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귓가를 스치는 서간도 벌판의 바람소리를 들으며 지나온 구십 평생 되돌아봐도 여한은 없다. 그저 하루하루 연명한 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다. 고달픈 발자국이었긴 하나 큰일 하신 어른들 생각하면 오히려 부끄러울 뿐이다. 그 대신머지않아 여러 영령들 뵈옵고 이토록 살기 좋은 세상이 된 것을 말씀드릴 생각하면 마음뿌듯하다. 선열들의 피 흘린 노력의 보람을 오늘 이 나라의 성공에서 찾을 수 있으시겠지.
- 허은 여사 회고의 말 중에서

올해는 경술국치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고난과 극복으로 점철된 우리 근현대사를되새겨보게 하는 시점에 뜻 깊은 책을 간행하게 되어 연구소로서도 보람이 크다.
이 책이 독립운동을 폄하하고 일제의 식민지배를 미화하는 등 사회 일각에서 자행되고있는 역사왜곡을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개정판을 펴내며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포 여러분은 만보산에 있는 이백 명 동포의 생명이 위경에 든것처럼 생각하고, 또 어떤 악의를 가진 자의 생각인지는 모르게니와, 그 이백 명 동포가 학살을 당한 것처럼 아는 이도 있는 모양이나, 이것은 전혀 무근지설입니다. 무뢰배의 유언비어입니다." - P112

"이 ‘임정로드‘ 프로젝트는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상하이에서 난징, 광저우, 류저우를 거쳐 충칭에 이르는 임시정부의 흔적 4000km를 따라가 보는 것입니다. 돌아보면 이 길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만 12차례, 총 30차례 가까이 옮겨야 했던 이유는 일제에 쫓겼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방 한 칸 살 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 P114

"처음부터 길이었던 길은 없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하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마치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 길은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으면 길이 되는 것이다."
- 루쉰 - P114

혁명열사기념탑
 1927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위증민은 동북 지역에서 항일투쟁을 이끌었다.
강행군 속에 병을 얻었지만 굴하지 않고 활동하던 그는 불과 32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중국에서는 항일 열사로 추앙받는 인물이며 김일성도 항일 유격대에서 활동한 그의 수하였다. - P120

박재혁 의사 
박재혁 의사는 의열단 1차 의거의 실패 원흉인 당시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 슈헤이를 제거하는 의거를 성공시켰다. 위쪽 사진의 왼편이 박재혁 의사로 일제에 의해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왜놈의 손에 죽을 수 없다며 스스로 단식해 순국했다. - P134

"可期許多收益(가기허다수익) 
不可期再見君顏(불가기재견군안)" 
"수익은 기약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대 얼굴은 다시 보기 어려울 것 같소." - P135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다." - P139

상남자 김익상이 그립다,
조선총독부 폭탄 의거 주인공
"쓸데없는 소리 말게. 일주일이면 넉넉히 성공해 돌아올 것이니술상이나 차려놓고 기다리게." - P14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직까지 정확히 정리되지 않았으나 몇 년 전에 밀양초등교에서 나온 자료에서 3월 14일로 나왔으니 맞는 듯도 합니다, 당시가 제대로 된 호적도 없던 시절이라 그것 역시도 정확한지 알수가 없지요" - P72

박차정 지사의 묘
약산 김원봉 장군의 처박자정 여사의 묘라고 쓰여 있지만, 약산의 아내이기 전에 그 역시 당당한 독립운동가였고 애국지사였음을 기억하자. - P75

"약산, 우리 국내로 돌아가 독립운동을 함께 하자." - P94

의열단 창립지 지금은 아무 흔적도 찾을 수 없지만, 그래도 저 자리에서 의열단이 탄생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말없이 그들을 생각하며 하얀 국화를 올려드렸다. - P99

<의열단 공약 10조〉
1. 천하의 정의를 맹렬히 실행한다.
2.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해 신명을 희생한다.
3.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히 자라야 의열단원이 된다.
4.우선하고, 단원의 의도 급히 실행한다.
5. 의백 일인을 선출해 단체를 대표케 한다.
6.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매월 일차식 사정을 보고한다.
7.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초회(부름)에 반드시 응답한다.
8. 피사被死(죽임을 당함, 함부로 죽음) 아니하며  단의에 전력을 다한다.
9. 하나가 아홉을 위하여 아홉이 하나를 위해 헌신한다.
10. 단의團義를 배반한 자는 척살한다. - P100

의열단 창립지 찾아가는 법 주소가 정확하다. 지린역에서 택시로 10분정도 걸리는 거리이고 찾기도 쉽다. 필자의 경우는 근처에 숙소를 잡아서 이동했다. 창립지를 중심으로 안창호 선생이 구금됐던 길림 감옥,
뒤에서 살펴볼 만보산사건 발생지, 손정도 목사 교회 터 모두 가깝다. - P104

약산의 휘호 
‘신국가는 신청년이 건립할 것이오, 신청년은 신사상이 확구한 자를 의미함이라.‘라고 씌여 있다. 약산 스스로 청년 시절부터 의열 정신이 투철했기에 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 P109

지린에서 약산이 남긴 공식적인 흔적은 의열단 창립지뿐이다. 1920년 초에 진행된 1차 암살파괴 계획까지 지린시 의열단 본부에서 준비하고 진행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정확히 어디에서 어떻게 진행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약산이 지린을 떠난 이후에도 직간접적으로 약산과 의열단이 남긴 지린에서의 흔적들을 찾아 나섰다. 길게 보면 이 책을 통해 지린을 방문할 수많은 청년들이 우리가 잘 몰랐던 약산과 독립운동가들의 흔적들을 찾아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이어언급할 조선일보 김이삼 기자의 암살지와 지사들이 활동했던 북산공원을 넣은 이유이기도 하다. - P1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 고흐는 1889년 12월과 1890년 1월에 (당시에는 간질로 진단받은 심각한 발작을 일으키지만 겨울 내내 작업을 계속한다. 그리고 브뤼셀에서 열린 그룹 전시회에도 더 많은 그림을 출품해 비평가들로부터 큰 갈채를 받는다. 누군가 이 그림들 중 한 점을 구입하기까지 하는데, 이것은 고흐가 살아 있는 동안 처음으로 팔린 작품이었다. - P353

5월 말에는 다시 거처를 옮겨 북쪽지방에 위치한 오베르로 가는데, 가는 도중에 파리에 들러 제수와 조카를 만난다.
오베르에서는 예술가들의 신경 질환을 연구해온 동종요법 외과의사인 폴 가셰의 치료를 받는다. 아마추어 화가였던가세와 고흐는 긴밀한 우정을 쌓아간다. 몇 차례 발작을 더 겪는 와중에도 고흐는 의사의 치료를 잘 따르는 것처럼보인다. 자신의 예술에 대한 고흐의 헌신은 여전했는데, 이것은 보다 큰 화폭의 몇몇 새로운 작품에서 드러난다. - P353

오베르에 머무르던 70일 동안 고흐는 70여 점의 그림을 그린다. 창조적인 에너지의 놀라운 발산이었다. 남쪽지방에서 보여주었던 밝은 색조 및 화려한 톤과는 대조적으로 오베르의 풍경화들은 보다 시원한 푸른색과 보라색이 지배적이다. 동시에 초상화에서는 더욱 과감한 색채를 사용한다. 절박한 심정으로 작업을 해나간 이 시기 내내 그의붓질은 계속 원기 왕성한 테크닉을 과시한다. - P353

동생에게 보내는 고흐의 마지막 편지에서 평상시보다 심한 우울증의 기미는 발견하기는 어려우며, 심지어는 늘 그렇듯 그림에 필요한 도구들을 더 보내달라는 요청까지 읽을 수 있다. 하지만 7월 27일, 그는 밀밭에서 그림을 그리다 말고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쏜다.  - P353

이 소식을 듣고 테오가 달려오지만 이틀 뒤 고흐는 숨을 거둔다. 그의 나이 37세였다. 상심한 테오 역시 같은 해 자리에 눕게 되어 이듬해 1월에 네덜란드에서 사망한다. - P353

요즈음은 아버지 생각을 자주 한답니다. 아무튼 사정이 그렇게 되어 저는 테오가 침실에 걸어두도록 곧 그림을 한 점 그리기 시작했지요. 푸른하늘을 배경으로 굵은 가지에 피어 있는 흰 아몬드 꽃이에요. - P356

가셰 박사의 초상화를 그렸단다.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의사의 멜랑콜릭 한 표정을 보며 그가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바로 이런 식으로 그려야 하는 거야. 냉정한모습의 옛 초상화들과 비교하면 오늘날 사람들의 얼굴에는 얼마나 다양한 표정과 열정이 새겨져 있는지를 이 그림을 통해 깨달을 수 있겠지. 어떤 기대감이랄지, 고전적인 특성이랄지, 그런 거란다.
슬프지만 부드럽고, 분명하고도 명철한 모습. 바로 이런 식으로 많은 초상화들이 그려져야 할 거야. - P366

내가 작업을 하면서 가장 관심을 갖는 건즉 최대의 관심 분야는 초상화법이야. 현대 초상화법이란다. - P370

솔직히 말해 우리는 오직 자신의 그림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단다. 하지만 아우야, 내가 늘 네게 했던 말이 있지. 그걸 다시 한번 아주 진지하게 말하마. 무언가를 가능한 한 잘 해내려고 부단히 애쓰는 마음만이 표현할수 있는 진지함으로 말이다. 되풀이해 말하지만, 난 언제나 너를 단순히 코로의 그림을 파는 화상 이상으로 생각할 거야. 어떤 그림들이 실제로 완성될 때 넌 나를 통해 네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어. 그리하여 이런 재난 속에서도 이 그림들은 평온을 유지하는 거지. - P389

나의 일로 말하면, 난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걸었고 그것 때문에 반쯤 미쳐버렸지. 정말이야. 하지만 내가 아는한, 넌 인간을 거래하는 자들 중 하나가 아니야. 네가 선 자리를 고수하며 진정한 인간성을 지키면서 행동하는건 아마도 네 선택의 문제겠지. 하지만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지? - P389

구두 A pair of shoes 삶의 고단함과 쓸쓸함을 잘 표현하고 있는 이 작품은 1886년에 그려졌다. 1879년 겨울, 고흐는 평소에 좋아하던 화가 쥘 브르통을 만나기 위해 120킬로미터를 걸어서 그의 집 앞까지 갔지만 용기가 부족해 만나지 못하고 결국 되돌아와야 했다. 고흐는 끝없이 그를 괴롭혔던 절망감과 외로움 속에서도 노동의 현장에서 발견한 진정한 삶의 가치를 자신만의 화법으로 그리고자 했다. 강렬한 색채와 거친 붓놀림이 삶의 비통함과 강렬한 생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 P406

폴 고갱의 의자 Paul Gauguin‘s armchair1888년은 고흐에게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안겨준 해다. 대도시 파리에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친 고흐는 프랑스 남부의아를로 떠나 그곳에서 노란 집을 빌려 화가 공동체를 세우고자한다. 10월에 고갱이 아를에 도착하고 이들은 예술에 관해 의견을 나누며 유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두 달이 채 지나지않아 둘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고 결국 고갱이 떠나자 고흐는스스로 자신의 오른쪽 귀 일부를 잘라낸다. 이 작품에서 가스등과 촛불은 어두운 방을 밝히고 있고, 의자 위에 놓인 두 권의책은 고흐가 믿고 있던 고갱의 학구열을 나타낸다. - P407

1887년
반 고흐의 작품은 일본 판화의 영향을 받아 색채가 밝아지고 양식이 점차 바뀐다.
봄에는 친구가 된 화가 에밀 베르나르와 야외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여름에는 해바라기를 그리기 시작한다. 이 해에도 자화상을 많이 그리는데 모델을구하기 어려운 가난한 현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반 고흐에게 자화상은 단순한 자기 모습의 묘사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끊임없는 자기 탐색과 분석의 연장으로 고독과 불안, 탐욕과 결핍감에 내몰린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이었으며 동시에 붓끝으로 만들어나갈 미적 세계를 내다보는 창이었다. - P413

1889년
정신병원에서 퇴원했지만 반 고흐의 정신발작은 더욱 심해진다. 음식에 독이 들었다고 생각해 식음을 전폐하기도 하고, 환청과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하며, 물감과 등유를 먹으려 하기도 한다. 결국 주민들에 의해 다시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지만 그림에 대한 그의 열정은 곧 다가올 생의마지막을 예견이라도 하는 듯 조바심 속에서 더욱 뜨거워진다. 일평생 고독한 자신의 초상을 마주하기 위해 스스로의 운명을 믿고 견뎌야 했던 빈센트 반 고흐 그림에 대한 그의 열정은 투쟁에 가까웠다. - P415

외젠 보흐 Eugène Boch
벨기에인 외젠 보흐는 파리의 보나와 코르몽 아틀리에에서 수업을 받았던 화가이다.
고흐는 1888년에 그린 이 작품에 대해 이렇게 썼다. "보흐 덕분에 나는 오랫동안 꿈꾸어왔던 그림 <시인>의 첫 번째 스케치를 할 수 있었다. 초록색 눈을 가진 그의 섬세한얼굴은 별이 반짝이는 짙은 군청색 하늘을 배경으로 도드라진다. 그는 노란 재킷을입고 얼룩무늬 넥타이를 하고 있다." 노란색을 주조색으로 한 덕분에 보흐는 어두운배경에서 빛을 발하는 듯하다. 고흐는 그가 배경과 분리되어 보이도록 하기 위해 어두운 머리카락 둘레에는 노란색 선을 그려 넣었는데 덕분에 보흐는 마치 후광을 두른것 같다. - P4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올리브나무들은 개성이 넘쳐난단다. 이걸 포착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어.
이 나무들은 간혹 은색을 띠다가 푸른색, 녹색, 청동색이 되고, 땅 위에선 흰색으로 변하지. 땅은 노랑, 분홍, 보라, 오렌지색에서 칙칙하고 붉은 황토색에이르기까지 다양한 색깔이야. - P340

그렇긴 해도, 농부들이 밭을 갈듯 나 역시 캔버스를 일구고 있어. - P3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