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의 힘 2 - 지리는 어떻게 나라의 운명을, 세계의 분쟁을, 우리의 선택을 좌우하는가 지리의 힘 2
팀 마샬 지음, 김미선 옮김 / 사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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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속담처럼 인생에는 피할 수 없는 게  두 가지 있다. 

바로 죽음과 세금이라는.

당신들은 시계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탈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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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볼 때 거의 모든 아랍 국가들은 배격해야 할군주제 국가이거나 종교적으로 지나치게 관대하다. 아랍의 국가들은 이를 알고 있는 만큼 그래서 무슬림형제단을 꺼린다. 

1920년대에 이집트에서 창설된 무슬림형제단은 수년 동안 심한 탄압을 받은끝에 아랍의 봄으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축출되고 치러진 2012년 이집트 선거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머쥐었다. 에르도안은 희희낙락했다.

그러던 중 2016년에 터키군이 시리아 북부를 침공했고 2018년과 2019년에 또다시 침공하자 이집트에서는 이 행동을 두고 "아랍이 신오스만주의자들의 새로운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라는 말이 돌았다.

"마비 바탄,
우리는 푸른 바다를 지배할 나라다!"

증거가 부족하긴 하지만 에르도안은 자신의 많은 지지자들이 공공연하게 말하는 것을 넌지시 비췄다. 이 쿠데타는 "미국이 뒤를 받쳐준 거대 음모"라고.

터키 군부 내에서 마비바탄Mavi Valan, 즉 〈푸른 조국>이라는 개념을 지지하는 이들은 대체로 나토회원국이라는 지위를 회의적으로 본다. 그들은 그리스가 동조하는 미국의 책략의 도구가 되는 것은터키가 이 세계에서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로 올라서는 것을 막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당연히 이 입장에 동조할 것이다. 푸른 조국이라는 관념에는 터키가 자신들을 둘러싼 주변 3개 바다인 흑해, 에게해, 동부지중해를 지배할 것이라는 세계관이 담겨 있다. 이 생각을 공공연하게언급하는 이면에는 오스만 제국이 영토를 잃고 오늘날의 터키로 쪼그라들게 만든 로잔조약을 파기하려는 장기적인 전략이 깔려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군사력이 빈약한 그리스는 미국과 유럽에 의존해서 그들의 대리행위를 하고 있다.
모름지기 자신들이 있어야 할 곳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에르도안은 조금은 신중한 태도를 취한다. 그는 터키를 너무 작게 만들어 버린 로잔조약에 비판적입장을 견지하면서, "터키는 서트라키아(그리스 북동부)와 사이프러스, 크림 반도, 그 외 어디서든 우리일족을 외면할 수 없다."라고 천명한다. 터키 정부의 입장을 한마디로 말하면 이렇다. 중립적이어야할 섬들에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정작 로잔조약을 위반한 쪽은 그리스라는 것이다.

에르도안과 푸틴의 브로맨스?

이웃 나라와는 물 전쟁,
국내에서는 쿠르드족과의 전쟁

"우리가 언제 아랍인들이 자기네 석유 가지고 뭘 하는지에 대해 왈가왈부한 적이 있던가. 따라서우리가 우리 물을 가지고 뭘 하든 그들의 의견을 들을 필요는 없다."

물 협정은 터키의 주요한 국내 문제 두 가지가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댐 건설은 일자리 창출과전기 생산, 그리고 용수를 개선해서 지역 경제를 활성화한다는 남동아나톨리아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그런데 문제는 강들의 수원이 쿠르드족의 주 본거지인 아나톨리아 일부 지역에 있다는 것이다.

흔히 쿠르드족을 <나라가 없는 가장 큰 민족>이라고들 한다. 7천5백만 명쯤 되는 인도와 스리랑카의 타밀족을 고려한다면 그 전제는 옳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이 2백 년 가까이 독립 쿠르드국가를 세우기 위한 운동을 해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아나톨리아의 쿠르드족은 오스만제국의 통치자들과 충돌했고 현재도 터키공화국에 지속적으로 저항해 오고 있다.

이제 지난 세기와단절하고 이전의 오스만 제국 시절을 부활시켜 터키공화국이 자신만의 미래를 소유하기 위한 일종의전투 태세 명령이 내려진 셈이다.

민주주의로 가려다 방향을 바꾸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1934년 아타튀르크 대통령이 제정한 법을 뒤집고하지아 소피아 박물관을 원래 용도인 이슬람 사원으로 되돌릴 것이라고 발표했다. 서기 537년 비잔티움 제국 시대에 교회당으로 지어진 이 건축물은 1453년에 이슬람 사원이 되었다. 그러다가 이 건축물이 소프트파워로서 국가에 이익을 가져다줄 것으로 판단한 아타튀르크 대통령이 박물관으로 만들어서 모두에게 개방하고 공통의 종교 역사를 기념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것은 곧 서구 세계를 향한메시지이기도 했다. "문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라는.

"외국인이든 지역 주민이든, 무슬림이든아니든.. 인류애라는 유산을 공유한 하지아 소피아는 보다 진실하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다."

"이는 모든 이슬람 땅에서 우리의 가치와 상징을 대상으로 한 혐오스러운 공격에 대한 대답이다전지전능하신 알라의 도움으로 우리는 이러한 축복받은 길을 내 한몸 희생하여 담대하고 꿋꿋하게 지치지 않고 쉼 없이 걸을 것이다. 우리가 바라마지 않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말이다."

이것을 기념하는 연설에서 에르도안은 오스만/터키 역사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네 개의 전투도 다시 끄집어냈다.

"하지아 소피아의 부활은 바드르로부터 만지케르트까지, 니코폴리스부터 갈리폴리에 이르는 우리역사의 좋은 시절에 대한 충만한 기억을 상징한다."

주사위는 던져졌는가? 나토 동맹국이자 가치 있고 믿을 만한 현대 민주국가로서의 터키는 지난 얘기인가? 거의 그렇다고 봐야 한다.

그들은 AKP 당에도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나 세대가 흐를수록 이 새로운 도심지주민들의 다수는 자유주의적 성향을 띄어가고 있다. 그리하여 이 나라의 가슴과 정신, 세계 안에서자신들의 국가 역할을 둘러싼 양측의 힘겨루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프레너미 frenemy, 
friend와 enemy가 합쳐진 조어로, 한쪽에서는 서로 협력하면서 다른 쪽에서는 경쟁하는 관계

현실 정치에서는 터키가 갖는 가치 때문에 나토가 지난 시절 터키의 군사 독재를 눈감아 주었는데, 만약 에르도안의 권위주의통치가 더욱 강화된다면 미국 대통령의 수사학적 표현도 도전받게 될지 모르겠다.

사헬,
테러와 폭력의 악순환에 시달리는
갈등의 한복판에 있다

"두 강이 만나면, 물이 조용해질 리가 없다."
차드의 속담

사헬이 해안이라면, 사하라는 바다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 해안에서 모래바다를 건너 또 다른 해안, 즉 유럽으로 가려고 한다. 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을 떠나고 싶어 한다. 지난 몇 년 사이에 약 380만 명이나 되는 이곳 사람들이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곳을 향해 삶의 터전을 뜨고 있다.

"우리는 폭력 앞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사막, 낙타, 교역로 그리고 이슬람

산과 강을 따라 국경을 나눴지만
그 산과 강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른다

1884년부터 이듬해까지 열린 저 악명 높은 베를린 회담에서 유럽의 열강들은 아프리카 지도에 멋대로 선을 그어 임의대로 대륙을 쪼갰다. 당시만 해도 유럽인들이 발을 들여놓지 않은 곳들도 있었지만강대국들이 원한 것은 명확했다. 바로 영토와 부였다.

당시 영국 총리였던 솔즈베리 경은 몇 년 뒤에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우리는 산과 강과 호수들을 서로 나누었다. 유일하게 어려웠던 것은 그 산과 강과 호수들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프랑스 육군 장교 폴 불레와 쥘리엥 샤느완은 세네갈에서 시작해서 차드호까지 이어지는 탐험을추진했다. 이 탐험은 프랑스가 확보한 땅을 통합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다. 당시 탐험대는 군인과짐꾼에 포로들까지 섞여 3천 명을 헤아렸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보급품을 얻기가 힘들어졌다.

그러자 그들은 마을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주민들을 강간하거나 살해했다. 프랑스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한 의회 조사를 거부했다. 식민지부의 자체 조사에서도 그 지역에서 자행된 숱한 잔학 행위들과 정책에 관한 질문들은 무시됐다.

국제 테러 단체의 지원을 받는 반군 세력

정부가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느낄 때 다음과 같은 의문이 떠오르는 건 당연하다.
"대체 누굴 위한 정부란 말인가?"

그러므로 대체로 알카에다가 장기적인 목표를 갖고 있다고는 하지만 당장 수도에서 싸우지 못해안달인 사람들을 저지하기는 힘들었다. 나이저강을 건너 바마코까지 간 그들은 결국 루비콘강을 건넌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몇 달 지나지 않아 그들은 훨씬 강한 세력에게 도전을 받는 한편 그들이 통치하려고 한 지역 주민들의 지지도 거의 받지 못하게 되었다. 이슬람법의 극단적인 부분을 지나치게 밀어붙이는 바람에 많은 주민들이 그들에게서 등을 돌린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에도 내전은 계속된다

누가 봐도 이들의 목표는 "나일강에서 대서양에 이르는 지역에서 비이슬람교도를 쫓아내고 그 바쁜와중에 "이슬람과 이슬람교도에 대항하는 시온주의 운동과도 맞서 싸우는 것"이었다.

"반군 민병대는 일시적으로 지역을 장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어떤 지역에 병력을 증강해서 투입합니다. 그러니까 한 12시간 정도 말이죠. 그렇게 해서 정부군의 전초기지를 파괴한 뒤다시 감쪽같이 사라져버리는 거죠."

강대국의 눈치와 부족 갈등 사이에서

강대국의 눈치와 부족 갈등 사이에서

하지만 이런 일에 도사린 위험성을 독일 외교부 산하 시민위기방지위원회 위원장 하이케 틸레는 지적하고 있다. 그는 협력도 중요하지만 "그 활동들에 대한 엑셀 보고서만 주고받는 것"에 그치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가장 가난한 나라의
가장 가난한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저항 운동

기후변화, 사막화, 폭력의 악순환

풍부한 천연자원, 테러리스트들의 돈줄

"서구에서라면 각종 허가서와 증서들만으로도 족히 책꽂이 한 칸은 채울 것이다. 하지만 니제르에서는 누군가에게 삽 한 자루와 일당 2달러만 주면 우라늄을 파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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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터사이클 다이어리

더 공평하고 더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한 번 도전해 볼 만할 것이다.
이제, 살아있는 동안 온 몸으로 보여주었던 
그 강인함과 그 부드러움으로 인해 
내가 너무나 사랑했던 그 사람을 당신들과 
함께 남겨둘 시간이다.
한국의 독자들이여,
즐겁게 읽으시기를!
그리고, 전진!

2004년 가을
알레이다 게바라 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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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유럽에가스를 공급하는 자신들의 독보적인 위치가 위협받게 될까 전전긍긍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중이다. - P239

주권 국가로서 사이프러스는 자국의 영해 주변을 시추할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 - P239

"터키보다는 우리가 더 믿을 만한 파트너다!" - P241

20세기 초 오스만 제국이 제국 내에 거주하는 약 150만 명의기독교계 아르메니아인을 살해와 추방으로 사망케 한 사건을 말한다. 서구권의 학자들은 오스만 정부가 조직적으로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했다는 사실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지만 오스만 제국의뒤를 이은 터키는 이 학살을 공식적으로 부정하면서 국제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 P242

나토 헌장에는 다음과 같은 조항이 있다. "한쪽에대한 공격은 모두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 다만 그 공격의 당사자가 나토 동맹국이라는 것을고려해본 적은 없었다. - P243

미국이 보다 믿을 만한 파트너를 찾고 있는 것을 아는 그리스로서는 자신들이 터키를 대체해 에게해에서 나토의 핵심 멤버라는 위치를 차지하고 싶어 한다.

그리스는 더 이상 영국, 러시아 또는 미국의 것일 필요가 없다. 그리스는 그리스다. 그런데도 또다시 외부 세력에게 이 나라는 중요한 부동산이 되었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그리스인들이 염려하는 것은 제우스, 아폴론, 아프로디테가 살고 있는 올림포스산을 올려다보던 그 시절과 딱히 달라진 것이 없다. 그 사이 신들은 떠났고, 제국들은 왔다 갔고, 동맹도 바뀌었다. 그러나 그리스를 만들었던 그 상수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바로 산과 바다 말이다.

터키,
목 좋은 곳에 자리 잡았지만
친구는 별로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닮았다."
-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터키 초대 대통령)

당신은 아마 터키인들이 원래부터 터키에서 살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안 그런가? 어쨌거나 튀르키예Turkiye라는 말은 <터키 사람들의 땅〉이라는 뜻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니다. 원래 터키인들은 아주 아주 먼 곳, 그러니까 몽골에 있는 알타이 산맥 동쪽에서 왔다. 그리고 현재 모국이 되는 곳으로와서 확실하게 터키라 부르게 되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대단한 여정이었다.

멀리 몽골에서 와 오스만 제국을 세우기까지

터키의 서쪽에서 동쪽까지는 1천6백 킬로미터에 이르며 북쪽에서 남쪽까지는 5백에서 8백 킬로미터 정도다. 또 국토의 약 97퍼센트는 아시아에 속해 있고 그 가운데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나톨리아 고원이다. 오늘날 터키는 그리스, 불가리아,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 8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이들은 일찍이 오스만이 제국 건설을 착수했을 때 만났던 이웃이다.

아이언 게이트, 즉 철문은 카르파티아 산맥이 루마니아를 돌아 불가리아로 가서 발칸 산맥과 만나는 지점이다. 다뉴브강은 이 요충지를 통과해서 좁은 골짜기 사이를 흐르는데 1960년대에 남을 건설하기 전에는 몇 마일씩 퍼져나가는 4개의 협곡을 통해 세찬 급류가 흘러내리는 은근히 무시무시한구간이었다. 

현재 이곳의 물소리는 훨씬 조용해졌지만 철문을 지배하면 확고한 방어 포인트가 되거나 혹은 새로운 무대를 선점할 수 있는 요충지가 될 수 있다. 오스만은 후자를 선택했다.

1915년 갈리폴리전투에서 영국을 패배시킨 것은 터키 건국 역사에 기록될 만한 전공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국을잃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1918년의 휴전 협정에 따라 제국의 수도는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군에게 점령당했고, 결국 1922년 오스만 제국은 해체되었으며 술탄 체제는 폐지됐다. 

이 와중에 터키어를 쓰는 일부 주민들은 새로운 국경  바깥에, 즉 그리스와 사이프러스에 남겨졌다. 마찬가지로 백만명이 넘는 그리스인들은 터키 안에 남겨지게 되었다.

터키공화국의 탄생,
그러나 영 마음이 편치 않은5

1960년, 1971년, 그리고 1980년에 터키에서 군부 쿠데타가 발발했을 때도 나토 동맹국들이 애써 못 본 체했던 것도 터키가 가진 이러한 전략적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국 내 사정에 대한 약간은 어색한 헛기침과 수군거림 속에서도 터키의 지리적 위치는 서방 세력의 마음속에서독보적인 자리를 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은 문민정부가 보편적인 규범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1990년대까지 이어졌다.

게다가 EU 내에 수치화할 수는 없어도 인식 가능한 어느 정도의 편견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터키가 충분히 <유럽답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터키는 새로운 지도자 아래에서 조금씩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의 부활을 꿈꾸지만 친구는 없는

다른 방향이란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과거〉로 눈을 돌리는 것이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이새 지도자는 종교적 민족주의와 신오스만주의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1999년, 공식적으로 세속주의를 추구하는 이 나라에서 다음과 같은 이슬람 시를 읊었다는 이유로 4개월간 구금되기도 했다.
"모스크는 우리의 막사이며, 둥근 지붕은 우리의 투구이며, 첨탑은 총검이며, 신자는 우리의 병사들이다."

"민주주의는 마치 버스를 타는 것과 같다. 일단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에 도착하면 내리면 된다."

이웃 나라들과 끊임없이 충돌하다

그즈음 20년 동안 잘 지내고 있던 터키와 이스라엘 간의 사이가 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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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전쟁, 세계대전 그리고 외부세력의 점령 - P222

"그리스의 진정한 독립이라니, 말도 안 된다. 그리스는 영국이나 러시아 것이 될 수 있겠지만 러시아 것이 될 수는 없으니 영국 것이 될 수밖에." - P223

19세기에 벌어진 열강들의 패권 경쟁에서 주요 목표 중 하나는 지중해 유역에서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 P223

이 시기를 거쳐 20세기로 들어서면서 영국은 아예 그리스라는 나라의〈보호자>로 자처했다. 그 바탕에 깔린 것은 그리스가 아니라 자신들의 제국을 보호하겠다는 저의였겠지만. - P223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이 발발했다. - P223

1913년, 제2차 발칸 전쟁이 개시됐다. - P223

제1차 세계대전은 그리스에게 딜레마를 안겨준다. 자신들의 패를 쥐고 있으면서 그대로 굳히느냐, 아니면 한판 벌여서 더 큰 대박을 터뜨리느나라는. - P224

반면 터키 민족주의자들은 그리스 군대의 출현을 터키 독립전쟁의 시발로 보았다. 1922년 여름, 터키 내부로 꽤 깊숙이 밀고 들어와 있던 그리스군은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 후에 터키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됨)이 지휘하는 터키군에게 밀리면서 허겁지겁 해안지대로 퇴각해야만 했다. 결국 그리스군이 아닌 터키 부대가  스미르나로 입성하면서 전쟁은 끝이 났다.  - P226

불길에 휩싸인 도심에서수만 명이 사망하고 도시는 잿더미가 되었다. 더불어 비잔티움 제국을 재건하려던 그리스의 꿈도한줌의 재가 되고 말았다. - P226

많은 이들이 공산당을 지지하기 시작하면서 궁극적으로 군사 정변과 권위주의 정권이 출현하는빌미를 가져왔다. - P226

그나마 이 나라의 지리 덕분에점령군은 내륙 전체를 지배하진 못했고 그리스는 결사적으로 항전할 수 있었다. - P227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다. 이 전쟁에서 살아남은 테살로니키의유대인들은 겨우 9퍼센트에 불과했다. - P227

내전, 또 내전 - P228

"그리스 군대가 이 나라를 통치하기로 한다." - P229

그리스의 지리와 정세가 이 나라를 EU의 골칫거리인 두 가지 주요 위기의 최선봉에 세운 덕분이었다. - P230

난민, 또 다른 갈등과 분쟁의 시작 - P230

보다 분명한 역사적 근거가 있는 두 나라 간전투는 1071 년 동터키 지방에서 비잔티움의 그리스인들이 셀주크 투르크와 대결했던 만지케르트 전투다. 실제로 셀주크 투르크 전사들이 훨씬복잡하게 구성됐다고는 하지만 이 전투에서 그리스인들이 패하면서 비잔티움이 콘스탄티노플을잃는 길을 열어주었다.  - P234

그리스 사람들은 이 얘기를 할 때마다 그 일 이후로 4백 년에 걸친 터키의점령을 견뎌내야 했다고 말한다. 현대로 들어와서는 그리스 독립전쟁과 1919년부터 1923년까지 벌어진 그리스-터키 간 전쟁이 양측에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 P234

에르도안 대통령이 2019년에 이스탄불 국립국방대학교를 방문해서 에게해절반이 터키 땅으로 그려진 지도 앞에 서서 찍은공식적인 사진도 있다. - P234

6천 개의 섬과 바다를 위한 엄청난 국방비 - P234

"에게해 제도는 그리스에게는 그 섬들에 항공기, 로켓, 기동 타격 부대들을 배치함으로써 아나톨리아 배후지와 지중해 동쪽에 있는 국가들의해안에까지 힘을 과시할 수 있는 무적의 항공모함이나 다름없다. 이것들이 없다면 그리스는 동쪽에서 가해 오는 위협을 쉽게 방어할 수도 없고, 지상으로 상륙하려는 적들에게 취약할 뿐  아니라, 해상봉쇄를 당하기 쉬운 그저 바위투성이 반도에 불과할 뿐이다." - P235

한마디로 군사적으로는 끝장이라는 것이다. - P235

에르도안의 발언 상당부분은 그의 지지 기반이 되는 터키 국내를 의식한 것이라지만 "잘못된역사 흐름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라는 그의 말은 해마다 그리스의 국방비를 늘리도록 하기 위한 로비의 실탄을 제공해 주는 것 못지않게 아테네의 군사 전략가들을 뜬눈으로 지새우게 할 만했다. - P235

사이프러스를 두고 벌이는 위험한 게임
그리스가 여전히 수호자로 자처하고 있는 사이프러스는 전략적 지정학이라는 고속도로의 중간쯤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동부지중해의 주요항로인데 최근에는 천연 가스전까지 잇따라 발견되고 있다.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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