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로드‘란?
1919년 4월 11일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상하이를 시작으로, 광복을 맞이한 중국 충칭까지 이어갔던 26년 발자취를 일컫는 말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정‘과 길을 뜻하는 ‘로드road‘를합쳐 ‘임정로드‘라 이름 지었다. 더 많은 청년이 독립을 염원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귀한 발걸음을좇아 함께 떠났으면 한다. 직접 가보면 안다. 우리나라가 어떻게 탄생했고, 어떻게 이어졌는지.

대한민국 100년,
상하이에서 춤침까지
임시정부 투어가이드

김종훈·김혜주·정교진·최한솔 지음

임시정부의 뿌리를 찾는 것,
인간으로서 누려야할 삶의 의미

표창원(20대 국회의원) - P4

우리 부모 세대의 투쟁을 널리 알리는
신호탄이 되어주길

차영조(독립운동가 차리석 선생 후손/효창원 7위선열 기념사업회장) - P4

임정의 과거는
우리의 미래가 될 수 있습니다.

김태빈
(한성여고 교사/<그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저) - P6

중국 남부로 떠나는 네 청년에게 부채를 선물했습니다. 백범이 몸을 피했던 자싱 재청별서에서 본 김신 선생의 글을 적었습니다. 
飮水思源(음수사원, 물을 바시며 그 근원을 생각한다)  임정에 대해 대한민국 청년이 잊지 않았으면 하는 뜻에서입니다. - P7

상하이 서금2로, ‘대한민국‘이 탄생한 그 거리 - P7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 P7

임정로드 4,000km
우리가 잘 몰랐던 진짜 역사를 찾아서 - P14

"헛헛하다."
헛헛하다는 말은 ‘채워지지 아니한 허전한 느낌이 있다‘는 뜻이다. - P14

다행인 점은 2018년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9주년기념식에서 이낙연 국무총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일이 4월 13일 오늘이 아니라 국호와 임시헌장을 제정하고 내각을 구성한 4월 11일이므로바로잡아야 한다‘며 ‘법령 개정을 거쳐 내년부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을 4월 11일로 수정해 기념하겠다‘고 밝혔다. - P15

대한민국의 청년들이여, 임정을 찾아 떠나자! - P15

중국은 어느 역에 가도 사람이 정말 많다. 기차역도 공항에 간다는 생각으로 서둘러 준비하고, 미리 이동해야 한다. 여권과 함께, 예약한 내역을 다시 티켓으로 교환해야 승차할 수 있다. 그래서 표를 받는 데만 30분 이상 걸릴 때가 많다. - P26

충칭 연화지 청사 백범의 계단에서 사진 찍기 등 특별한 이벤트를 고려해 좋은 옷가지 하나 정도는 따로 준비하자. 가장 감격적인 순간, 미리 준비한 좋은 옷을 입으면 감동이 배가 된다. 태극기 역시 마찬가지다. 임정이 걸어온 길을 마주할수록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애국심이 차오른다. ‘대한민국이 어느 날 갑자기 탄생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길어질수록 태극기가 다르게 느껴지는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깨끗한 태극기 하나 준비하자. 어쩌면 매 순간 태극기 들고 사진 찍는 나를 발견할지 모른다. - P30

 사전준비 당일코스 
서울에서 만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 P33

오전. 효창운동장 - 백범김구기념관 - 김구선생 묘 -삼의사묘-반공투사위령탑-의열사-임정 요인 묘
오후. 식민지역사박물관-(이동)-경교장 - P33

1 상하이 집중 3박 4일 코스 : 대한민국 탄생의 비밀 - P34

2 상하이, 자신, 항저우 5박 6일 코스 : 스물다섯 청년 윤봉길이 독립에 끼친 영향 - P35

3 상하이, 자싱, 항저우, 난징 7박 8일 : 난징에서 만난 독립운동 양대 거두 - P36

4 창사, 광저우, 류저우, 구이린(계림), 충칭까지 8박 9일 내륙 집중코스:피난의 대장정은 시작됐다 - P37

5 충칭집중 3박 4일 코스 : 충칭에서 외쳐보는 ‘대한 독립 만세‘ - P39

6 상하이, 자싱, 항저우, 난징, 창사, 광저우, 류저우, 구이린, 충칭 16박 17일임정로드 완전정복 : 임정로드 중국 횡단여행 - P40

일본번외편 스물다섯 청년 윤봉길의 마지막 한 달 - P42

김구 선생이 해방을 맞이한 조국으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하나 있었다. 1932년 4월 29일 홍커우 의거를 일으킨 뒤, 그해 12월 일본에서 순국한 스물다섯 청년 윤봉길의 유해수습이었다. 윤봉길 의사는 의거 이후 11월에 일본 오사카로 끌려갔고한 달 동안 오사카성 형무소에 구금당한 뒤 생의 마지막 밤은 가나자와성에서 보냈다. 정확한 장소는 가나자와시 외곽육군작업장, 윤 의사는 거기서 미간에 총을 맞고 순국했다. 1932년 12월 19일이다. 스물다섯 나이에 독립운동의 역사를 바꾼 인물,
그의 마지막 흔적을 좇아 오사카와 가나자와를 돌았다. 놀라운 점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유명 관광지가 윤 의사의 마지막 흔적이 남은 장소였다는 사실이다. 특히 교토에서는 우리가 잘 몰랐던 윤봉길과 윤동주와 송몽규의 인연까지 확인할 수있었던 귀한 시간이었다. 꽉 채운 3박 4일 일정으로 구성했다. - P42

윤 의사가 거사 전에남긴 문구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장부는 거사를 위해 집을 나가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이 새겨진 비석도 암장지 터 한편에 세워졌다. - P314

가나자와 시장이었던 야마데 다모쓰의 묵인 때문에  가능했다고 전해진다. 야마데 시장은 ‘역사적 책임을 무겁게 여기는 사람으로 윤 의사에 대한 일제의 만행에 책임을 통감했다‘고 한다. - P315

최근에는 가나자와 지역 시의원인 모리 가츠토시 의원(일본 사회민주당)도 주목해야 한다. 그는 한국 청년들이 단체 방문을 할 때마다 윤 의사의 암장지를 찾아 ‘진정한 의미의 과거 청산은 아직도 과정에 놓여있다‘며 ‘과거
침략전쟁을 일으켰던 일본군은 ‘침략군‘으로 불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우리 조상들이 당신들의 조상에게 험난한 경험을 하게 한 점에 대해죄송하게 생각한다‘고 사과까지 했다. 일본 정치인에게 직접 듣는 진솔한사과, 이들의 노력 덕분에 지금까지 윤 의사의 암장지가 더 기억되고 유지되는 것은 아닐까. - P316

조명하 의사의 그 날을 생각해도 좋다. 의사는 죽음의 순간 "나는 삼한의 원수를 갚았노라. 아무 할 말은 없다.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각오하고있었다. 다만 조국광복을 못 본체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계속하리라"라고 외쳤다. 참고로 조명하 의사의 의거지는타이중 도서관 앞이다. 조 의사는 1928년 5월 14일 오전 9시 50분경 이곳에서 일왕의 장인이자 육군 대장인 구니노미야에게 단도를 던졌다. 지금은금융기관인 합작금고合作타이중 지점 건물이다. - P338

"나는 가겠소. 여러분들 임시정부를 잘 간직하고, 삼천만 동포를위하여 힘쓰시오." - P97

일곱 시를 치는 종소리가 들리자, 윤봉길은 자기 시계를 꺼내 내게 주며 내 시계와 바꾸자고 청했다. 그러면서 ‘제 시계는 어제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 따라 6원 주고 산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지 않습니까? 제게는 이제 한 시간밖에 소용이 없는 물건입니다‘ - P109

"임시정부의 내일은 곧 군주제의 청산이며, 민주화의 새 출발을기약함에 있습니다. 대통령을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전진하고대동단결 합시다." - P158

水光激濫晴方好(수광염염청방호)
물빛이 반짝반짝하니 날이 개어 참 좋구나
山色溶濛雨亦奇(산색공몽우기)
산색이 몽롱하니 비가 와도 또한 좋다
慾把西湖比西子(욕파서호비서자)
서호를 서시(중국 4대 미녀)에 비유하면 어떨까
淡粧濃抹總相宜(담장농말총상의)
얇게 화장을 해도 짙게 화장을 해도 항상 어울리는구나 - P160

"해방된 조국을 향해 상하이 부두를 떠날 때를 빼고 나면 웃는 낯으로 발길을 떼어 본 기억이 드물다. 이사가 끝나면 주위 사람들에게 한 번쯤 연락해서 새집 주소라도 알려야겠다. 이미 갈 사람은 다 가고 이제 세상에 몇 되지 않은 동지들인데 연락마저 끊고지내기란 못할 일이다." - P215

"광복군은 서안과 부양에서 미군과 함께 비밀훈련을 하였다. 3개월 동안 요원들을 조선으로 밀파할 훈련을 마쳤을 때, 나는 미국비행기를 타고 서안으로 가서 OSS 국장 도노반 장군과 공작을협의했다. 도노반 장군은 ‘오늘 이 시간부터 아메리카합중국과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적, 일본에 항거하는 비밀공작이 시작되었다‘고 정중하게 선언했다." - P224

"왜적이 항복한답니다! 내게 이 말은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노력한 참전 준비가모두 헛일이 되고말았다. 서안 훈련소와 부양 훈련소에서 훈련받던 우리 청년들을 미국 잠수함에태워본국으로 침투시킨 후조직적으로 공작하게 하려고 미 육군성과 긴밀히 합작했는데, 한번도 실행해 보지 못하고 일본이 항복하였으니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됐다." - P27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임정로드‘란?
1919년 4월 11일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상하이를 시작으로, 광복을 맞이한 중국 충칭까지 이어갔던 26년 발자취를 일컫는 말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정‘과 길을 뜻하는 ‘로드road‘를합쳐 ‘임정로드‘라 이름 지었다. 더 많은 청년이 독립을 염원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귀한 발걸음을좇아 함께 떠났으면 한다. 직접 가보면 안다. 우리나라가 어떻게 탄생했고, 어떻게 이어졌는지.

-책 앞날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집에서 쓴 돈만 모아도 진짜 바르셀로나에 몇 번은 오갈 수 있었을 테지만, 난 망원동 바르셀로나에 오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졸인다’와 ‘조린다’는 비슷한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마음을 졸이고, 그 기다림 속에서 일어나는 노력은 양념이 되어 결국에는 제맛을 낼 테니까.

전세 계약 갱신 시기가 돌아왔을 때 나는 세입자의 설움보다는 술꾼의 즐거움을 음절 단위로 꾹꾹 눌러 다시 한번 말했다.

"무조건 망원동이야."

술집은 잊고 사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잊기 위해서 마실 때도 있고 잊어야 할 만큼 마실 때도 있다. 잊다가 잃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알코올이 다량으로 함유된 보통의 술자리는 어쩔 수 없이 휘발성이다.

"그럴 거였으면 시작하지도 않았어."

"라면 먹고 갈래?"

연인 사이에 통용되는 문장으로, 우리 집에 가서 좋은 시간 보내자는 의미를 담아 은근하게 건네는 말이다(요즘은 "넷플릭스 보고 갈래?"로 바뀌었다고 한다).

우습게도 나는 매번 라면을 끓였다.

나이가 많다고 어른스러운 게 아니라는 것도 나중에 직접 나이 먹고 나서야 알게 된 진실.

나는 뭘 그런 새끼들을 집에까지 불러서 라면을 끓여 먹였을까.

내 명의의 집도 아니고 내 취향이래 봤자 먼지처럼 흩뿌려져 있을 뿐인 공간에서, 나의 무엇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길래. 분식집 차릴 것도 아닌데 라면 좀 못 끓이면 어때. 사랑이 라면 국물도 아닌데 좀 식으면 어때. 스스로를 추락시키고 누군가가 사랑의 힘으로 끌어올려 주길 바라던 시절이여, 이젠 안녕. 이불킥으로 하체를 단련하던 시절도, 이젠 안녕.

충무로의 양미옥, 신촌의 황소곱창, 숙대 입구의 굴다리소곱창, 부산역 앞 백화양곱창, 해운대의 해성막창집

정글 같은 광고 회사에서 살아남고 싶다면 인간의 탈을 벗어야 한다! 개처럼 일하고, 소처럼 벌어들이고, 말처럼 달려나가고, 토끼처럼 눈치를 살피고, 뱀처럼 빠져나가야 한다.

회사 일이라는 게 괜히 술 당기는 게 아니며, 괜히 회식 자리가 빈번하게 생기는 게 아니다. 인생의 매운맛을 보여주겠다고 작정한 것 같은 일을 함께 겪고 나면 속이 바짝바짝 마르기 마련이니까.

(술을 좋아한다고 해서 모든 술자리를 좋아한다고 생각한다면 대단한 오해입니다. 그런데 저는 좋아하긴 합니다. 많이많이 찾아주세요)

심지어 적당량의 알코올은 창의성에 몹시 도움된답니다. 미국 일리노이주립대 제니퍼 와일리 교수는 창의적인 문제를 푸는 데 가장 뛰어난 것으로 혈중 알코올 농도 0.075%를 제시하기도 했죠.

일본에선 일을 빨리 끝내는 것보다는 적당히 농땡이 치며 정해진 기간 안에 끝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일본에선 일을 빨리 끝내는 것보다는 적당히 농땡이 치며 정해진 기간 안에 끝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일하기 위해 살지 말고, 살기 위해 일하자. 살아남으면 지독하단 얘길 듣고 나가떨어지면 나약하단 얘길 듣겠지만, 우리 어떤 모습이든 간에 같이 살아 있자.

소맥을 기가 막히게 마는 그때의 ‘걔’와 결혼해서 살고 있는 지금, 나는 확신한다. 지구가 나 모르게 돌고 있듯이 나 역시도 돌아버린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50미터의 한라산 정상을 본 기억은 있지만, 21도의 한라산은 도무지 정복해본 적이 없다. 정상에 올라간 것은 분명할 텐데, 하산의 과정이 도무지 생각나질 않기 때문이다. 등반 후의 숙취도 만만찮다. 하지만 두 한라산 중 선택하라면 역시 마시는 쪽이다.

술집에서 시작되는 한라산 등반이라면 언제든 오를 준비가 되어 있다. 몸은 아니지만 마음만큼은 프로 산악인이니까!

이때까지 정답은 ‘바른 답’이 아니라 ‘정해진 답’에 가까웠는데, 앞으로 난 어떤 답을 써내야 할까. 왜 당장 절실하게 하고 싶은 게 없는 거지?

"사주로 큰 테두리는 알려줄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안에서 어떻게 할지는 결국 본인의 선택입니다."

내가 가진 식재료가 뭔지는 알려줄 수 있지만, 그걸 볶아 먹든 튀겨 먹든 전적으로 내 몫이란 소리였다. 맥이 탁 풀렸다.

"제일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아무래도 위험하죠."

(그는 라가불린 8년을 ‘솜씨 좋은 아줌마가 무친 겉절이같은 맛’이라고 표현하는 사람이다. 어떤 술이든 그의 말을 거치면 더 맛있어진다)

1962년…? 부모님 연배 수준의 위스키를 우리가 이렇게 버릇없이 마구잡이로 마셔도 되는 걸까요…?

나는 늘 백팩을 메고 다녔다. 가방 안엔 언제 어디서 쓰러져도 출근할 수 있도록 여벌의 속옷과 셔츠가 두 벌씩 있었고 화장을 지워야 할 경우를 대비하여 화장솜, 클렌저, 면봉까지 들어 있었다. 술을 계속해서 마실 수 있게 하는 월급에 대한 집착과 최소한의 사회적 체면 유지를 위한 노력이 묻어나는 아이템들을 짊어지고 광역버스를 타면 언제나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여독이, 간에 쌓인 독이 안 풀린다는 게 문제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갖지 못한 과거를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술 한 잔에 털어버리자고 계속해서 다짐한다. 내 것이 아닌 과거보다는 눈앞의 소주와 돼지갈비가 더 좋으니까.

경상도 집에서 꿋꿋하게 자라나 경상도집에서 미친 듯이 취해본 K-장녀란 이 정도 고집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얗던 얼굴이 새빨개진 채 "쟤가 그럴 리 없다"고 하던 내 첫사랑이여, 그럴 리 없기는 뭐가 없어. 나는 울컥해서 첫사랑을 한 대 쳐서 울려버렸다.

보통의 해장은 술의 흔적을 지우는 데만 급급하지만, 진정한 해장은 술을 다시 원하게 만든다. 술이 있어야 해장도 할 수 있고, 해장을 해야 술도 다시 마실 수 있는 법이니까. 이것이 가능할 때, 주정뱅이들은 현실에서 탈출해 2차원의 이상향으로 진입한다. 한 면은 음주, 다른 한 면은 해장이라고 쓰인 뫼비우스의 띠다.

아아. 그곳은 칼국숫집이었으나 제게는 칼국술집이었습니다.

한라산을 좋아한다. 오를 수 있는 한라산이 아니라 마실 수 있는 한라산 쪽이다.

투명하게 비치는 병에 담긴 소주는 한라산 백록담까진 아니어도 그 언저리의 기운 정도는 담긴 영험한 약수 같다. 괜히 신선하게 느껴지는 기분은 덤이다.

한라산이 맛있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한라산을 팔 것.

둘째, 제주도와 관련된 안주를 팔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