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의 힘 - 능청 백단들의 감칠맛 나는 인생 이야기
남덕현 지음 / 양철북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나의 이야기 3] 내 기억 속의 아버지 2...
― 소나기로 보지 못한 야구, 담을 넘으신 아부지

1982년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프로야구가 처음 시작된 해였고, 나는 국민학교 2학년이었다. 아부지와 형, 나 이렇게 셋이 대전에 사시는 큰고모님 댁에 갔다. 당시 큰고모님은 자양동에 살고 계셨다.

큰고모님 댁에는 삼 남매가 있었다. 맏이인 누나는 나보다 나이가 제법 많았다. 훗날 가수 신승훈과 같은 대학 같은 학과를 다녔다고 들었는데, 동창이었는지 선후배 사이였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 아래로 우리 형보다 한 살 많은 형과, 나보다 한 살 어린 여동생이 있었다.

그날 나와 형은 큰고모님 댁의 형을 따라 한밭야구장으로 갔다. 아부지는 야구장에는 함께 가지 않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대전과 충청도를 연고로 한 프로야구팀은 OB 베어스였다. 프로야구가 처음 출범했을 때 충청도 사람들에게 OB 베어스는 분명 우리 지역의 팀이었고, 그해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차지한 원년 챔피언이었다.

그렇게 충청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원년 우승까지 해 놓고, 나중에는 배신 때리고 서울로 튀었다.

OB가 떠난 자리는 뒤에 빙그레 이글스가 채웠다. 장종훈·이정훈·이강돈 선수를 앞세운 강력한 타선은 ‘다이너마이트 타선’이라 불렸고, 빙그레 이글스는 훗날 지금의 한화 이글스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밭야구장 안으로 들어서자 관중석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야, 사람 참 많네.”

어린 나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한곳에 모여 있는 모습부터 신기했다. 프로야구가 막 시작된 때라 사람들의 관심도 대단했다. 당시 대통령은 전두환이었고, 이른바 3S 정책 가운데 하나가 스포츠였다는 것은 훗날 알게 된 일이다. 어찌 됐든 그 시절 프로야구의 열기는 대단했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선수들은 그라운드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신경식 선수와 김우열 선수 같은 당시의 쟁쟁한 선수들이 바로 눈앞에서 움직였다. 특히 신경식 선수가 1루에서 다리를 일자로 쫙 벌리며 공을 받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해야 공을 0.01초라도 더 빨리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도 난다.

마운드 쪽에서는 박철순 선수가 피칭 연습을 하고 있었다.

당시 어린 내 눈에 박철순 선수는 그야말로 투수의 제왕이었다. 그가 너클볼로 이름난 투수라는 이야기도 그 무렵 귀동냥으로 들었다. 구종을 알아볼 나이는 아니었지만, 당대 최고의 투수가 눈앞에서 공을 던지는 모습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아직 경기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야구장은 벌써 흥분의 도가니였다. 나 역시 곧 눈앞에서 펼쳐질 첫 프로야구 경기를 생각하며 잔뜩 들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금세 지나갈 소나기인 줄 알았다. 잠시만 기다리면 비가 그치고 경기가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는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야구장을 흠뻑 적실 만큼 계속 퍼부었다.

결국 경기는 우천으로 취소되었다.

그토록 기대했던 나의 첫 프로야구 관람은 선수들이 몸을 푸는 모습만 바라본 채 끝나고 말았다. 야구장 안까지 들어갔지만 정작 경기는 한 이닝도 보지 못했다.

그날 이후 나는 지금까지 야구장에서 프로야구 경기를 아예 본 적이 없다.

훗날 나는 한밭야구장에서 걸어서 삼십 분 남짓 떨어진 문화동에서 약 13년을 살았다. 한밭야구장 주변은 자주 걷던 산책길이 되었고, 밤에 보문산을 오르다 보훈대 쪽에서 내려다보면 야간경기의 불빛도 보였다.

그렇다고 야구를 본 것은 아니었다.

산길을 걷다가 멀리 불이 켜진 야구장을 바라보며,

“어, 저놈들 야구허고 있구먼.”

하고 지나치는 정도였다.

어린 시절 그렇게 보고 싶었던 야구장이 가까이에 있었는데도, 나는 끝내 관중석에 들어가 경기를 보지 않았다. 어쩌면 내게 한밭야구장은 처음부터 야구를 보는 곳이라기보다, 갑자기 퍼붓던 소나기와 함께 기억되는 곳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의 이야기는 야구장에서 끝나지 않았다.

밤이 되어 우리끼리 큰고모님 댁에 있을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 대문을 쾅쾅 두드리며 문을 열라고 했다.

큰고모님 댁의 형이 문밖을 향해 물었다.

“누구세요?”

그러자 밖에서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니 삼촌이다. 언능 문 열어.”

형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저는 삼촌이 없는데요.”

문밖의 사람은 다시 대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뭐여? 나 니 삼촌여. 언능 문 열어.”

그러나 형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 저는 삼촌이 없다니까요.”

나와 형은 그 목소리가 누구인 지 알아듣지 못했다. 밤이라 모두 긴장했고, 대문 밖에서 낯선 남자가 계속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아 무섭기도 했던 모양이다.

대문을 사이에 두고 같은 말이 몇 번이나 오갔다. 문밖의 사람은 계속 자신이 삼촌이라고 했고, 문 안의 우리는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문밖의 사람은 한참 동안 대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아무리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한 그 사람은 담을 타고 올라왔다.

그리고 담 위에 걸터앉았다.

그제야 우리는 담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우리 아부지였다.

큰고모님 댁의 형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고모부에게는 남자 형제가 없어서 그 형에게 친삼촌은 정말 없었다. 형은 ‘삼촌’이라고 하면 아버지의 남자 형제만 떠올렸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아부지는 큰고모님의 오빠였다. 그 형에게 우리 아부지는 분명 외삼촌이었다. 아부지는 외삼촌인 자신도 당연히 삼촌이라고 생각하셨다.

두 사람의 말은 모두 맞았다.

다만 서로 말하는 삼촌이 달랐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부터 나는 장면이다.

“나 니 삼촌여.”

“저는 삼촌이 없는데요.”

대문을 계속 두드려도 조카가 끝내 문을 열어 주지 않자, 결국 월담을 감행해 담 위에 걸터앉아 계시던 아부지. 병들어 누워 계시던 아부지와는 전혀 다른, 당당하고도 유쾌한 모습이었다.

그날 대문 안에서 끝까지 “저는 삼촌이 없는데요”라고 버티던 고모네 형은 훗날 학창 시절 오토바이 사고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이듬해 여름이 오기 전인 봄에 아부지도 세상을 떠나셨다.

그래서 소나기로 야구를 보지 못한 그날이, 아부지와 함께했던 마지막 여름이 되었다.

나는 그날 한 이닝의 야구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도 야구보다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어두운 밤, 닫힌 대문을 두드리다 끝내 담 위에 걸터앉아 계시던 아부지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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