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自由, Ελευθερία
나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운 것이 없다. 
나는 자유다.
Den elpizo tipota.
Den fopumai tipota.
Eimai eleftheros.

- Nikos Kazantzakis‘s Epitaph

King Crimson 의 Epitaph 이 떠오른다.

˝나는 이제 연장을 거두고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것은 두렵거나 지쳤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해가 저물었기 때문이다.˝

- 임종 직전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메모에서

시골의사 박경철.
지금 무얼 하고 계신지 궁금하다.
나보다 훠얼~~씬 더 잘 살고 계시겠지만.
그리스문명 강연도 하시고, 찰스님과 포옹도 하시고 했었는데.
그리스 기행1-문명의 배꼽 그리스 이 나올때 무지 기대했었다. 기뻤다.
이 멋진 책을 앞으로 아홉권이나 더 읽을 수 있으니 말이다.
두번째 권 초고도 마친 상태라 했으니!
기대는 한없이 컸으나, 이 후 출간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 10년이 지났다.
사람일은 알 수 없다 했다.
안타깝기 그지 없다. 😢 😥

문명의 배꼽 그리스 에필로그 p.432
2011년 겨울부터 첫 발을 뗀 이 여행은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이다.
그리스 전체를 횡단하며 발길 닿는 곳에서 시간의 강을 종단하는 이 여행은 펠로폰네소스에서 시작해서 아테네가 속한 아티카(그리스 북부)의 테살로니키 그리고 고대 그리스 권역을 아우르는 마그나 그라이키아 등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그리고 각각의 여행은 제1부 펠로폰네소스 편 세권, 제2부 아티카 편 네 권, 제3부 테살로니키 편 한 권, 제4부 마그나 그라이키아 편 두 권 등 모두 열 권의 책으로 정리할 계획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 제2권의 초고 집필을 마친 상태이다. 짐작건대 2013년 한 해도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여행과 집필의 시간들로 채워질 듯하다. 모쪼록 이 여행이 필자인 나는 물론이거니와 독자 여러분들에게도 의미 있기를 두려운 마음으로 바란다.

박경철님과 오달수님 이미지가 비슷하다.
나만 그런 것인가? 사진 올리고 싶지만 참는다.

King Crimson 의 Epitaph
The wall on which the prophets wrote
Is cracking at the seams
Upon the instruments of death, 
The sunlightbrightly gleam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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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84 하루키, 辺(邊)境近境 中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주머니에 넣어온  헤밍웨이의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를  몇 페이지인가 읽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읽은 기억이 있지만,  우연히 호텔방에서 다시 읽게 되었는데 완전히 넋을 빼앗겼다. 어째서 옛날에는 이  소설의 미덕을 이해하지 못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 무엇인가 다른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p.292, 하루키, 辺(邊)境近境 中
두 잔째 맥주를 마시면서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의 문고본 페이지를 펼쳐서  읽다만 부분을 마저 읽었다. 
잊힌 사람들의 잃어버린 이야기들. 나는 금세 그 세계로 이끌려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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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봉사전문가들이 주기적으로 ‘월경‘을 하기에, 전 보고서에서 언급한 작업일에서 매월5일에서 6일을 감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지 못한 때문임. 남자들 사이에서는 여자들이 월경을 하는 동안 육체관계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널리 퍼진 관습일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서는 피 흘리는 여자와 은밀한 관계를 하면 성불구자가 된다는 미신, 혹은 터부나 과학적 예외가뿌리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기도 함. 따라서 그 기간은 그들이 봉사를제공할 수 없는 상태라고 봐야 함. 이런 모든 이유로 이전의 추정치는 정정해야할 필요가 있음. - P70

A. 초록색은본봉사대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아마존 지역의 아름답고 풍요로운 자연을 상징함. - P73

B. 빨간색은 본 봉사대가 진정시켜줄 우리 신병들과 병사들의 남성적 열정을 상징함. - P74

남자들 사이에서는 여자들이 월경을 하는 동안육체관계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널리 퍼진 관습일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서는 피 흘리는 여자와 은밀한 관계를 하면 성불구자가 된다는미신, 혹은 터부나 과학적 예외가 뿌리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기도 함.

따라서 그 기간은 그들이 봉사를제공할 수 없는 상태라고 봐야 함. 이런 모든 이유로 이전의 추정치는 정정해야할 필요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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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여섯 명의 부하와 함께 한나라 땅을 나섰던 반초가 오랑캐들과의 싸움으로 반평생을 보낸 서역 땅은 숙주에서 서쪽으로 수만 리 떨어져 있었다. 서역 땅에 머물고 있던 반초가 말년에 향수를 견디지 못하고 황제에게 바친 상소문에는 "신은 추호도 주천군까지 가기를 바라지 않으며, 원컨대 살아서 옥문관(玉門關)에 이르기만을"이라고 적혀 있다. 그 옥문관은 이곳에서 서쪽으로 9백 리 지점에 있었다. - P96

이듬해인 명도(明道) 원년(서기 1032년)에서하국왕인 이덕명이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를 대신해 아들 원호가 서하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온화한 성격의 덕명은 재위 기간 중 거란과 송이라는 두 대국 사이에 끼어 그들을 자극하지 않으며 형세를 살피는 정책을 취한 결과, 당시 한창 성장 과정에 있던 서하를 별다른 대과 없이 다스런 인물이었다. - P104

아들 원호는 부친과는 달리 매사에 적극적이었다. 송이나 거란에 대한 정책을 놓고 걸핏하면 부친과 대립했다. 일찍부터 아버지에게서 병권을 넘겨받아 풍부한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더구나 수많은 전투에서 속속 승리를 거두며 양주와 감주, 숙주를 평정한 덕분에 이제는 그 어떤 전투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원호는 평소 서하인은 고유의 풍속에 따라 생활해야 한다는 지론의 소유자로, 송나라 조정이 내려준 비단 용포를 입은 아버지 덕명에게 불가함을 주장했다는 일화도 있었다.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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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84)는 3세 때 부터 글을 깨치고 8세 때는 화석정(花石亭) 에서 팔세부시(八歲賦詩)를 한 천재였다.  13세에 진사 초시에 장원급제한 이후 15세에는 다른 사람에게 배울 게 없다며 스승 없이 조광조를 사숙하다가 백인걸 문하에 들어가우계 성혼을 만나 평생지기가 되었다. 16세 (1551)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나자 3년 동안묘막 생활을 하면서 삶과 죽음의 문제를 고뇌하며 불교 서적을 읽고 흥미를  느껴서 모친의 삼년상을 마친 뒤엔 금강산 마하연에 들어가 석담(石潭)이라는 법명을
얻고 승려 생활을 했다. 그때 율곡의 나이는 불과19세였다. - P460

그러나 1년 뒤 결국 불교나 유학이나 도를 찾아가는 것은 매한가지라며 "솔개 날고 물고기 뛰는 이치는 위나 아래나 같은 것/이는 색(色)도아니요 공(空)도 아니라네" 라는  연비어약(鳶飛魚躍)이라는 시를 짓고 하산했다.  20세(1555)에 하산해서는 다시 성리학에 열중해 23세 때 58세의 퇴계 이황을 찾아가서 물음을 구하기도 했다. 이때 퇴계는 율곡이 불교에서 과감히 벗어나 유교로 되돌아온 용기를 높이 평가하며 다음과같은 글을 주었다.

마음가짐에 있어서는 속이지 않는 것이 귀하고,
벼슬에 나아가서는 일 만들기를좋아함을 경계해야 한다.
持心貴在不欺
入朝當戒喜事 - P460

퇴계를 만난 바로 그해 겨울 율곡은 생원시 별시(別試)에서 장원했고 29세(1564)에는 식년문과에서 장원급제했다. 이로써 율곡은 13세 이후 모두 9번 장원으로 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후 호조좌랑으로 벼슬길에 올라 대사간을 몇 번이나 지내며 경륜을 펼쳤고 한때는 파주 율곡으로 물러나 학문에 열중하기도 하다가49세(1584)에 세상을 떠났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피란길에 한탄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는데 오늘날 우리는 5천원 권 지폐에 그의초상을 담아 기리고 있다. - P461

율곡 이후에 배향된 이들은 모두 율곡학파의 노론계 학자였다. 김장생과 조헌은 율곡의 제자였고, 김집은 김장생의 아들이자 율곡의 사위였으며, 송시열과 송준길은 김장생의 제자이자 김집의 제자였다. 박세채역시 김집의 제자였다. - P462

탁영 김일손과 남명 조식을 비롯한 영남학파 학자와 퇴계학파의 학봉김성일, 서애 유성룡,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 우 정경세 등은 문묘 배향이 추진되었으나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 P462

"천리마 꼬리를 잡고 가는 파리도 천리를 간다." - P464

안회는 비록 독실하게 공부하기도 했지만 공자라는 천리마 꼬리를붙잡았기 때문에 그 덕행이 더욱 드러났다.
여기서 사마천이 천리마 꼬리에다 비유한 것에 대해서는 당나라사마정이 『사기』의 주석으로 쓴 『색은(隱)』을 보면 ‘기미창승(驥尾蒼蠅)‘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기미‘는 천리마 꼬리고 ‘장승‘은 파리다.
파리가 천리마 꼬리를 잡으면 천리를 간다. 
蒼蠅附驥尾而致千里 - P465

이것을 속되게 풀이하자면 실력 없는 자는 천리마 꼬리라도 붙잡고같이 가는 수밖에 없다는 인생의 한 처세술일 수도 있다. 이는 첫째 뒤통수만 보고 달리면 둘째는 될 수 있다는 상업적 ·외교적 기술보다 한수위다. 실력이 없으면 천리마 꼬리를 잡는 것이 상책이 아닐 수 없다. - P465

大小人員 過此者 皆下馬
크건 작건 이곳을 지나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 - P476

성균관 답사를 이 하마비에서 시작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 곁에 있는 영조대왕의 탕평비(蕩)에서 답사를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영조 18년(1742)에 세운 이 탕평비에는 영조가 「논어」 「위정편(爲政篇)」에나오는  말을 풀어서 친필로 쓴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주이불비 내군자지공심)
두루 아우르고 치우치지 않는것은 군자의 공적인 마음이요,
比而弗周 寔小人之私
(비이불주식소인지사의)
치우치고 두루 아우르지 못하는 것은 곧 소인의 사사로운 생각이다. - P476

‘탕평‘이라는 말은 『서경』 「홍범(洪範篇)」에 실린  이상적인 정치를펴기 위한 9가지 규범 중 다섯번째에 나오는 말이다.

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

치우침이 없으면 왕도가 탕탕하고 평평하다. - P476

영·정조시대의 문예부흥을 기리며
탕평비 앞에 서면 영조대왕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일어난다. 누가 뭐래도 영조는 80여 평생을 나라와 백성을 위해 온몸을 바쳤다. 창경궁 흥화문 앞으로 나아가 백성들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고 그 여론의 힘으로 균역법(均役法)을 강력히 추진했으며, 정신병 탓에 사람  죽이기를 일삼는 사도세자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어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아비로서 슬픈 결단을 내리는 등 평생을 탕평치국에 바쳤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 손자(정조)에게 효(孝孫)이라는 도장을 새겨주면서  유세손서(諭世孫書)에 이렇게 당부를 남겼다. - P479

아! 해동 300년 우리 조선왕조는 83세 임금이 25세 손자에게 의지한다. (…) 아! 내 손자야! 할아버지의 뜻을 체득하여 밤낮으로 두려워하고 삼가서 우리 300년 종묘사직을 보존할지어다. - P479

정조는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나라를 안정시킴에 온 정성을 다했다. 규장각을 세워 학자를 곁에 두고 국정을 운영했다. 정조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술잔을 내려주면서 "100리 가는 사람이 90리를 반쯤으로 생각하듯이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고 격려하기도 했다. - P479

인재를 씀에 있어서는 만천명월주인옹 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에서 냇물이 만 개여도 거기에 비친 달은 하나인바 물이 흐르면 달도 함께흐르고, 물이 멎으면 달도 함께 멎고, 물이 거슬러 올라가면 달도 함께 거슬러  올라가고, 물이 소용돌이치면 달도 함께 소용돌이치며 달이 각기그 형태에 따라 비추듯이 사람들은 각자의 얼굴과 기량에 맞게 대하는것이 군주의 자세라고 했다. - P480

정조가 이처럼 사람을 아꼈기 때문에 이 시대엔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면서 문예부흥을 이루었다. 정치에서 번암 채제공, 문학에서 연암 박지원, 사상에선 다산 정약용, 미술에선 단원 김홍도가 나왔다. 번암과 연암과 다산과 단원이 위대하다면 이들을 낳은 정조시대도 위대한 것이다.
이리하여 영조시대에 일어난 문예부흥은 정조시대로 이어졌다. - P480

어떤 세상이 좋은 세상이냐고 물으면 태평성대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데 역사상 그런 시대는 없었다. 까마득한 옛날, 증명되지도 않는 요순시대라고 상상할 뿐이다. 그래서 문화사가들은 태평성대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 대신 한 시대의 치세를 칭송하는 최대의 찬사는 ‘문예부흥기‘다. 서양 역사에서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동양 역사에서는18세기 청나라 강희·옹정·건륭 연간이 문예부흥기라는 명예를 갖고 있다. 문예부흥기의 국정철학은 ‘경국제민(經國濟民) 문화보국(文化保國)‘
여덟 글자로 요약된다. 즉 나라를 다스리면서 백성을 구제하고 문화로서나라를 지키는 것이다. - P480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8세기 3분기 석굴암·불국사·에밀레종으로 상징되는 신라 경덕왕 때, 12세기 2분기 고려청자의 전성기인 고려 인종때, 15세기 2분기 한글을 창제하고 종묘제례악을 정비한 세종대왕 때,
그리고 18세기 후반기 영·정조시대가 문예부흥기였다 - P480

돌이켜보건대 우리 역사상 네 차례 나타난 문예부흥기는 영·정조시대 이후 20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도록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는 세계를 놀라게 한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루어냈다. 그것을 어떻게 문예부흥기로 승화시킬 것이냐가 우리 시대의 과제인데 나는 영조시대의 예술적 성취를 정조시대가 이어간 모습에서 그 해답의실마리를 읽어본다. - P481

영·정조시대 회화에 등장한 진경산수·풍속화·문인화라는 새로운3대 장르는 영조시대에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관아재 조영석, 능호관이인상 등 양반 출신의 지식인 화가들이 선구적으로 개척한 것을 정조시대에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고송 이인문 등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 출신의 전문화가들이 발전시킨 것이다. 그래서 영조시대 그림에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예술적  고뇌가 서린 내용상의 깊이가 있고 정조시대 그림엔 정교한 테크닉이 두드러지는 형식상의 완결미가 돋보인다. - P481

이를 비약해서 말하자면 의식 있는 지식인들이 제시한 진보적 내용을 능력 있는 테크노크라트(technocrat, 기술관료들이 형식으로 구현해낸 것이었다. 지난 세월 우리가 쌓아온 값진 경험을 토대로 이제 능력있는 진정한 엑스퍼트(expert, 전문가)들이 경국제민과 문화보국의 자세로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게 된다면 혹 후세 사람들이 우리가 살던 이 시기를 문예부흥기였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영광과 사명이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 P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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