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결혼생활 동안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럴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딱히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는 이따금 다른 남자와 잤다. 가후쿠가 아는 한, 상대는 모두 네 명이었다. 최소한 정기적으로 성적인 관계를 가졌던 남자가 네 명이었다는얘기다. 

물론 아내는 그런 얘기를 입도 뻥긋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다른 장소에서 다른 남자에게 안겼다는 것을 그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시간이 나면 다양한 문제에 대해 솔직한 의견을 열성적으로 나누었고 서로를 신뢰하고자 노력했다. 우리부부는 정신적으로나 성적으로나 잘 맞는 편이라고그는 생각했다. 주위 사람들도 그들을 사이좋은 이상적인 커플로 인정해주었다.

그런데도 왜 다른 남자들과 잠자리를 함께했는지,
아내가 살아 있는 동안 그 이유를 마음먹고 물어봤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는 자주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아는 것이 모르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 그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자 삶의 자세였다. 설령 아무리 극심한 고통이 닥친다 해도 나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 아는 것을통해서만 인간은 강해질 수 있으니까.

하지만 상상보다 더 괴로운 것은, 아내가 품고 있는 비밀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안다는 걸 아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무렇지 않게 생활하는 것이었다.

연기를 하면 내가 아닌 다른 것이 될 수 있어

그리고 끝나면 다시 나 자신으로 돌아오지. 그게 좋았어."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다른 남자와 여자가 관계를  맺는다는 건, 뭐랄까 총체적인 문제야. 더 애매하고,  더 제멋대로고, 더 서글픈 거야.

"하지만 결국 나는 그녀를 잃었어. 살아 있을 때부터 조금씩 잃다가 결국에는 모조리 잃고 말았어. 침식으로 깎여가던 것이 마침내 큰 파도에 송두리째뽑혀나가는 것처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가후쿠는 말했다. "내가그녀를-적어도 중요한 일부를ㅡ진정으로 이해하지못했다는 거야. 그리고 그녀가 죽어버린 지금, 그건아마도 영원히 이해되지 못한 채 끝나겠지. 깊은 바다 밑에 가라앉은 작고 단단한 금고처럼. 그 생각을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

"명줄 줄이는 짓이야." 가후쿠가 말했다.
"사는 것 자체가 명줄 줄이는 거잖아요." 미사키가 말했다.

"하지만 부인이 왜 그 사람과 섹스를 했는지, 왜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되었는지, 가후쿠 씨는 아직 모르는 거죠?"

"그건 병 같은 거예요, 가후쿠씨. 생각한다고 어떻게 되는 게 아니죠. 아버지가 우리를 버리고 간 것도, 엄마가 나를 죽어라 들볶았던 것도, 모두 병이한 짓이에요. 머리로 아무리 생각해봤자 별거 안 나와요. 혼자 이리저리 굴려보다가 꿀꺽 삼키고 그냥살아가는 수밖에요."

"그리고 우리는 모두 연기를 한다." 가후쿠가 말했다.

"잠깐 잘게." 가후쿠는 말했다.
미사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대로 말없이 운전을 계속했다. 가후쿠는 그 침묵에 감사했다.

내가 아는 한, 비틀스의 <예스터데이>에 일본어로(그것도 간사이 사투리로) 가사를 붙인 인간은 기타루 한 사람밖에 없다. 그는 목욕할 때면 곧잘 큰소리로 그 노래를 불렀다.

어제는/내일의 그저께고
그저께의 내일이라네

옵라디 옵라다
비틀스의 노래 제목. 나이지리아 부족의 말로 ‘인생은 그렇게 흘러가는 거야‘라는 뜻이라고 한다.

"나무가 늠름하게 자라나려면 혹독한 겨울을 통과해야 하는 것처럼. 항상 따뜻하고 온화한 기후에서나이테도 안 생기겠지."

"시간의 속도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어긋날 수도있어." 나는 말했다.

"뭐랄까, 좀더 다른 무언가를찾아보고 싶다는, 좀더 많은 것들을 접해보고 싶다는 강한 바람도 있어. 호기심이랄까, 탐구심이랄까,
가능성이랄까. 그것 역시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라서억누르려 해도 채 억눌러지지가 않아."

"키스 같은 거 했냐?"
"할 리가 있냐." 나는 말했다.
"했어도 화 안 내." 그는 말했다.
"아무튼 안 했어."
"손도 안 잡았어?"
"손도 안 잡았어."
"그러면 뭘 했냐?"

"구리야 에리카의 팬티에 손을 넣고 싶지 않다면 안  넣으면 돼. 네 인생이야. 뭐든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다른 누구한테도 신경쓸거 없어."

기타루는 감탄한 듯 입을 반쯤 벌리고 내 얼굴을찬찬히 바라보았다. "야, 다니무라. 넌 정말로 좋은놈이다. 가끔 좀 지나치게 일반적인 데가 있긴 하다만."

우리는 누구나 끝없이 길을 돌아가고 있어.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가만있었다. 좀 있어 보이는 말을 너무 자주 하는 것도 내가 가진 문제점 중 하나다.

덴버에서 (혹은 어딘가 또다른 먼 도시에서) 기타루가 행복하게 살고 있기를 나는 기도한다. 행복하다고까지는 못 하더라도 적어도 오늘 하루를 부족함없이, 건강하게 보내기를. 내일 우리가 어떤 꿈을 꿀지, 그건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이니까.

내적인 굴곡이나 고뇌가 너무도 부족한 탓에, 그몫만큼 놀랍도록 기교적인 인생을 걷게 되는 부류의사람들이 있다. 그 수는 그리 많지는 않지만 우연한기회에 눈에 띄곤 한다. 도카이 의사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가 예전에 다정하게 애무했던 멋진 젖꼭지로 지금쯤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도카이는 그건 그것대로 기쁘게 생각했다.

한편 부모들의 머릿속에는 아이를 명문학교에 보낼 생각뿐이라 노상 학교 성적에 안달복달했고, 그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느라 부부간에 말다툼도 끊이지 않는 듯 했다.

"신사는 자기가 낸 세금 액수, 그리고 같이 잔 여자에 대해 말을 아끼는 법이죠."언젠가 그는 내게말했다.

"그거 누가 한 말이죠?" 나는 물었다.
"내가 지어낸 말이에요." 도카이는 표정을 바꾸지않고 말했다. "물론 세금 이야기는 가끔 세무사와 자세히 나눠야 하지만."

여자들과의 약속이 자칫 겹치지 않도록 솜씨 좋게교통정리도 해주었다. 도카이가 현재 만나는 여자들한 사람 한 사람의 월경주기까지 - 선뜻 믿기 어려운얘기지만-대충 그의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무리하게 서두르지 말 것, 같은 패턴을 반복하지 말 것, 꼭거짓말을 해야 할 때는 되도록 단순한 거짓말을 할것, 그 세가지가 조언의 요점이었다(대체로 갈매기에게 하늘 나는 법을 가르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지만, 일단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는 뜻에서).

"여자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는데요. 이를테면 어떤 남자가 문을 열었는데 안에서 여자가 알몸으로 옷을 갈아입는 중이에요. 그때 ‘실례했습니다. 마담‘이라고 말하고 얼른 문을 닫는 게 예의바른사람입니다. 반면 ‘실례했습니다, 무슈‘라고 말하고얼른 문을 닫는 게 재치 있는 사람이죠.‘

지금껏 금전적인 고생이라고는 거의 해보지 않은 인간이 대부분 그렇듯 도카이 의사도 기본적으로 자기자신밖에 생각할 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앞서 말했듯이 즐겁고 흥미롭게 대화할 수 있는상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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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다름 아닌 여름 태양이야. - P263

이 지역 주민들은 졸라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을 종종 생각나게 해. - P267

마네라면 이 사람들을 그리고 이 도시를 있는 그대로 좋아할 거야. 베르나르는 아직 브르타뉴에 있네. 열심히 일을 잘 하고 있는 것 같아. - P267

고갱 역시 브르타뉴에 있는데 간이 나빠 또 고생을 하고 있다네. 내가 그와 함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면 그가 이곳에 있든지. - P267

모기가 물어뜯고 서북풍이 짜증이 나도록 끈질기게 불어닥칠 때 거기에 맞서 일할 수 있는 인내심을 누구나 가지는 건 아니겠지. 게다가 요즈음 난 빵 조금과 우유로 버티며 온종일 밖에서 보낸단다. 도중에 마을에 갔다 오기엔 너무 먼 곳에서 작업을 하기 때문이야. - P273

이 사람에게 "이 풍경은 바다처럼 아름답고 무한한 느낌을 줍니다"라고 내가 말하자, 바다가 무언지 아는 이 사람은 대답하더군. "저 같으면 바다보다 이 풍경을 좋아하겠어요. 이건 무한하면서도 사람이 살고 있음을 느끼게 하니까요"라고. - P273

그런데 결국 난 희생을 치렀지. 이 남루한 몰골 그리고 나 자신의 박애주의이념에 따라 최선을 다해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터에 혼란스러워진 머리. -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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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공기가 나한테 얼마나 유익한지 몰라. 너도 이 공기를 한껏 들이마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뿐이야. 이 공기가 내게 미치는 효과 중 아주 재미있는 일례로, 여기선 코냑을 한 잔만 마셔도 취기가 돈단다. 혈액순환을 위해 술에 의존할 필요가 없으니 몸도 덜 해치게 되지. - P240

편백나무가 있는 혹은 익은 밀밭 위로 펼쳐진 별 밤도 그려야 해. 이곳에선 정말이지 아름다운 밤을 볼 수 있단다. 난 일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에 사로잡혀 있지. - P240

늘 조급한 생각이 드는 건 그림에 대한 욕구 때문이지. 붓으로 직접 그리건 펜 같은 다른 도구를 사용하건, 마음속엔 늘 아쉬움이 남는단다.

본질적인 것은 과장하는 반면, 평범한 것은 의도적으로 희미하게 두려고 노력 중이야.

하루는 밤에 아무도 없는 해안을 따라 바닷가를 산책했어. 그리 명랑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그렇다고 슬프지도 않았고, 그저 아름다웠단다. 검푸른 하늘에는 푸른색의 정수인 진한 코발트색보다 더 짙푸른 구름이 군데군데 떠 있었지. 푸르른 순백의 은하수처럼 연푸른색 구름도 보였고, 깊고 푸른 하늘엔 별들이 반짝였지. 노랑, 초록, 하양, 분홍별들이 고향에서보다 그리고파리에서보다 더 밝게 빛나는 것이, 마치 보석 같았단다. 오팔, 에메랄드, 유리, 루비, 사파이어라고나 할까. - P258

바다는 아주 짙은 군청색이었어. 해안은 보라색과 옅은 적갈색을 띄었고, 해변의 모래언덕들(약 5미터 높이) 위에는 감청색 덤불들이 자라고 있었지. - P258

요컨대 이곳에서 잠시 체류하는 것이 내 개성의 해방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확신하게 되었지. - P260

일본 화가들은 그림을 아주 빨리 눈 깜짝할 새에 그린단다. 그들은 훨씬 섬세하고 느낌도 단순하기 때문이야. -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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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여자가 운전하는 차를 적잖이 타보았지만, 가후쿠가 보기에 여자들의 운전습관은 대략 두가지로 나뉘었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난폭하거나지나치다 싶을 만큼 신중하거나. 후자가 전자보다-우리는 그 점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훨씬 많았다.


일반론을 말하자면, 여자 운전자는 남자보다 조심스럽고 신중하다. 물론 조심스럽고 신중한 운전에 불만을 제기할 이유는 없다. 그래도 그런 운전은 때로주위 운전자들을 답답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들이 대담하게 차선을 변경할 때주위 몇몇 운전자들은 한숨을내쉬며, 혹은 그리 바람직하지 못한 말을 입에 담으며 브레이크 페달을급하게 밟는다는 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다.

왠지 그녀들이 계속 긴장하고 있다는 느낌을받았다.

"수동, 좋아하죠." 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심지 굳은 채식주의자가 양상추를 먹을 줄아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처럼.

"오래된 차라서 내비게이션도 없는데."
"필요 없어요. 한동안 택배 일을 했거든요. 도쿄시내 지도는 머릿속에 다 들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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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일이지만, 내 습작을 다른 사람들의 습작과 비교하면 거의 닮은 데가 없단다. - P212

금세기의 가장 위대하고 역동적인 인물들은하나같이 시류에 역행해 독창성을 발휘하며 일했음을 회화나 문학 모두에서 발견되는 현상이지 - P217

그들은 미천한 상태에서 출발해역경을 견디어냈고, 작은 시작에서 많은 것을 생산해냈으며, 돈보다는 소신에, 평판보다는 용기에 기댔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밀레, 상시에, 발자크, 졸라, 공쿠르, 들라크루아야.

나로 말하면, 결혼이나 아이에 대한 욕구가 점점 사라져가는 걸 느낀단다. 서른다섯의 나이에 이런 식으로 느끼다니, 간혹 마음이 쓸쓸해지기도 해. 이 나이엔 아주 다른 식으로 생각해야 마땅할 테니까. - P229

1887년 가을, 파리의 사회상에 싫증이 나 있던 고흐는 테오와 함께하는 생활 역시 불가피한 긴장 상태로 접어들자 프랑스의 남쪽 지방으로 거처를 옮길 생각을 한다. 그리하여 1888년 2월 말에 프로방스의 한 도시인 아를에 도착한다. 이 지방의아름다운 풍광과 색채에 매료당한 그는 곧 에밀 베르나르와 폴 고갱 같은 동료 화가들에게 그곳으로 와 합류하도록 부추기기 시작한다. 향후 수년간 그를 괴롭힐 서북풍에 끊임없이 시달리면서도 고흐는 작업에 몰두한다. 그리고 늘 그렇듯 전원생활에서 영감을 얻어 왕성한 작업을 계속했고, 그 후 단 몇 차례의 침체기를 제외하고는 죽을 때까지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 - P233

고갱의 체류는 9주 만에 막을 내린다. 이 시기 동안 두 사람이 동료로서 빈번하게 주고받았던 교류는 종내 끔찍한 불화로치닫고 만다. 성탄절을 눈앞에 두고 그들은 최종적으로 말다툼을 벌이며, 고흐는 분노의 발작에 휩싸여 자신의 귓불을 자르게 된다. 결국 그는 병원에 입원하고, 충격을 받은 고갱은 아들을 떠난다. - P233

이곳 시골은 공기가 맑고 색채가 선명해 일본풍의 아름다운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네. 물은 일본 복제화에서보듯 에메랄드 그린과 다채로운 푸른색의 얼룩들로 이루어져 있어. 파리한 오렌지색 일몰이 푸른 토양을 돋보이게 하지. 해는 찬란한 빛을 발하는 노란색이야.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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