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도시 기행 3 -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리스본, 뽀르투 편 ㅣ 유럽 도시 기행 3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럽 도시 기행 3』 ― 도시를 걸으며, 역사와 사람을 생각하다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리스본, 뽀르투를 지나며

『유럽 도시 기행 3』을 따라 마드리드·바르셀로나·리스본·뽀르투를 걸었다. 실제로 그 거리를 걸은 것은 아니지만 책을 읽는 동안 네 도시는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저마다의 역사와 기억을 품은 공간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길에서 나는 유시민의 안내를 따라가기도 하고, 때로는 멈춰 서서 다른 방향을 바라보기도 했다.

마드리드에서는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독재, 그리고 민주화의 역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화려한 왕궁과 미술관 뒤에는 권력을 둘러싼 오랜 갈등과 상처가 있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가우디의 건축보다 더 깊은 곳에 카탈루냐의 역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와 구엘공원의 아름다움만 보고 지나가기에는 이 도시가 겪은 정치적·역사적 굴곡이 너무 컸다.

포르투갈로 넘어가면서 생각은 이베리아반도 전체로 넓어졌다. 한때 세계의 바다를 양분하다시피 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영광은 누구에게나 영광이었을까. ‘대항해시대’라는 이름 뒤에는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벌어진 침략과 수탈, 노예무역이 있었다. 한쪽의 발견과 기적이 다른 쪽에는 재앙일 수 있다는 사실을 빼놓고 그 시대를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리스본에서는 폼발 후작이 가장 많은 생각거리를 던졌다. 대지진으로 무너진 도시를 다시 일으킨 유능한 개혁가였지만 권력을 집중시키고 반대세력을 가혹하게 탄압한 인물이기도 했다. 유시민은 그를 ‘시대를 앞서간 인문주의자’로 평가하고 그의 동상 앞에서 국가의 기능과 리더의 역할을 생각한다. 나는 여기서 박정희를 떠올렸다. 두 사람을 같은 선상에 놓을 수는 없지만, 역사적 인물의 공과 과를 어떻게 함께 평가할 것인가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사라마구와 페소아를 통해서는 한 도시가 작가를 어떻게 기억하는지도 생각했다.

뽀르투에서는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상벤투역의 아줄레주와 이슬람 건축을 떠올리게 한 아랍 홀, 도루강과 히베이라의 풍경은 작은 도시가 지닌 매력을 보여주었다. 책과 서점은 더 이상 지성의 상징이 아니라는 유시민의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려웠고, 제국의 실패를 경험한 포르투갈 사람들이 그 때문에 여유와 환대의 태도를 갖게 되었다는 해석에는 지나치게 낭만적인 설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책을 읽는 동안 저자와 제법 자주 티격태격한 셈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얻은 것은 네 도시의 여행정보만이 아니었다. 좋은 여행기는 어디를 가야 하는지만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 그곳에서 무엇을 생각할 것인지 질문을 던지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의 생각에 모두 동의할 필요도 없다. 공감하고, 의심하고, 따져보고, 때로는 다른 답을 찾는 과정까지가 독서다.

나는 네 도시를 아직 직접 걷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곳에 간다면 건물과 풍경만 보고 돌아오지는 않을 것 같다. 아름다운 것 뒤에 어떤 역사가 있는지, 누가 그것을 만들었고 그 시대의 영광 뒤에서 누가 대가를 치렀는지 찾아볼 것이다.

결국 내가 여행에서 알고 싶은 것은 늘 그 질문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소리없이 안쪽을 향하는 그림자가 스치고 간 자리에서 코에 익은 향수 냄새가 풍겼다. 고묘지 미코토의 몸에서 났던 그 향수의 향이다.

이런 시간에 혼자, 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이 긴 복도 끝은 예의 ‘진자의 방’이다. 더구나 그 방은 잠겨 있을 텐데…….

가와미나미는 걸음을 서둘렀다. 바닥에 끌리는 ‘영의’ 자락을 밟아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앞쪽 어둠에 한 줄기 빛이 비쳤다. ‘진자의 방’ 문틈에서 새어나오는 빛인 듯하다.

소리들은 당황과 의문, 그리고 떨쳐버릴 수 없는 공포를 문지르듯 짙은 안개가 서린 마음속에 맴돌았다. 그와 동시에, 어쩌면 이것은 현실이 아니라 꿈속의 사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묘한 정당성을 지니고 솟아올랐다.

마침내 시계 소리가 사그라들자, 사태에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제대로 생각도 못하고 가와미나미는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 방향을 바꾸어 걸었다.

10년 전에 왔을 때에는 저런 탑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건물의 현관도 아까 본 모양과 달랐다는 생각이 든다.

밖에서 봐서는 잘 알 수 없지만, 그것은 시계탑이라고 와타나베가 말했었다. 시계의 문자판은 뒤뜰을 향하도록 지어져 있다. 게다가 묘한 일은, 이 점은 최근에 들었지만 그 문자판에는 바늘이 없다고 한다.

‘바늘이 없는 시계탑이란 말이지.’

정면에서 불어오는 미적지근한 바람에 멍하니 서 있는 후쿠니시의 머리칼이 흩날렸다. 숲의 나무들이 조잘조잘 바람에 술렁인다. 그때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던 주위의 어둠에서, 갑자기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후쿠니시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떨었다.

"어두웠고, 거리도 꽤 떨어져 있었으니까, 거기까지는 잘……."
"어쩐지 마음에 걸리는군."
시시야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생각할 수 있는 머리가 조금만 있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당연하겠다 싶은 생각이 듭니다. 저도 그래요. 《카오스》의 기사만 해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며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어딘가에 진짜가 존재할 거라고 믿고 싶어 하죠. 과학이 그것을 부정하면 할수록 그 과학을 넘어서는 곳에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말입니다.

"역시 일종의 현실 도피일까요? 아니면 반대로 무의식적인 반항인지도 모르겠군요. 학교에서 강요하는 어른들과 기존의 과학이라든가 질서에 대한."

"반항이라, 흥미로운 의견이로군."

"글쎄, 난 아주 무책임하게 그저 재미있어야 할 뿐이야. 믿느니 안 믿느니 하는 것보다, 유령이란 것이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고 싶다, UFO가 있다면 타 보고 싶다……. 그런 식으로 말이야. 호기심 덩어리라고 하면 듣기는 좋지만, 요는 아무 쓸모도 없는 구경꾼인 셈이지."

"그렇군. 뭐 아무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지. 유령이 나타난다는 소문의 배경에는 반드시 무언가가, 그에 상응하는 원인이 있을 거야."

"그렇다면 문제는 없겠군. 미스터리 마니아인 젊은 학생과 신진 미스터리 작가가 묘한 인연으로 이렇게 알게 되었는데, 오늘 밤 무슨 약속 있나? 없으면 우리 어디서 식사라도 함께 하지."

"요코하마의 가나가와 현 경찰본부에 다녀왔었어."
꼼꼼한 손놀림으로 잔에 맥주를 따르면서 시시야는 말을 이었다.

고다카 씨―오늘 내가 찾아간 형사인데―그도 그 집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데다 다소 관심도 갖고 있는지 관할서에 물어보기까지 하면서 조사를 해 주더군. 그 조사에 의하면 고가 미치노리를 포함해, 10년 동안에 적어도 일곱 명의 관계자가 죽었다는 거야.

"우선 고가 미치노리의 딸, 유령으로 나타난다는 문제의 소녀야. 10년 전, 그러니까 1979년 8월에 14살 어린 나이로 죽었어. 병사로 되어 있더군. 그 다음이 당시 고가 저택에 살면서 일했던 데라이 아키에라는 여자야. 도와가 죽은 지 얼마 안 돼 숲 속에서 목을 매 자살, 27살."

"그 다음은 현관에 나온 그 여자……. 이나미 사요코라고, 현재 그 집의 관리를 총책임지고 있는 모양인데, 그녀에게는 유사쿠라는 남편이 있었어. 원래는 둘이서 고가 저택에 살면서 일을 했대. 부부 사이에는 교코라는 딸이 있었지. 그 아이가 같은 해 8월에 아홉 살로 죽었어. 이 아이도 병사로 되어 있더군. 그로부터 한 달 후, 이번에는 아버지인 유사쿠가 죽었지. 마흔 살, 사고사."

"고가 미치노리가 죽은 것은 이듬해 80년 9월. 63세. 마찬가지로 병사. 도와가 죽은 후에 저택의 증축을 시작해서 그 일이 완성된 직후였다더군. 이렇게 해서 다섯 명이 되었지. 나머지 두 명. 한 명은 고가 가문의 주치의였던 하세가와 도시마사라는 남자. 81년 12월, 52살로 죽었어. 개업 중인 병원에 불이 나서……. 또 한 사람은 핫토리 이쿠오라고, 미치노리가 은퇴한 후, 고가 정계사의 전무로 일했던 남자야. 미치노리에게 꽤나 신임을 얻었는지 언젠가는 사장이 될 인물이었다는데, 82년 3월에 마흔다섯 살 나이로 죽었어. 이것도 교통사고."

"병사가 세 명에 사고사가 세 명, 한 명은 자살이로군요. 아, 고맙습니다."

좀 더 자세한 기억이 떠오르지는 않을까 하고 눈을 감아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예쁘지만 어딘가 모르게 병약해 보이는 그 소녀의 얼굴. 숲 사이에 서 있는 그 집의 어두컴컴한 현관. 그리고…….

불쑥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함몰된……) 희미하게 꿈틀거리며, 후쿠니시를 당황케 했다. 무얼까 (……구멍에 처박혀) 이것은.

"그 책을 읽고, 나한테 탐정 소질이 있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르지. 의논할 일이 있다는데, 죽은 고가 미치노리와 관계된 일인 것 같아."
아아, 그래서 시간을 말한 거로군요."
"귀가 밝기도 하군."
시시야는 또 싱긋 입술을 비틀었다.
"내일―아니 오늘 밤 9시, 정식으로 그 집에 초대되었는데, 어떤가? 자네도 함께 가지 않겠나?"

7월 31일 월요일.

잠에서 깨어났을 때, 가와미나미 다카아키는 문 옆에 걸린 시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벌써 2시에 가까운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영의’ 주머니를 뒤지자, 어젯밤 홀에서 슬쩍한 회중시계가 들어 있었다. 그것으로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한다. 역시 2시 전이었다. 이렇게 늦게까지 잠을 자다니, 평소에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들 웃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말이야. 뭐랄까, 공기가 이상해. 고여 있고 투명하지가 않아. 왠지 탁한 색처럼……. 파인더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유난히 그런 느낌이 더 든단 말이야. 아무래도 난 기분이 나빠서 못 참겠어."

"그러고 보니, 그런데."
"어째서 일부러 저런 식으로 만들었느냐 말이야. 언뜻 보기에도 아주 복잡하고 튼튼하잖아. 왠지 마치."
말을 끊고 우류는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가와미나미가 예상했던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가와미나미는 순간 한기가 들었다.
"안에다 사람을 가두기 위한 건물 같잖아."

고묘지 미코토가 사용한 침실을 들여다보았지만, 사키코가 말한 대로 비어 있었다. 침대에는 누웠던 자국이 있고 그 옆에는 그녀가 갖고 들어온 가방이 남아 있었지만, 본인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두 사람을 놀라게 한 것은 잘 정돈돼 있는 그 가구 사이로 흩어져 있는 정밀 기계의 잔해였다. 부서진 시계가 바닥에 깔린 짙은 갈색 카펫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고바야가와가 방 안으로 들어가, 바닥에 나뒹구는 시계 하나로 다가갔다.
"도무지 손쓸 여지가 없군, 이거야."

세면실이었다. 미코토의 모습은 없었지만, 대리석 화장대 앞에 깨진 시계가 하나 나뒹굴고 있다는 점이 역시 이상했다. 옆방의 시계 여섯 개와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부순 것이 분명하다. 깨져 조각조각 떨어져나간 문자판의 유리. 멈춘 시계 바늘이 가리키는 시각은 3시 50분.

가와미나미는 몸을 구부리고, 고바야가와가 가리키는 장소를 들여다보았다. 바닥에는 털이 긴 진주색 카펫이 깔려 있었다. 그것이 검붉게 얼룩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자기도 모르게 고바야가와의 얼굴을 보았다.
"이건."
"핏자국처럼 안 보이나? 더구나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어."

"설마 고묘지 씨가 어젯밤 이 장소에서 누군가에게 당했다……."
가와미나미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렇다면, 그 시간에 내가 들은 소리는 이 시계로 그녀의 머리를 내려치거나 어떻게 한 소리였다는 셈이로군요."

황망한 시간이 흘렀다.
침실, 거실, 세면실, 화장실, 욕조 등을 다시 한 번 빈틈없이 조사를 한 다음, 고바야가와와 가와미나미는 서둘러 홀로 돌아가 모두에게 사태를 보고했다. 그리고 전원이 흩어져 ‘구관’ 전체를 수색하기로 했는데…….
약 한 시간에 걸쳐 관내를 샅샅이 수색한 결과, 확인된 것은 이 건물 어디에도 그녀의 모습이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저 말이지, 고즈에. 너 정말 어디까지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좀 더 현실적으로 생각해야지."
"그럼 어떻게 해."
"현실적으로 생각하자면, 미사오. 살인이니 시체가 없어졌느니 하는 것도 별로 현실적으로 생각되지 않는데."
약간은 비꼬는 투로 가와라자키가 말했다.

"밖에 알리고 싶어도 열쇠가 없어."
"무슨 소리입니까? 열쇠 꾸러미는 고바야가와 씨가 맡고 있잖아요?"
"그걸, 그녀에게 건네줬었거든."
고바야가와는 점점 더 숨이 막히는 듯한 몸짓으로 말했다.
"그녀라뇨? 고묘지 씨 말입니까?"
"으응."
"왜요?"
"고묘지 씨가 그러라고 해서 말이지. 이 집의 과거를 탐색하기 위해서 열쇠 꾸러미가 필요하다고 했거든."

"내 생각이 옳았다는 말이야. 말하자면 이건 전부 고묘지 선생 한 사람의 연극이었다는 거야."
"흐음, 그도 일리가 있는 말인데."
대항하듯 우류도 입술에 미소를 띠었다.
"온 집을 다 뒤져도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왜냐? 그녀는 집 밖으로 나갔기 때문이지. 현관 열쇠를 갖고 있으니 아무런 문제없잖아."
"명쾌한 설명이로군. 그런데 왜 그녀가 그런 일을 한 거지?"

"자세하게 말하자면, 가위나 칼 같은 날카로운 것으로 닥치는 대로 갈가리 자른 느낌이었어. 가슴 있는 데가 이렇게 얼룩져 있었고."

그때까지 잠자코 있었던 사키코가 느닷없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그 이야기, 이제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요."
"무슨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어?"
우류가 묻자, 사키코는 하얀 두 볼을 떨면서 고개를 숙였다. 짧은 한숨을 쉬며 우류가 천천히 팔짱을 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그가 도와의 죽음과 관련해 무슨 꺼림칙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가와미나미는 생각했다.

어젯밤의 말소리, 그리고 방에서 난 소리. 가와미나미는 그것들이 미코토 혼자만의 연극이었다고 순순히 믿을 수가 없었다. 가와라자키나 우류의 의견에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있는 8명 중에 누군가가 그녀를 살해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타당성이 없다. 그렇다. 문제는 이 시계관이 나카무라 세이지가 지은 건물이라는 바로 그 점이다.

"무슨 소리죠? 지금 저 소리는?"
"소리? 글쎄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고, 그녀는 오른쪽 귀에 꽂힌 이어폰에 손을 갖다댄다.
"저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요."
"지금 들렸어요. 어디선가 중국 요리할 때 쓰는 프라이팬을 바닥에 떨어뜨린 듯한 소리가 났는데. 후쿠니시, 자네도 들었지?"
"네, 분명히."
"그렇습니까?"
사요코는 미안하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보시는 대로, 요즘엔 귀가 안 좋아서요."
"보청기입니까?"
"네. 그래서 안 들렸는지도 모르죠."
"아주 작은 소리였으니까요. 그건 그렇지만……."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좀 높은 지대에 있는 집이라서 먼 데 소리가 잘 울리거든요. 밤에는 특히."

"말씀대로, 거기에는 가면이 하나 더 걸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어제 오후부터 없었어요."
"어제 오후부터? 없어졌다는 걸 안 것은 언제입니까?"
"6시에 여러분이 ‘구관’으로 들어간 다음이었어요. 선생, 아니 시시야 씨가 오셨을 때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이 집은 불행한 집입니다."
얼굴을 약간 숙이고 사요코는 절절하게 말했다.
"저주를 받았다고,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도 과거에 일어난 불행을 생각하면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저주를 받았다, 정말 그런지도 모르겠군요."

"원칙적으로 ‘구관’을 거주 명목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 문을 잠그고, 지금 그대로의 상태를 계속 유지할 것. 특히 ‘진자의 방’ 그러니까 따님인 도와 아가씨가 사용했던 방은 살아 계셨을 때와 똑같이 해 두고, 정기적으로 청소를 하는 외에는 함부로 드나들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구관’에 있는 시계, 그쪽 건물에는 자료실에 진열돼 있는 수집품 외에, 작동하고 있는 시계가 전부 108개 있습니다. 그것들 모두를 가능한 한 늘 손질해서 정확하게 움직이게 할 것."

"번뇌의 수로군요. 그것들을 전부, 오늘까지 당신이 관리하셨나요?"
"몇 개 고장이 난 것도 있지만, 대충 사흘에 한 번은 태엽을 감고 시각을 조정합니다."
"야, 그것도 힘든 일이겠군요."

"노노미야 야스히토 씨라고, 주인어른이 젊은 시절부터 내내 의논 상대로 삼으셨던 점쟁이입니다."

"점이라고요? 그런데 그 분이 무슨?"

"올해 벌써 84살이 되신 분인데, 주인어른의 배려로 이곳의 별채에 살고 계십니다. 별채는 이 ‘신관’이 서기 전부터 있었던 건물을 말하는 것이죠. 저희 관리인과 그 외 집안일을 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주인어른이 돌아가신 후에도 노노미야 선생님은 이 집에 살도록 하고, 잘 보살펴 드리라고."

"한 가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요. 어쩌면 아무 일도 아닌, 염두에 둘 필요도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데 9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그 의미를 알 수 없다는 상태가 점점 견디기 힘들어졌어요."

여신은 침묵의 감옥에 이어져 있다

1992년 8월 5일 처형의 그 날

시간은 끝이 나고 성당에 일곱 가지 색이 비치고

땅을 뒤흔드는 외침 속에서 너희들은 들으리라

침묵의 여신의 단 한 번의 노랫소리

아름다운 단말마의 선율을

그것은 한탄의 노래 그것은 기도의 노래

죄 많은 짐승들의 뼈와 함께

우리들의 비석에 바쳐지리라

"정시법이 자연을 관리하려는 시스템인 데 비해, 부정시법은 자연의 리듬을 중심으로 해 시간을 가변적으로 설정한 것인 셈이지. 한 각의 길이가 낮과 밤의 길이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그런 시각제도였어. 그래서 계절에 따라서 혹은 장소에 따라서 시간의 길이가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지."

"사신死神이야. 사신을 보았어."
겁을 먹은 듯한 눈으로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돌아보면서, 그는 그런 말을 했다.
"죽음의 신이야, 사신을 보았어."
무슨 소린지 어리둥절해 고개를 갸우뚱하는 시시야를 상관하지 않고, 노인은 쉰 목소리로 계속한다.
"검은 망토를 입은 놈이야. 창백하고 납인형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우선, 이 저택에 ‘구관’이 세워진 것은 정확하게 언제였습니까?"
"15년 전입니다. 1974년 8월 5일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는데요. 따님의 열 번째 생일에 맞춰 주인어른이 이 집으로 이사를 오셨어요."
"8월 5일. 그날이 도와 씨의 생일입니까?"
"네."
"돌아가신 유사쿠 씨와 당신은 그 당시부터 이 집에?"
"그보다 훨씬 전이에요. 주인어른이 도쿄에 사실 때부터 우리들은 고가의 집안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데루미 씨의 남편, 아다치 모토하루 씨의 친구가 나카무라 씨의 은사라고 하던데요. 그런 관계로 알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흐음. 그래서 특별히 의뢰를 수락했다, 그런 얘긴가요. 데루미라는 여동생이 유키야 도련님의 후견인이라고 아까 들었는데, 그녀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오스트레일리아의 멜버른이오. 남편 분의 일 관계로, 거기 산 지 오래됩니다."
"멜버른이라면 지금쯤 한겨울이겠군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그런데…….

엊그제 밤, 갑자기 부음을 받았다. 후지사와에 사는 사촌 동생이 오토바이 사고로 죽었다는 것이었다.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그런데…….

엊그제 밤, 갑자기 부음을 받았다. 후지사와에 사는 사촌 동생이 오토바이 사고로 죽었다는 것이었다.

후쿠니시의 부모님은 5년 전, 그가 고등학교에 진학한 해에 이혼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아버지가 사는 집을 떠났다. 따라서 아버지 친척의 장례에 어머니가 참석해야 할 의무는 없었다. 후쿠니시는 혼자서 후지사와로 갔다. 죽은 그의 사촌 동생과는 어릴 적 함께 놀던 사이다. 달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요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한 아버지를 거기서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품은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역시 아버지는 와 있었다.

듣자니, 사촌 동생은 도로 끝에 나 있던 구멍에 오토바이가 처박혀 뒤집어지는 바람에 목뼈가 부러졌다고 한다. 비 때문에 지반이 물러졌든지, 아무튼 노면의 일부가 함몰되어 있었다고 한다.

‘함몰된 도로.’

그 말, ‘함몰된……’이, 그 이미지 ‘구멍에 처박혀……’가 마음속 어딘가에서 미묘한 파문을 일으켰다. 사고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벌써 몇 번째다. 대체 무슨 일인지, 그 자신도 잘 알 수 없었다. 특별히 염두에 둘 만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주택가를 빠져 나오자 갑자기 풍경이 쓸쓸해졌다. 좁다란 오르막길이 울창한 숲으로 이어져 있다. 외등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일몰이 가까워 사방은 벌써 어두컴컴했다.

이 이상 가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는 참에, 후쿠니시는 앞길을 막는 꼴로 서 있는 차 한 대를 발견했다. 파란 폭스바겐 골프였다.

과연 지독하게 오래된 차인 듯했다. 여기저기 색이 벗겨져 있기도 하고 녹슨 부분이 드러나 있기도 하다. 지저분한 번호판에는 시나가와 번호가 적혀 있었다.

"도쿄에서 오셨습니까?"

후쿠니시가 물었다. 이런 상황을 만나면 잠자코 지나치지 못하는 것이 그의 성품이다.

"요 앞에 ‘시계관’이란 건물이 있는데, 자네 아나? 거기에 가는 길이야."

"네에?"

후쿠니시는 놀라 상대방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목적지’라는 표현이나 번호판으로 봐서, 그가 저택에 사는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 거기로 간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미스터리 연구회의 학생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만, 어떻게……?"
"이것 참 기연이로군."

추리 작가 시시야 가도미
명함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문 너머에는 널찍한 홀이 있었다. 문제의 현관 홀인 셈이다. 그리고 창문 하나 없는 그 홀의 양 벽면을 가득 메우듯 수많은 시계가 줄줄이 걸려 있었다. 대충 삼, 사십 개는 족히 될 듯하다.

"대단하군."

"이전에 이나미 씨한테 들었는데, 이것도 역시 고가 미치노리 씨의 유지라는군. 자신이 죽은 후에도 ‘구관’의 시계는 정확하게 시간을 맞추어 놓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움직이게 하라고 말이야."

"고가 미치노리가 수집한 진짜 골동품은 전부 자료실의 진열 케이스 안에 보관되어 있는 모양이야. 먼지가 들어가면 기계가 손상을 입으니까 그런 거겠지. 그러니까 밖에서 움직이는 것은 그가 제작하게 한 정교한 이미테이션이란 말이지."

"그럼, 그 문까지 잠근다는 말입니까?"

고바야가와가 입구 철문에 열쇠를 끼우는 것을 보고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려던 우츠미가 말했다. 그 문은 안쪽에서도 열쇠로 열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 구조다. 그 점은 계단 위의 문과 마찬가지였다.

"막상 유령이 나오면 모두들 도망가고 싶어질 테니까. 그러지 않도록 하기 위한 거야."

우츠미는 면목 없다는 듯 턱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실은 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금방 꿈에 나타나는 성격이라서요. 《카오스》 일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아무래도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거든요."

"학교에서는 이래봬도 건축이 전공이니까요. 그러니까 이 정도야……."
"이 녀석, 옛날부터 징그러울 정도로 뭐든 잘했거든요."
가와라자키가 익살맞은 말투로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무슨 곤란한 일이 생기면 사양 말고 말씀해 주십시오."

"침실 세 개, 이 방들은 사용해도 좋다는 이나미 씨의 허락을 받았어. 여자 세 명은 거기를 사용하기로 하고, 나와 나머지 다섯 명은 자료실에 담요를 깔고 자야 될 것 같은데. 사람 하나 잘 정도 공간은 비어 있겠지?"

"저기에서 한 명씩 나뉘어 잔단 말입니까?"

"고묘지 씨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장식장 앞에 놓여 있는 스툴에 앉아, 줄곧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말했다.

"이 집에 살고 있는 혼이 겁을 내고 있는 것 같아요."

"아까부터 혼의 파동을 찾고 있는데. 그래요, 이 집에 누군가의 혼이 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군요. 그리고 그것은 그다지 위험한 것은 아닌 듯해요. 우리들에게 적의는 갖고 있지 않아요. 오히려 우리에게 겁을 먹고 있는 그런 파동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한 군데 모여 있기보다는, 한 명씩 나뉘어 시간을 갖는 편이 좋겠어요. 혼과 제대로 교신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저쪽의 경계심을 풀어 줄 필요가 있으니까."

‘거주 블록’에 나란한 세 개의 침실은 여자 세 명이 사용하게 되었다. 동쪽으로부터 차례로 고묘지 미코토, 가타기 사키코, 니이미 고즈에. ‘수집 블록’에 나란한 열두 개의 작은 방 중 북쪽의 I, II, III호실은 우류, 와타나베, 가와라자키 등 학생 세 명이, 남쪽의 VII, VIII, IX호실을 고바야가와, 가와미나미, 우츠미 세 명이 각기 사용하기로 결정되었다. 방들의 배당표는 우류가 그린 평면도와 함께 홀 벽에 붙여 놓기로 했다.

"그럼, 여러분."
고묘지 미코토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부터 영과의 교신을 시도하겠습니다."

가와미나미가 앉은 자리는 미코토의 왼쪽 옆이었다. 앉은 순서는 그녀 자신이 지정한 것으로 가와미나미의 왼쪽 옆에는 니이미 고즈에, 이하 시계 방향으로, 우류 미사오, 와타나베 료스케, 고바야가와 시게오, 우츠미 아츠시, 가와라자키 준이치, 가타기 사키코 순으로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교령회 도중의 사진 촬영은 당연히 금지되었다.

가와미나미는 오른손을 뻗어, 미코토의 왼 손목을 잡았다. 막연하게 예감하고 있었던 대로 부드럽지만, 그러나 아주 차가운 감촉이었다. 그에 비하면 왼쪽에서 가와미나미의 왼 손목을 잡은 니이미 고즈에의 손은 뜨겁고 조금 땀이 배어 있었다.

"나는 여기에……, 있어요."
가늘고 갈라진 흐느낌 같은 목소리로 끊일 듯 끊일 듯 말한다. 방금 전까지의 말투에 비하면 전혀 다른 사람 같다. 혼이 그녀의 몸으로 들어왔다는 말인가.
"나는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고바야가와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다. 테이블 위에 놓인 촛불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휘리릭 꺼졌다.

조그만 비명 소리가 몇 명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갑작스런 그 사건에 가와미나미 또한 몹시 낭패한 기분이었다. 왜 갑자기 촛불이 꺼졌는지……. 누군가가 불어 끈 것 같지는 않았다.

"열쇠가, 있어요."
아까의 흐느끼는 듯한 가녀린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고묘지 미코토의 원래 목소리다.
"내 정면에 있는 선반입니다. 그 뒤에 열쇠가……."
"달그락"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나고, 말이 끊어졌다. 잠시 기다리다가 그 다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을 확인한 고바야가와가 말했다.

"혹시……. 아니,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이 열쇠는 일단 내가 맡기로 하죠. 이 열쇠를 통해서 무언가 보일지도 모르니까."

"나는 심령현상이라든가 그런 것에는 회의적인 인간인데 말이야. 아까 교령회도 내 눈으로 직접 보기는 했지만, 그만큼 이상한 현상은 처음이야."

"왠지 불만스러운 표정인데."
"어, 조금."
우류 미사오는 말꼬리를 흐린다.
"그럼 우류 선배는 의심하고 있는 거예요?"
고즈에가 의외라는 듯 소리를 질렀다.
"치, 정말 늘 저 모양이라니까."

가와라자키 준이치가 싱긋 웃었다.
"나도 미사오랑 같은 생각이야. 아무래도 납득이 안 가."

테이블에 턱을 괴고 우류가 고개를 끄덕인다.
"빈틈이 없어. 마치 정해진 각본대로란 느낌 안 들었어?"

갑자기 꺼진 촛불.
누군가 몰래 훅 불어 꺼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바람이 원인이 되어 꺼졌다면 불꽃이 흔들렸을 것이다. 내내 관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마치 누군가 보이지 않는 사람이 심지를 꼭 집어 꺼버린 것 같은 식이었다.

"우선은 ‘물리형’과 ‘심리형’, 이 두 가지로 크게 구분되지. 물리형 영매는 죽은 자의 사념을 초자연적인 물리 현상으로 표현하지. 예를 들면 가구가 저절로 움직인다거나, 이상한 소리가 나거나, 심령체가 흘러나오거나, 그런 현상 말이야. 심리형은 죽은 자의 사념을 말로 전달하는 경우지. 그 전달 방식은 다양하지만 자동기술을 행하는 자도 있고 ‘직접형 영매’라고 해서 혼의 말을 직접 뇌까리는 자도 있어. 고묘지 씨는 명백하게 심리형, 직접형 영매에 해당하는 셈인데, 한편 촛불이 꺼지고 랩 소리가 나기도 하고, 그런 물리현상도 일어났잖아. 그러니까 만약 진짜라면 그녀의 초능력자로서의 ‘힘’은 굉장하다는 말이 되는데."

"그렇지만 속단은 금물이야. 과거,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영매가 많았지만, 그 대부분이 사기극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돼. 예를 들어……."

"그래. 그녀들의 활약상이 자극제가 되어 19세기 후반,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심령주의 붐이 일어났었지. 그 자매가 행한 것은 랩 소리를 통해서 죽은 자의 혼과 접촉을 하는 거였어. 아까 고묘지 씨의 교령회 후반부와 똑같은 방법으로 말이야. 토독 토독 하고 물건을 두드리는 듯한 이상한 소리로 혼에게서 들은 말을 전하는 거지. 그런데 나중에 그녀들 중 한 명이 그건 전부 트릭이었다고 고백을 했거든."

‘연구회’란 이름이 붙어 있는 만큼, 우류도 와타나베도 해당 분야에 대한 지식의 양은 상당한데 각자의 입장은 아무래도 다른 모양이었다. 우류가 끝까지 회의적인 자세를 견지하는 데 비해, 와타나베는 비교적 옹호하는 입장에 서고 싶어 한다. 어느 쪽이 이 연구회의 추세를 리드하는 의견인지 가와미나미는 흥미로웠다.

"‘과학적 증명’이라는 개념 자체가 수상한 것이라고 말이에요. 초자연·초과학적인 현상을 기성의 자연과학으로 증명하는 것에 대체 얼마만큼의 의미가 있느냐는 거죠."

"그게 ‘훌로팅 빌Floating bill’이라는 교묘한 마술이란 것을 동아리에 들어가고 한 달쯤 지나 알게 되었죠. 약삭빠른 권유 공작에 그대로 말려든 거죠. 하기야 뭐, 우리 네 명은 원래부터 오컬트에는 관심이 많은 편이니까, 화가 난다고 탈퇴를 하지는 않았지만요."

"10년 전 여름, 학원에서 합숙이 있었다. 이 근처 숲에서 놀다가 여자 아이를 만났다. 그래서 어쨌다는 건지, 어떻게 그 여자 아이가 도와라는 고가 씨의 딸이라고 생각하는지."

"그때는 시계탑도 없었고, 이 건물뿐이었지만……. 숲에서 만난 그 아이를 우리가 이 집까지 데리고 왔어요."
"같이 이 집으로 왔단 말이야?"
"네."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다만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그 남자 아이예요."
"남자 아이? 아아."
‘신관’ 홀에 있었던 그 소년―고가 유키야가 나타난 다음, 사키코와 우류 등이 나눈 대화를 가와미나미는 상기했다.

"누나는 어딨냐고 물었잖아요. 누나라면, 도와를 말하는 거겠죠. 옛날에 죽은 누나를 그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말했어요. 이나미 씨 역시 그 말에 맞춰 응수를 했고."

"여기가 조금 안 좋은 모양이야, 그 남자애."
"여기라뇨?"
가와미나미는 놀라 되물었다.
"머리가 이상한가요?"
"응, 그런 얘기지."

"어떻게 하다가 그렇게 된 거죠? 태어났을 때부터?"
"자세한 것은 나도 잘 모르겠는데 정신 지체아나 뭐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야. 원래는 고가 미치노리 사촌의 아들이었다는데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고가 가문에서 맡게 됐대."
"그럼 양자입니까?"

"14세기 중엽, 프랑스에 샤를 5세란 왕이 있었는데, 파리의 궁전 탑에 시계를 설치하라고 명령을 내렸지. 마침 유럽의 각지에서 탑시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초창기의 일이었어. 그 시계의 문자판에 처음에는 정확하게 로마 숫자로 <IV>가 사용되었는데 그것을 본 왕은 언짢아했어."

"로마 숫자의 <IV>는 <V>에서 <I>을 뺀다는 의미잖아. 그러니까 그렇지. ‘5세의 5에서 1을 빼다니 무슨 짓이냐’라고 말이야. 그래서 억지로 <IIII>로 바꾸게 했다는 거야."

취기가 돌자, 마음 한구석이 현재를 떠나 과거로 과거로 뻗어간다. 그리하여 거기에,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3년 전 사건에 대한 기억이 가로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가와미나미는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지금 시각이 3시 5분이란 것을 확인하고, 가와미나미는 훌쩍 방에서 나왔다.

복도에는 어슴푸레하게 전등이 켜져 있었다. 깔려 있는 빨간 카펫 위로 걷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잠이 완전히 깨지 않아 머리 속은 여전히 몽롱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이 꼬였다.

화장실은 홀에서 북쪽 통로로 나가 오른쪽으로 꺾어진 곳에 있었다. 볼일을 보고 여전히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복도로 나왔을 때, 가와미나미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시계 소리와는 다른 무슨 희미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순간, 심장이 오그라드는 듯한 기분이었다.

가와미나미는 그림자를 쫓아 걷기 시작했다. 뒤를 미행하겠다는 의지가 분명하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졸리고 다리가 휘청거리기는 마찬가지고, 게다가 마비된 의식의 대부분을 자신 이외의 무언가에 점령당한 듯한 그런 기묘한 기분마저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