걸어서 삼십 분 남짓 떨어진 문화동에서 약 13년을 살았다. 한밭야구장 주변은 자주 걷던 산책길이 되었고, 밤에 보문산을 오르다 보훈대 쪽에서 내려다보면 야간경기의 불빛도 보였다.

그렇다고 야구를 본 것은 아니었다.

산길을 걷다가 멀리 불이 켜진 야구장을 바라보며,

“어, 저놈들 야구허고 있구먼.”

하고 지나치는 정도였다.

어린 시절 그렇게 보고 싶었던 야구장이 가까이에 있었는데도, 나는 끝내 관중석에 들어가 경기를 보지 않았다. 어쩌면 내게 한밭야구장은 처음부터 야구를 보는 곳이라기보다, 갑자기 퍼붓던 소나기와 함께 기억되는 곳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의 이야기는 야구장에서 끝나지 않았다.

밤이 되어 우리끼리 큰고모님 댁에 있을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 대문을 쾅쾅 두드리며 문을 열라고 했다.

큰고모님 댁의 형이 문밖을 향해 물었다.

“누구세요?”

그러자 밖에서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니 삼촌이다. 언능 문 열어.”

형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저는 삼촌이 없는데요.”

문밖의 사람은 다시 대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뭐여? 나 니 삼촌여. 언능 문 열어.”

그러나 형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 저는 삼촌이 없다니까요.”

나와 형은 그 목소리가 누구인 지 알아듣지 못했다. 밤이라 모두 긴장했고, 대문 밖에서 낯선 남자가 계속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아 무섭기도 했던 모양이다.

대문을 사이에 두고 같은 말이 몇 번이나 오갔다. 문밖의 사람은 계속 자신이 삼촌이라고 했고, 문 안의 우리는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문밖의 사람은 한참 동안 대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아무리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한 그 사람은 담을 타고 올라왔다.

그리고 담 위에 걸터앉았다.

그제야 우리는 담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우리 아부지였다.

큰고모님 댁의 형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고모부에게는 남자 형제가 없어서 그 형에게 친삼촌은 정말 없었다. 형은 ‘삼촌’이라고 하면 아버지의 남자 형제만 떠올렸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아부지는 큰고모님의 오빠였다. 그 형에게 우리 아부지는 분명 외삼촌이었다. 아부지는 외삼촌인 자신도 당연히 삼촌이라고 생각하셨다.

두 사람의 말은 모두 맞았다.

다만 서로 말하는 삼촌이 달랐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부터 나는 장면이다.

“나 니 삼촌여.”

“저는 삼촌이 없는데요.”

대문을 계속 두드려도 조카가 끝내 문을 열어 주지 않자, 결국 월담을 감행해 담 위에 걸터앉아 계시던 아부지. 병들어 누워 계시던 아부지와는 전혀 다른, 당당하고도 유쾌한 모습이었다.

그날 대문 안에서 끝까지 “저는 삼촌이 없는데요”라고 버티던 고모네 형은 훗날 학창 시절 오토바이 사고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이듬해 여름이 오기 전인 봄에 아부지도 세상을 떠나셨다.

그래서 소나기로 야구를 보지 못한 그날이, 아부지와 함께했던 마지막 여름이 되었다.

나는 그날 한 이닝의 야구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도 야구보다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어두운 밤, 닫힌 대문을 두드리다 끝내 담 위에 걸터앉아 계시던 아부지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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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의 어머니
김용택 지음, 황헌만 사진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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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2] 내 기억 속의 아버지...

나는 늘 지갑 속에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을 넣고 다닌다.

아부지 사진이다.

사진 속 아부지는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채, 늘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 상반신만 담긴 작은 사진이다.

아부지는 1983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때 나는 열 살이었다. 함께 지낸 날들을 떠올리면 서로 이어지지 않는 몇 장면만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나는 기억보다 사진 속에서 아부지를 더 자주 만난다.

가장 오래된 기억 가운데 하나는 국민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크레파스를 사 달라고 아부지에게 졸랐다가 작대기로 맞았다. 왜 그렇게까지 졸랐는지, 아부지가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크레파스를 갖고 싶었던 마음과 맞아서 서러웠던 기억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

그것이 아부지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이라는 사실이 조금은 서글프다.

하지만 따뜻한 기억도 하나 있다.

아부지와 함께 웅천 시내의 백마루라는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었던 날이다.

어디를 다녀오던 길이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백마루는 훗날 유명 개그맨이 된 이의 집안에서 운영하던 중국집으로, 웅천에서는 짜장면이 맛있기로 이름난 곳이었다.

어린 내게도 그 집 짜장면은 기막히게 맛있었다. 아부지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 아부지와 마주 앉아 짜장면을 먹었던 모습은 희미하게나마 떠오른다.

백마루는 훗날 사라졌다. 그래도 그날 아부지와 함께 먹었던 짜장면 한 그릇만은 잊히지 않는다.

기억을 더듬어 가다 보면 농사꾼으로 살아가던 아부지의 모습도 하나씩 떠오른다.

아부지는 농사꾼이셨다. 우리 집 논 가운데에는 바닥이 깊고 질어 농기계가 들어가지 못하는 수렁논이 있었다. 그 논만큼은 늘 소가 들어가 갈아야 했다. 아부지는 함께 농사를 짓던 그 소를 무척 아끼셨다.

어느 날 아부지가 소를 팔고 돌아와 우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왜 소를 팔게 되었는지, 어디에 팔았는지, 얼마를 받았는지는 모른다. 다만 오랫동안 함께 농사를 지은 소를 떠나보내고 눈물을 흘리시던 아부지의 모습은 지금도 남아 있다.

아부지에게 그 소는 값을 받고 넘기는 가축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농기계도 들어가지 못하는 수렁논에 함께 들어가 한 해 농사를 지어 온 일꾼이었고, 어쩌면 한 식구와도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밭에 거름을 뿌리던 모습도 떠오른다.

그 시절에는 집에서 나온 인분도 그냥 버리지 않았다. 똥차에 퍼 담아 밭으로 가져가 거름으로 썼다. 지금 생각하면 냄새부터 견디기 어려웠을 텐데, 당시 농촌에서는 농사를 짓는 데 꼭 필요한 귀한 거름이었다.

아부지는 그 인분을 밭에 뿌리셨다. 소를 부려 수렁논을 갈고, 인분을 거름 삼아 밭을 일구며 한 해 농사를 준비하셨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농사꾼 아부지의 모습이다.

농사일이 없는 날이라고 아부지의 손이 쉬는 것은 아니었다.

그 시절에는 마을 상수도를 놓거나 마을길을 콘크리트로 포장하는 일도 동네 사람들이 함께했다. 지금처럼 공사업체가 장비와 사람을 데리고 와서 모두 해 주던 때가 아니었다. 마을에 필요한 일이 생기면 주민들이 직접 나서서 땅을 파고, 자재를 나르고, 콘크리트를 쳤다.

아부지도 성동리 사람들과 어울려 그런 일을 하셨다. 농사를 짓고 집안을 돌보며, 마을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길과 시설을 함께 만들어 가던 시절이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아부지가 몹시 우셨던 기억도 있다.

어린 나는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아부지가 왜 그렇게 슬피 우시는지도 몰랐다. 그날 어디에서 소식을 들으셨는지, 주위에 누가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아부지가 많이 우셨다는 것만은 기억한다.

소를 팔고 돌아오신 날에도 우셨고, 박정희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우셨다. 아부지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아부지의 눈물은 두 장면이나 남아 있다.

내 기억에 남은 장면보다 사진 속에 남아 있는 아부지의 모습이 더 많다.

추석 무렵, 주산에 있는 할아버지 산소에 성묘하러 갔다가 찍은 사진이 있다.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 가을 들길에서 아부지와 형, 사촌이 함께 서 있다.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담은 사진도 있고, 아부지 형제분들과 자식들이 한자리에 모여 찍은 가족사진도 있다.

아부지는 일곱 남매의 맏이였다.

아부지 아래로 큰고모와 작은아버지들, 둘째고모, 막내아버지와 막내고모가 있었다. 그 가족사진에는 나도 있고, 아직 아기였던 여동생도 있다. 막내동생은 아직 태어나기 전이라 사진에 없다. 분명 나도 함께 있었던 날이지만, 그날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사진 속에는 한 집안의 맏이였던 아부지와 형제분들, 그리고 그 자식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이제는 그 사진 속 사람들 가운데 여러 분이 세상을 떠나셨다.

지금 아부지 형제분 가운데 살아 계신 분은 큰고모와 둘째 작은아버지, 막내아버지 세 분뿐이다. 할머니마저 돌아가신 지도 이제 얼추 스무 해가 되어 간다.

아부지가 포병으로 군 복무를 했다는 것도 사진으로 남아 있다.

사진에는 ‘장하다 우리의 포병’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군복을 입은 젊은 아부지는 내가 어렴풋이 기억하는 병든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젊고 건강했던 한 사람의 시간이 그 사진 속에 멈춰 있다.

향토예비군복을 입고 동네 친구분들과 학고방에서 찍은 사진도 있다. 아부지는 농사꾼이었고, 군 복무를 마친 예비군이었으며, 성동리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던 한 집안의 가장이었다.

형과 아부지가 커다란 비행기 바퀴 앞에서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

김포공항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사진 속에는 아부지와 형이 나란히 서 있고, 곁에는 사람보다 훨씬 커 보이는 비행기 바퀴가 있었다.

어린 나는 그 사진을 보면서 형이 엄청나게 부러웠다. 왜 형만 아부지와 그곳에 갔는지, 나는 왜 함께하지 못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아부지 곁에 서 있는 형과 커다란 비행기 바퀴가 그렇게 부러웠다.

이제 와 생각하면 비행기를 가까이에서 보지 못한 것보다 아부지와 함께 그 자리에 있지 못했다는 것이 더 아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아부지가 병들고 나서는 부모님이 함께 기도원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그 모습은 내가 직접 기억하는 장면이라기보다 사진 속에 남아 있는 기억이다. 사진 속 어머니의 품에는 아직 젖먹이였던 막내동생이 안겨 있었다. 병든 남편과 함께 길을 나서면서도 어린아이를 품에서 내려놓을 수 없었던 어머니의 모습이 그 사진에 남아 있다.

그 무렵 우리 가족에게는 아부지의 병을 고칠 만한 마땅한 방도가 없었다. 부모님은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고 싶으셨을 것이다.

집에서 굿을 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어머니는 아부지를 살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붙잡고 싶으셨을 것이다. 남편을 살리고 어린 네 남매의 아버지를 지켜 내고 싶은 마음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부지는 끝내 병을 이겨 내지 못하셨다.

돌아가시던 날, 아부지는 사랑방에서 계속 토하셨다. 곁에서 어머니는 “혼자서 어떻게 새끼들과 살라고 먼저 가느냐”며 통곡하셨다.

내가 또렷하게 기억하는 아부지의 마지막 모습은 그것이다.

그때 나는 그날이 무엇을 뜻하는지 온전히 알지 못했다. 아부지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는 것도, 그날 이후 어머니와 할머니가 어린 네 남매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다만 사랑방에서 고통스러워하시던 아부지와, 무너져 내리듯 통곡하시던 어머니의 모습만 어린 마음속에 깊이 남았다.

둘째 작은아버지도 지금으로부터 스물여섯 해 전 위암에 걸리셨다. 그러나 다행히 치료를 받으셨고, 지금까지 우리 곁에 살아 계신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문득 아부지를 생각한다.

아부지도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시절에 아프셨더라면 어땠을까. 아부지도 병을 이겨 내고 지금까지 우리 곁에 계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론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아들인 나는 자꾸만 그런 생각을 한다.

사진을 오래 바라본다고 잊힌 시간이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나는 가끔 지갑 속 사진을 꺼내 아부지를 오래 바라본다.

사진 속 아부지는 오늘도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채,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

함께한 기억이 너무 적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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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의 어머니
김용택 지음, 황헌만 사진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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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1] 새벽을 여는 어머니의 발길
― 웅천 성동리에서 자란 네 남매의 이야기

내가 열 살이던 무렵, 아버지는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형은 열두 살, 나는 열 살, 여동생은 여섯 살, 남동생은 네 살이었다. 아버지가 떠난 뒤 우리 집에는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어린 네 남매가 남았다.

그때는 몰랐다.

우리 집을 지탱하는 것이 할머니와 어머니의 손이고, 남들보다 먼저 시작되는 어머니의 새벽이라는 것을.

겨울이 오면 집 안 풍경부터 달라졌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겨우내 총올치를 했다. 두 분의 손에서 길게 이어진 총올치는 팔자 모양으로 한 꾸리씩 만들어져 바구니에 담겼다. 그렇게 바구니를 채운 총올치는 장날을 기다렸다.

웅천장은 2일과 7일에 섰다. 장날은 구경을 가는 날이 아니라, 겨우내 손으로 만든 총올치를 내다 팔아 얼마간의 돈으로 바꾸는 날이었다.

총올치보다 값이 더 나가는 것은 모시였다.

할머니는 서천장에서 모시를 만들 재료를 떼어 오셨다. 그것을 물에 불리고 말리며 손질한 뒤, 가느다란 올을 무릎에 대고 손바닥으로 비벼 하나씩 이어 붙이셨다. 얼마나 오랫동안 같은 자리를 비볐는지 무릎에서 피가 나기도 했다.

어린 나는 할머니 무릎에서 피가 나는 것을 보면서도, 왜 그 일을 멈출 수 없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할머니와 어머니는 겨울이면 으레 총올치와 모시를 잇는 분들인 줄만 알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할머니와 함께 어린 네 남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겨울이면 총올치와 모시를 이어 장에 내다 팔았지만, 그것만으로 살림을 꾸리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어머니는 웅천천 가까이에 있는 석재공장에 다니셨다. 공장에서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어머니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집에는 할머니와 어린 네 남매가 있었고, 어머니가 감당해야 할 살림은 늘 남아 있었다.

겨울 새벽이면 가장 먼저 일어나는 사람도 어머니였다.

안방에는 연탄보일러가 있었다. 아직 날도 밝기 전, 어머니는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가 연탄을 갈았다. 밤사이 연탄불이 약해지거나 꺼지면 방이 식었기 때문이다. 새 연탄으로 갈아 넣고 불이 제대로 이어지는 것을 살핀 뒤에야 어머니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사랑방은 안방과 달랐다.

사랑방 아궁이에는 추수를 마치고 남은 왕겨를 넣어 불을 땠다. 왕겨는 그냥 넣어 둔다고 잘 타지 않았다. 손으로 풍로를 돌려 아궁이 안으로 바람을 불어 넣어야 했다. 풍로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바람을 먹은 왕겨가 서서히 타오르고, 그 열이 구들을 따라 사랑방을 덥혔다.

풍로 돌아가는 소리와 왕겨 타는 냄새는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겨울이 지나고 날이 풀리면 어머니는 또 다른 새벽을 맞았다.

우리 동네에서는 다슬기를 고동이라고 불렀다. 어머니는 새벽이 채 밝기 전에 카바이드등을 들고 웅천천으로 나가셨다. 카바이드에 물을 부어 불을 밝히는 등이었다. 손전등도 귀하던 시절, 어머니는 그 불빛에 의지해 어두운 물속을 살피며 고동을 잡으셨다.

웅천천에는 봇담, 배챙이, 삽재처럼 고동이 잘 잡히는 곳이 따로 있었다. 좋은 자리를 차지해야 많이 잡을 수 있었고, 그 자리에는 말없는 텃세도 있었다. 먹고살기 위해 나간 새벽 물가에도 먼저 자리를 잡으려는 경쟁이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잡아 온 고동을 모두 내다 판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집에서 삶아 먹었다. 고동을 삶으면 푸르스름한 국물이 우러났다. 무엇을 넣었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소금을 넣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다만 그 국물에 밥을 말아 먹으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우리 네 남매는 탱자나무 가시로 고동 살을 하나씩 빼먹었다. 어머니가 새벽 웅천천에서 잡아 온 고동 한 그릇은 우리 네 남매의 든든한 한 끼가 되었다.

나도 자라면서 집안일의 한몫을 맡았다.

중학생이 된 뒤에는 겨울이면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러 다녔다. 집에서 불을 때려면 땔감이 있어야 했고, 누군가는 산에 올라 나무를 해 와야 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경운기를 몰고 나무를 하러 다녔다. 중학생 때는 지게에 지고 오던 나무를, 고등학생이 된 뒤에는 경운기에 싣고 왔다. 그렇게 해 온 나무는 우리 집이 겨울을 나는 땔감이 되었다.

그때는 그것을 특별한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 집에 필요한 일이었고, 내가 해야 할 몫이라고 여겼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저마다의 일을 하셨듯, 나도 자라면서 내 몫을 조금씩 맡아 갔을 뿐이었다.

세월이 흘러, 어린 네 남매를 키우고 가르치기 위해 애쓰신 할머니와 어머니 덕택에 형도, 나도, 여동생도, 남동생도 모두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

어린 시절에는 알지 못했다.

총올치 한 올과 모시 한 가닥, 새벽마다 갈아 넣던 연탄 한 장, 풍로를 돌려 살려 낸 왕겨불, 카바이드등에 의지해 잡아 온 고동 한 줌이 우리 네 남매를 키우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 네 남매의 졸업장에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다. 그러나 그 졸업장마다 총올치와 모시를 잇던 두 분의 손길과, 우리를 키우고 가르치기 위해 애쓰신 두 분의 삶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내 기억 속 성동리에는 지금도 총올치를 잇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손과, 고단한 삶을 짊어지고 새벽 배챙이로 걸어가시던 어머니의 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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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관의 살인 ㅣ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권일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독서감상보고]

<미궁 속 공간 트릭과 액자소설이 빚어낸 추리의 명암>

『미로관의 살인』은 건축가 나카무라 세이지가 설계한 미로관을 무대로 한 관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다. 건물 중앙의 복잡한 미궁과 유사한 형태의 객실, 문 앞의 짐승 가면을 사건의 핵심 장치로 활용하였으며, 미노스와 테세우스, 아리아드네, 파시파에 등 그리스 신화의 이름을 주요 공간과 객실에 부여하였다. 미로관은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배경에 머물지 않고 등장인물의 이동과 판단을 교란하는 거대한 범행 장치로 기능한다.

처음에는 미야가키 요타로가 죽음을 가장한 뒤 비밀통로를 이용하여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관 시리즈의 특성상 숨겨진 공간이나 비밀장치가 있을 것이라는 점은 예상하였지만, 이는 관 시리즈를 읽은 독자라면 쉽게 떠올릴 만한 추리이기도 하였다. 이노는 참가자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사러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으나,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의심받도록 배치된 인물이어서 처음부터 범인으로 보지 않았다. 스자키, 기요무라, 하야시, 후나오카가 차례로 살해되면서 자연스럽게 후보에서 제외되었고, 시마다까지 제외하면 게이코, 우타야마, 사메지마 정도가 남았다. 그러나 작중소설의 해결편에서 미야가키가 범인으로 제시되자 그 동기가 부자연스럽다고 느끼면서도 일단 사건이 끝난 것으로 받아들였다. 작품이 액자소설이라는 사실을 끝까지 경계하지 못한 것이 나의 가장 큰 판단 착오였다.

이 작품에서 가장 뛰어난 부분은 기요무라 사건의 공간 트릭이었다. 복잡하게 꺾이는 복도와 유사한 객실 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이동 경로보다 문 앞의 짐승 가면을 객실을 식별하는 기준으로 삼는다. 범인은 이 표식을 바꾸어 기요무라가 다른 방을 자신의 객실로 착각하게 하였고, 미리 설치한 독극물 장치로 살인을 완성하였다. 방 자체를 옮긴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익숙한 표식을 신뢰하는 습관을 이용하여 공간 인식만 바꾼 발상이 인상적이었다. 미로관이라는 건축물이 범행을 가능하게 하는 물리적 조건이자 사람의 행동을 유도하는 장치로 사용된 사건이었다.

반면 최종 범인인 사메지마를 독자가 논리적으로 특정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았다. 사메지마가 남성이라고 직접 쓰이지는 않았지만, 이름과 말투, 행동 묘사 등은 자연스럽게 남성으로 받아들이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첫 번째 사건 현장의 의문의 혈흔과 사건 뒤 늦게 나타나는 모습 등은 결말 이후에는 복선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이를 근거로 사메지마를 진범으로 지목하기에는 부족하였다. 미야가키와의 과거 관계와 범행 동기 역시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제시되었다. 액자소설의 구조를 놓친 것은 독자인 나의 실수이지만, 액자 밖에 또 다른 진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과 사메지마를 범인으로 특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결말 이후에야 의미가 완성되는 후행형 단서가 많았다는 점에서 본격추리의 페어플레이 정신은 심각하게 훼손된 것으로 느껴졌다.

개별 범행의 물리적 개연성에도 아쉬움이 있었다. 하야시 사건은 사메지마가 성인 남성의 등 뒤에서 칼을 찔러 살해한 것으로 설명되지만, 피해자가 별다른 몸싸움이나 저항 없이 치명상을 입게 된 과정은 충분히 제시되지 않았다. 하야시가 이후 워드프로세서에 다잉메시지를 남길 정도의 시간과 의식이 있었다면 범인을 막거나 탈출하려 한 흔적도 어느 정도 남았어야 자연스럽다. 기습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사메지마가 하야시를 단독으로 제압하고 범행을 마무리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여 작품의 옥에 티로 남았다.

『미로관의 살인』은 미로관의 구조와 짐승 가면을 이용한 공간 트릭, 그리스 신화의 상징, 액자소설의 내용 반전을 결합한 복잡하고 독창적인 작품이다. 특히 건축 공간을 살인수법과 직접 연결한 구성은 관 시리즈 가운데서도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최종 범인을 추론할 핵심 정보가 충분히 제공되지 않았고 일부 범행의 현실성에도 아쉬움이 남았다. 미궁은 정교했고 액자소설의 반전은 강렬했지만, 그 놀라움이 곧 공정한 추리를 의미하지는 않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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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순간의
기억들 - P-1

국수 한 그릇 먹다 보면 말없이 앞서 걷던 무뚝뚝한 아버지가 떠오르고,
신발 한 켤레 고르다 보면 내 손을 잡고 물건값 흥정하던 어머니가 생각나는 그곳.
장날만 되면 온 세상이 거기에 다 있었다. - P-1

순창 동계장의 한 할아버지는나를 만날때마다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 이 선생, 담배 한 대도 마음이 없으면 안 권하는 것이여!"
그 마음을 렌즈에 붙잡아 두려고 나는 오늘도 장터로 간다.
이흥재 - P5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순창으로 다니며 순창 읍내에서 자취를 했다.
중학교 때였다.
회비를 낼 기한을 넘기고도 한참을 더 넘겨드디어 교문 게시판에 회비를 내지 않은 학생 명단이 공개되었다.
물론 내 이름도 올라 있었다.
주말이 아닌데도 나는 그날 집으로 보내졌다. 나는 걸어서 집으로 갔다.
길은 굽이굽이 사십 리 신작로 길이었다. 여름이 시작되는 6월,
보리를 베는 철이었다.
땀이 비 오듯 했다. 차들이 지나가며일으킨 먼지를 뒤집어쓴 얼굴은 땀범벅이 되었다.
순창에서 아홉시쯤 출발해서 복실리, 인계, 팔학동,
쌍암 마을을 지나 갈재를 넘어 다시 재 하나를 더 넘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열두 시가 넘었다. - P10

어머님 아버님은 강 건너 밭에서 보리를 베고 계셨다.
어머님은 보리밭가에 서 있는 나를 보고 놀랐다.
나는 말도 못하고 보리밭가에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어머님도 아버님도 내가 회비 때문에 온 줄 알고 있었다.
보리 베는 어머님 아버님 옷은 땀으로 다 젖어 있었다.
어머님 아버님은 낫을 놓고 감나무 그늘에서 잠깐 쉬며강물을 바라보고 계셨다.
막막한 얼굴에 근심만 가득했다. - P17

한참을 그렇게 계시던 어머님이 머릿수건을 벗어 옷을 탈탈 털더니,
"가자 집으로" 하시며 징검다리를 건넜다.
집으로 돌아온 어머님은 마당을 벗어나모이를 찾던 우리 집 닭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닭들이 어머니가 뿌린 모이를 따라집으로 달려왔다.
이제 막 날개에 털이 나기 시작하는 영계들이었다. - P20

닭들은 어머님 뜻대로 닭장으로 다 들어갔다.
어머님은 닭장의 닭들을 한 마리씩 잡아두 날개와 발을 묶었다.
그리고 망태에 담더니,
"가자." 나는 어머님의 뒤를 따라갔다. - P23

한 시간 반쯤 걸어 삼십 분쯤 다시 신작로 길을 걸어 갈담장이다.
오후였는데도 장은 북적대고 있었다.
어머님은 가축으로 가더니, 흥정을 하고 닭을 팔았다.
그때 돈으로 1,600원이었다.
어머님은 내 손에 순창 가는 차표와 차표 끊고 남은 돈을 쥐어 주며,
어머님은 빈손이었다.
"나는 걸어갈란다." 점심도 굶은 어머님은집에까지 다시 걸어간다며 길을 나섰다. - P24

어머님이 저만큼 먼지 나는 신작로 길을 걸어가셨다.
어머님께서 차에서 내려 다부진 몸으로 닭을 흥정하시던 모습과나를 보내고 신작로 길을 부산하게 걸어가시던 어머님의 모습을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어머님이 가야할 길이 정말 너무 먼 길로 느껴져 나는 힘이 팽겼다.
눈물이 퉁퉁 마른 발밑 땅에 떨어져 먼지들을 적셨다. - P29

우리 집에서 갈담장까지는 시오리쯤 된다.
내가 어렸을 때는 버스가 자주 다니지 않아장에 가려면 갈담까지 걸어가야 했다.
장날 아침이면 온 동네가 장에 내다팔닭을 잡으려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 P32

토끼 가죽, 노루 가죽도장으로 가지고 나갔고,
아버지들은 달걀을 열 개씩 짚으로 곱게 쌌다.
짐을 다 꾸리고 밥을 먹은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장으로 갔다.
닭을 보자기에 싸서 이고, 거기에 달걀 싼 것까지 머리에 인 모습이옛날장에 가는 모습이었다.
머리 위에 머리만 내놓은 닭들은 자기들이 어디로 가는지 몰라눈알을 띠룩거렸다. - P37

닷새 만에 만나기도 하고 열흘 만에 만나기도 한 장꾼들은반갑기만 하다. 신작로는 사람들의 무리로 가득하였다.
갈담까지 가는 장꾼들의 행렬은 마치 실꾸리에서실이 풀어지는 것처럼 한없이 길어지고 늘어났다.
무엇인가를 머리에 이고, 등에 짊어지고,
손에 든 사람들의 발걸음은 활달하고거침이 없었다. - P40

그런 행렬 중에 아무것도 손에 들지 않고 그냥 장에 가는 사람들도있었다. 아무 볼일도 없이 장에 가는 사람을 사람들은 ‘남이 장에가니까 씨나락 갖고 장에 간다‘ 또는 ‘남이 갓 쓰고 장에 가니,
투가리 쓰고 장에 간다‘라고 했다. - P45

몇 개의 마을을 지나면 갈담장으로 가는 지름길이 있었다.
그 길에는 강물을 건너가는 징검다리가 있었다.
징검다리를 건너는 장꾼들의 모습은 강물과 함께 생동감이 넘쳤다.
강물이 많이 불어나, 작은 징검다리가 떠내려가 버리면 사람들은신을 벗고 강물을 건너기도 했다. 갈담장은 덕치면, 강진면, 운암면,
청웅면을 아우르는 큰 장이었다.
소전은 없어도 개나 염소들은 얼마든지 사고팔았다.
거긴 없는 것이 없었다. - P48

내가 최초로 장에 갈 때는 초등학교 일학년 때였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장에 갔다.
장은 크고, 엄청나게 많은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의 흥분된 흥정 소리,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의 반가운 목소리,
어디선가 싸우는 사람들의 목소리들은 사람들을 들뜨게 했다. - P52

나는 눈길을 어디다 둘지를 몰랐다.
아버지는 아는 사람도, 반가운 사람도 많았다.
끊임없이 인사하고 반가워하고 무슨 이야긴가를 했다.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나는 아버지 손을 꼭 잡고 있어야 했다. - P53

점심때가 되자 아버지는 나를 김이 뭉게뭉게 솟아나는 국숫집으로데리고 들어갔다.
우리 아버지 별명은 ‘국수 아홉 그릇이었다.
어느 결혼 잔치에 가서 국수를 아홉 그릇이나 잡숫는 바람에모든 사람들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기도 했단다. - P61

아버지는 여동생들에게도 늘 장난삼아 "나 죽으면 제사 지낼 때술 받아 오지 말고 국수사 오거라"는 우스갯소리를 자주 하셨다.
아무튼 나는 이 세상에 나서 처음으로 외식(?)으로 국수를 먹은 셈이었다.
국수는 정말 맛이 있었다. - P63

어머님은 장에 가시면 한 번도 장에서 국수나 다른 음식을사드시고 오시질 않았다.
"내가 국수 한 그릇 먹을 돈으로 국수를 사면 식구가 다 먹을 수 있다"며점심을 굶고 국수 한 그릇 값으로 국수를 사 오셔서 우리들에게국수를 먹였다. - P64

처음 장에가 많은 사람들 틈에서 국수를 먹는 맛은 기가 막혔다.
점심을 먹고 아버지와 나는 집에까지의 시오리가 넘는 길을 걸어집으로 왔다. 갈담을 조금 지나면, 작은 마을이 나오는데그 마을 가운데에 커다란 기와집이 한 채 있었다. 아버지는그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을 보며, "용택아. 우리도 언젠가는 저 기와집 같은 집을 짓고 살 것이다." 나는 그때 기와집을 바라보시던 아버지의모습을 잊을 수 없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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