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유럽에가스를 공급하는 자신들의 독보적인 위치가 위협받게 될까 전전긍긍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중이다. - P239

주권 국가로서 사이프러스는 자국의 영해 주변을 시추할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 - P239

"터키보다는 우리가 더 믿을 만한 파트너다!" - P241

20세기 초 오스만 제국이 제국 내에 거주하는 약 150만 명의기독교계 아르메니아인을 살해와 추방으로 사망케 한 사건을 말한다. 서구권의 학자들은 오스만 정부가 조직적으로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했다는 사실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지만 오스만 제국의뒤를 이은 터키는 이 학살을 공식적으로 부정하면서 국제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 P242

나토 헌장에는 다음과 같은 조항이 있다. "한쪽에대한 공격은 모두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 다만 그 공격의 당사자가 나토 동맹국이라는 것을고려해본 적은 없었다. - P243

미국이 보다 믿을 만한 파트너를 찾고 있는 것을 아는 그리스로서는 자신들이 터키를 대체해 에게해에서 나토의 핵심 멤버라는 위치를 차지하고 싶어 한다.

그리스는 더 이상 영국, 러시아 또는 미국의 것일 필요가 없다. 그리스는 그리스다. 그런데도 또다시 외부 세력에게 이 나라는 중요한 부동산이 되었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그리스인들이 염려하는 것은 제우스, 아폴론, 아프로디테가 살고 있는 올림포스산을 올려다보던 그 시절과 딱히 달라진 것이 없다. 그 사이 신들은 떠났고, 제국들은 왔다 갔고, 동맹도 바뀌었다. 그러나 그리스를 만들었던 그 상수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바로 산과 바다 말이다.

터키,
목 좋은 곳에 자리 잡았지만
친구는 별로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닮았다."
-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터키 초대 대통령)

당신은 아마 터키인들이 원래부터 터키에서 살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안 그런가? 어쨌거나 튀르키예Turkiye라는 말은 <터키 사람들의 땅〉이라는 뜻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니다. 원래 터키인들은 아주 아주 먼 곳, 그러니까 몽골에 있는 알타이 산맥 동쪽에서 왔다. 그리고 현재 모국이 되는 곳으로와서 확실하게 터키라 부르게 되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대단한 여정이었다.

멀리 몽골에서 와 오스만 제국을 세우기까지

터키의 서쪽에서 동쪽까지는 1천6백 킬로미터에 이르며 북쪽에서 남쪽까지는 5백에서 8백 킬로미터 정도다. 또 국토의 약 97퍼센트는 아시아에 속해 있고 그 가운데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나톨리아 고원이다. 오늘날 터키는 그리스, 불가리아,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 8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이들은 일찍이 오스만이 제국 건설을 착수했을 때 만났던 이웃이다.

아이언 게이트, 즉 철문은 카르파티아 산맥이 루마니아를 돌아 불가리아로 가서 발칸 산맥과 만나는 지점이다. 다뉴브강은 이 요충지를 통과해서 좁은 골짜기 사이를 흐르는데 1960년대에 남을 건설하기 전에는 몇 마일씩 퍼져나가는 4개의 협곡을 통해 세찬 급류가 흘러내리는 은근히 무시무시한구간이었다. 

현재 이곳의 물소리는 훨씬 조용해졌지만 철문을 지배하면 확고한 방어 포인트가 되거나 혹은 새로운 무대를 선점할 수 있는 요충지가 될 수 있다. 오스만은 후자를 선택했다.

1915년 갈리폴리전투에서 영국을 패배시킨 것은 터키 건국 역사에 기록될 만한 전공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국을잃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1918년의 휴전 협정에 따라 제국의 수도는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군에게 점령당했고, 결국 1922년 오스만 제국은 해체되었으며 술탄 체제는 폐지됐다. 

이 와중에 터키어를 쓰는 일부 주민들은 새로운 국경  바깥에, 즉 그리스와 사이프러스에 남겨졌다. 마찬가지로 백만명이 넘는 그리스인들은 터키 안에 남겨지게 되었다.

터키공화국의 탄생,
그러나 영 마음이 편치 않은5

1960년, 1971년, 그리고 1980년에 터키에서 군부 쿠데타가 발발했을 때도 나토 동맹국들이 애써 못 본 체했던 것도 터키가 가진 이러한 전략적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국 내 사정에 대한 약간은 어색한 헛기침과 수군거림 속에서도 터키의 지리적 위치는 서방 세력의 마음속에서독보적인 자리를 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은 문민정부가 보편적인 규범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1990년대까지 이어졌다.

게다가 EU 내에 수치화할 수는 없어도 인식 가능한 어느 정도의 편견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터키가 충분히 <유럽답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터키는 새로운 지도자 아래에서 조금씩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의 부활을 꿈꾸지만 친구는 없는

다른 방향이란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과거〉로 눈을 돌리는 것이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이새 지도자는 종교적 민족주의와 신오스만주의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1999년, 공식적으로 세속주의를 추구하는 이 나라에서 다음과 같은 이슬람 시를 읊었다는 이유로 4개월간 구금되기도 했다.
"모스크는 우리의 막사이며, 둥근 지붕은 우리의 투구이며, 첨탑은 총검이며, 신자는 우리의 병사들이다."

"민주주의는 마치 버스를 타는 것과 같다. 일단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에 도착하면 내리면 된다."

이웃 나라들과 끊임없이 충돌하다

그즈음 20년 동안 잘 지내고 있던 터키와 이스라엘 간의 사이가 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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