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라는 지명은 ‘이리에入江(바다가 육지로 파고든 작고 좁은 만이나 강어귀를 가리킨다 - 옮긴이)의 입구’를 의미한다. 당시 에도의 해안선은 현재와 크게 달라서 에도마에지마江戶前島(현재의 도쿄역, 유라쿠초, 신바시 일대)라는 반도가 돌출되어 있었다. 이 반도의 서쪽에 있었던 것이 히비야이리에日比谷入江이고, 해안선은 에도성의 바로 동남쪽까지 닿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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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 통일의 종착지이자 새로운 권력의 탄생지

문헌상 처음으로 ‘에도江戸’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가마쿠라 시대의 역사서 『아즈마카가미吾妻鏡』이다. 헤이안 말기, 간무 헤이시桓武平氏(간무 천황의 자손으로 다이라라는 성씨를 받은 가계 - 옮긴이)의 혈통을 잇는 지치부 시게쓰나의 아들 시게쓰구는 무사시(현재의 도쿄도와 사이타마현)의 에도고江戸鄕로 이주하여 에도 씨를 자처했다. 주거로 사용했던 저택은 훗날 에도성 혼마루, 현재의 고쿄 히가시교엔皇居東御苑(일본 왕실의 부속 정원 - 옮긴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에도 가문은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 후 쇠퇴하여 에도고를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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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아이즈와카마쓰시는 인구가 12만 3,000명 정도로 아이즈 지방의 중심 도시로서 기능하고 있다. 농업이 번성한 지역이면서 동시에 풍부한 관광 자원을 활용한 관광 도시의 면모도 갖추고 있다. 시의 동쪽에는 일본에서 네 번째로 큰 호수인 이나와시로호가 있으며 중심에는 아이즈번의 거성이었던 와카마쓰성(쓰루가성), 그리고 히가시야마 온천 등이 있다.

헤이안 시대의 아이즈와카마쓰는 교토와 나라, 가마쿠라, 히라이즈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불교의 도시이다. 반다이산 자락에는 아이즈 불교의 중심인 거대한 사찰 ‘에니치지’가 건립되었다. 아이즈와카마쓰시 내에는 에니치지의 말사인 엔메이지 지조도地蔵堂가 있다.

07정치·경제·문화, 세 개의 얼굴을 지닌 요충지
우쓰노미야 宇都宮
○ 해당 지역 도치기현
○ 도시 인구 약 51만 명(2020년 기준)
신사 마을, 성하 마을, 역참 마을, 에도 시대의 우쓰노미야는 다양한 특색을 가진 도시였다. 거기에는 중세부터 이 땅을 지배했던 우쓰노미아 가문이 깊이 관련되어 있다.도쇼구(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신이 안치된 그를 신으로 모시는 신사-옮긴이)가 있는 닛코에 가깝고,  간도 북부에서 에도의 방어 거점에 해당한다는 점도우쓰노미야가 발전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메이지 시대, 새롭게 육군 사단이 주둔함으로써 군사 도시로서의 면모도 더해졌다.

칼을 찬 승려, 우쓰노미야의 두 얼굴
도치기현의 현청 소재지로서 기타칸토北関東 (간토 지방의 북부와 중북부 지역을 아우르는 이름으로 이바라키현 도치기현, 군마현의 세현을 가리킨다. 여기에 사이타마현이 포함될 때도 있다 - 옮긴이)의 중심 도시인 우쓰노미야는 인구 약 52만 명의 중핵시(인구 30만 이상으로 도시 행정에 관한 일반 사무를 독자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일본 지방 자치법상의시-옮긴이)이다.  간토평야의 북단, 기누강좌안의 높은 지대에 있으며, 시가지 북쪽으로는 우쓰노미야 구릉이 돌출되어 있다. 그 구릉을 끼고 흐르는 다가와강과 가마가와강이 시내에서 합류한다.
우쓰노미야 구릉의 남단에는 후타아라야마 신사가 있고, 그 남쪽 평지에는 우쓰노미야성 터가 있다. 두 유적 모두 우쓰노미야의 역사를 상징하는 장소이다.

08천하를 통일한 이에야스의피땀눈물의 도시
도쿄東京
○ 해당 지역 도쿄도
○ 도시 인구 약 1,400만명(2020년 기준)
일찍이 에도로 불렸던 일본의 수도 도쿄 동설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를 열기 전에는 가난하고 쇠락한 마을이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상가가늘어선 항만도시였다고 한다.
그 후 에도는 이에야스의 노력으로 국정의 중심이 된다. 애초부터 많은 인구를 거느렸던 것은 아니었지만 대대적으로 만의 연안을 대립하고 하천의 물줄기를바꾸는 공사로 시가지를 넓혀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도시로 다시 태어난다. 그 배경에는 막부의 정성뿐 아니라 선진적인 인프라 정비가 있었다.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에도로 간 이에야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하통일로 마무리된 오다와라 전투 때의 일이다. 히데요시는 이시가키산에서 함락 직전의 오다와라성을 내려다보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호조 가문을 멸하고 나면 간토 8주에도 시대 간토 8개국의 총칭으로 현재의 간토 지방에 해당한다 - 옮긴이)를 그대에게 줄까 하네.
그때는 오다와라도, 가마쿠라도 아닌 에도에 본성을 짓는 것이 좋겠지."
물론 히데요시가 아무 대가 없이 간토 8개국을 주었던 것은 아니다. 미카와(현재의 아이치현 동부)와 도토미(현재의 시즈오카현 서부) 등 도쿠가와 가문의 영지 5개국을 가져가면서 영지를 다시 배치한 것이다. 도쿠가와의 녹봉 자체는 늘었지만 조상 대대로 소유했던 땅을 내놓는 데 가신들은 난색을 보였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숙고한 끝에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히데요시는 왜 간도를 이에야스에게 주었을까. 당시 에도성 주변 마을은 띠로 지붕을 엮은 민가 100호 정도의 규모였다고 한다. 에도성도 성문 앞에 배의 널조각을 늘어놓아 계단으로 삼은 변변찮은 소성이었다고, 막부의 정사인 ‘도쿠가와 실기德記』에 적혀 있다.  즉 히데요시는 실력자인 도쿠가와 가문을 쇠락한 벽지에 몰아넣음으로써 도요토미 가문의천하를 반석처럼 더욱 견고하게 만들려고 획책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설이다.
그러나 후세의 연구에서는 실제의 에도가 적어도 스산하고 가난한 한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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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호쿠에서 제일가는 인구를 자랑하는 도시 센다이는 다테 마사무네의 손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키가하라 전투(1600년 일본에서 전국의 다이묘들이 동서 양 진영으로 나뉘어 벌인 전투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이 승리하면서 에도 막부가 수립되었다 - 옮긴이) 후 영지가 늘어난 마사무네는 새로운 거점이 되기에 걸맞은 땅을 선택해 성과 조카마치를 동시에 건설한다. 그리고 그의 의도대로 센다이 땅은 발전해 간다.

마사무네의 사후 가문의 내분과 보신 전쟁으로 센다이의 지위는 흔들렸지만, 도호쿠의 중심 도시라는 지위는 한 번도 빼앗긴 적 없이 현재에 이르렀다.

시라카와노세키(네즈가세키, 나코소노세키와 더불어 오슈 3대 관문의 하나 - 옮긴이)가 있었던 현재의 후쿠시마현은 도호쿠의 현관으로서 기능해 왔다. 그중에서도 예부터 발전했던 것이 아이즈 땅이다. 지형적인 특장점 덕에 도호쿠 주변 지역보다 벼농사를 짓기에 알맞아서 센고쿠 시대부터 여러 다이묘가 아이즈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었다.

메이지 초기에도 전란에 휩싸여 도시가 대부분 불타 사라지고 말았지만, 사람들의 정열로 우아한 와카마쓰성을 비롯해 정취 넘치는 거리의 자태가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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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1-19 2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밌을 거 같아서 찜해갑니다. ^^

대장정 2023-01-20 06:05   좋아요 0 | URL
30개도시 미국사, 세계사도 있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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