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의 어머니
김용택 지음, 황헌만 사진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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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1] 새벽을 여는 어머니의 발길
― 웅천 성동리에서 자란 네 남매의 이야기

내가 열 살이던 무렵, 아버지는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형은 열두 살, 나는 열 살, 여동생은 여섯 살, 남동생은 네 살이었다. 아버지가 떠난 뒤 우리 집에는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어린 네 남매가 남았다.

그때는 몰랐다.

우리 집을 지탱하는 것이 할머니와 어머니의 손이고, 남들보다 먼저 시작되는 어머니의 새벽이라는 것을.

겨울이 오면 집 안 풍경부터 달라졌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겨우내 총올치를 했다. 두 분의 손에서 길게 이어진 총올치는 팔자 모양으로 한 꾸리씩 만들어져 바구니에 담겼다. 그렇게 바구니를 채운 총올치는 장날을 기다렸다.

웅천장은 2일과 7일에 섰다. 장날은 구경을 가는 날이 아니라, 겨우내 손으로 만든 총올치를 내다 팔아 얼마간의 돈으로 바꾸는 날이었다.

총올치보다 값이 더 나가는 것은 모시였다.

할머니는 서천장에서 모시를 만들 재료를 떼어 오셨다. 그것을 물에 불리고 말리며 손질한 뒤, 가느다란 올을 무릎에 대고 손바닥으로 비벼 하나씩 이어 붙이셨다. 얼마나 오랫동안 같은 자리를 비볐는지 무릎에서 피가 나기도 했다.

어린 나는 할머니 무릎에서 피가 나는 것을 보면서도, 왜 그 일을 멈출 수 없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할머니와 어머니는 겨울이면 으레 총올치와 모시를 잇는 분들인 줄만 알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할머니와 함께 어린 네 남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겨울이면 총올치와 모시를 이어 장에 내다 팔았지만, 그것만으로 살림을 꾸리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어머니는 웅천천 가까이에 있는 석재공장에 다니셨다. 공장에서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어머니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집에는 할머니와 어린 네 남매가 있었고, 어머니가 감당해야 할 살림은 늘 남아 있었다.

겨울 새벽이면 가장 먼저 일어나는 사람도 어머니였다.

안방에는 연탄보일러가 있었다. 아직 날도 밝기 전, 어머니는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가 연탄을 갈았다. 밤사이 연탄불이 약해지거나 꺼지면 방이 식었기 때문이다. 새 연탄으로 갈아 넣고 불이 제대로 이어지는 것을 살핀 뒤에야 어머니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사랑방은 안방과 달랐다.

사랑방 아궁이에는 추수를 마치고 남은 왕겨를 넣어 불을 땠다. 왕겨는 그냥 넣어 둔다고 잘 타지 않았다. 손으로 풍로를 돌려 아궁이 안으로 바람을 불어 넣어야 했다. 풍로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바람을 먹은 왕겨가 서서히 타오르고, 그 열이 구들을 따라 사랑방을 덥혔다.

풍로 돌아가는 소리와 왕겨 타는 냄새는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겨울이 지나고 날이 풀리면 어머니는 또 다른 새벽을 맞았다.

우리 동네에서는 다슬기를 고동이라고 불렀다. 어머니는 새벽이 채 밝기 전에 카바이드등을 들고 웅천천으로 나가셨다. 카바이드에 물을 부어 불을 밝히는 등이었다. 손전등도 귀하던 시절, 어머니는 그 불빛에 의지해 어두운 물속을 살피며 고동을 잡으셨다.

웅천천에는 봇담, 배챙이, 삽재처럼 고동이 잘 잡히는 곳이 따로 있었다. 좋은 자리를 차지해야 많이 잡을 수 있었고, 그 자리에는 말없는 텃세도 있었다. 먹고살기 위해 나간 새벽 물가에도 먼저 자리를 잡으려는 경쟁이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잡아 온 고동을 모두 내다 판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집에서 삶아 먹었다. 고동을 삶으면 푸르스름한 국물이 우러났다. 무엇을 넣었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소금을 넣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다만 그 국물에 밥을 말아 먹으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우리 네 남매는 탱자나무 가시로 고동 살을 하나씩 빼먹었다. 어머니가 새벽 웅천천에서 잡아 온 고동 한 그릇은 우리 네 남매의 든든한 한 끼가 되었다.

나도 자라면서 집안일의 한몫을 맡았다.

중학생이 된 뒤에는 겨울이면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러 다녔다. 집에서 불을 때려면 땔감이 있어야 했고, 누군가는 산에 올라 나무를 해 와야 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경운기를 몰고 나무를 하러 다녔다. 중학생 때는 지게에 지고 오던 나무를, 고등학생이 된 뒤에는 경운기에 싣고 왔다. 그렇게 해 온 나무는 우리 집이 겨울을 나는 땔감이 되었다.

그때는 그것을 특별한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 집에 필요한 일이었고, 내가 해야 할 몫이라고 여겼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저마다의 일을 하셨듯, 나도 자라면서 내 몫을 조금씩 맡아 갔을 뿐이었다.

세월이 흘러, 어린 네 남매를 키우고 가르치기 위해 애쓰신 할머니와 어머니 덕택에 형도, 나도, 여동생도, 남동생도 모두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

어린 시절에는 알지 못했다.

총올치 한 올과 모시 한 가닥, 새벽마다 갈아 넣던 연탄 한 장, 풍로를 돌려 살려 낸 왕겨불, 카바이드등에 의지해 잡아 온 고동 한 줌이 우리 네 남매를 키우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 네 남매의 졸업장에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다. 그러나 그 졸업장마다 총올치와 모시를 잇던 두 분의 손길과, 우리를 키우고 가르치기 위해 애쓰신 두 분의 삶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내 기억 속 성동리에는 지금도 총올치를 잇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손과, 고단한 삶을 짊어지고 새벽 배챙이로 걸어가시던 어머니의 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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