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7년
몽골군과 화약의 확산
유라시아대륙 동서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족

○ 몽골초원 기마민족, 드넓은 유라시아대륙동쪽에서 서쪽에 걸친 거대 제국을 건설하다

13세기
화약이 유럽으로
화포, 전 유럽을 뒤흔들다

○ 흑색화약에 관한 기록을 남긴프란체스코수도회 수도사 로저 베이컨

1300년 무렵
증류주 출현
활력을 되찾아주는 기적의 약으로 여겨진 새로운 알코올

ㅇ세계사를 바꾼 증류주, 브랜디와 위스키의 탄생

1300년 무렵
대포 굉음이 울려 퍼지는 유럽
신형 무기가 유럽 판도를 뒤흔들다

○ 교회 종을 만드는 당시 주물 기술자들이 특별히 주목받은 까닭은?

1346~1353년
페스트 전야
14세기 페스트가 식민지 도시 카파에서 시작된 이유

ㅇ 여러 대륙으로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팬데믹‘으로 발전한최초 사례, ‘유스티니아누스 페스트‘

1346년
페스트 = 생물병기
페스트에 걸린 시체를 성안으로 던져 넣어 화학무기로 활용한 몽골군

○ 유럽 인구 3분의 1의 목숨을 앗아간 최악의 감염병, 페스트

1377년
검역의 시작
역설적으로 사회 변화와 발전을 앞당긴 페스트 팬데믹

ㅇ ‘검역‘을 뜻하는 영어 단어 ‘쿼런틴‘이40 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에서 유래한 까닭은?

농민도 많이 죽었기에 노동력이 부족해지며 임금이 크게 상승했다.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기 위한 기술 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한편, 농촌 인구의 격감으로 인해 오랫동안 농노가 지탱해온 중세의 상징인 장원제도가 붕괴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의 지위는 자연스럽게 향상되었다. 이에 따라 영주의 부당한 요구에 대해 농민 봉기나 반란이 빈번히 일어나곤 했다.

14세기 페스트 팬데믹으로 인한 사회 구조와 시대정신의 커다란 변화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으로 이어졌다.

1415년
얀 후스의 교회 비판
한 성직자의 투쟁이 역사의 흐름을 바꾸다.

○ 체코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화형당한 불운의  성직자 얀 후스

잉글랜드의 성직자이자 종교개혁가인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c. 1328~1384)는 "성경이야말로 신앙의 최고 권위다"라고 주장하며 당대 타락한 교회를 비판했다. 14세기 후반의 일이다. 그리고 위클리프는 가톨릭교회가 엄격히 금지하고 있던 성경의 모국어 번역, 즉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과감히 실행에 옮겼다.

당시 라틴어를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은 교회의 권위를 부여받은 사제 등 소수 엘리트에 국한되어 있었다. 당연하게도 민중은 라틴어를 알지 못했다. 이런 사회 구조상 라틴어 성경밖에 존재하지 않던 시대에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아 라틴어를 익혔다는 사실만으로 성직자의 권력과 부와 명예가 보장되었다.

얀 후스는 가톨릭교회의 이단자로 몰려 화형을 선고받았다. 1415년에 열린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내려진 결정이었다. 그러나 후스가 남긴 말은 오늘날까지 계승되어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다. "진실을 사랑하고,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지켜라" 라는 말이다. 이 문구는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에 있는 얀후스 동상 기단에 새겨져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문구는 오늘날 체코 대통령실에서 사용하는 깃발에도 "진실은 승리한다"라는 문구로 응용되어 새겨져 있다.

얀 후스를 추종하는 후스파는 거대한 세력이 되었다. 후스가 화형당한 뒤 보헤미아 독립운동, 농민반란 등과 결합한 결과였다. 이에 로마 교황 마르티누스 5세(Pope Martin V, 재위 1417~1431)는 십자군을소집해 전쟁에 돌입했다. 당시 십자군이 주 타깃으로 삼은 세력은 후스파 가운데 보헤미아 타보르를 중심으로 급진적인 움직임을 보인 타보르파였다.

○ 농민군 1만 명이 독일기사단을 중심으로 한신성로마제국의 십자군 10만 명을 괴멸시켰다고?
농민군 1만 명이 독일 기사단을 중심으로 한 신성로마제국의 십자군 10만 명과 대치했다. 그야말로정확히 10배의 전력 차이였다. 1421년 12월 21일, 쿠트나호라(Kutná Hora, 프라하에서 동쪽으로 60킬로미터 남짓 떨어져 있는 도시)에서였다. 농민군이 승리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그러나 전쟁이 벌어지자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1만 명뿐인 지슈카의 군대가 무려 10배에 달하는 신성로마제국의 십자군 기사단을 상대로 단지 승리를 거둔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괴멸시킨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신병기를 교묘히 운용해 화포를 집중적으로 발사함으로써 마구잡이로 공격해 들어오는 적군을 무력화시켰기 때문이었다. 독일 기사단이라는 명문 프로 집단의 최강군대가 최신 화포로 무장하고 집중 훈련을 받은 농민군에게 패한 것이다. 이 전투는 현대로 이어지는 ‘전쟁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전쟁사에 길이 남을 이 흥미진진한 전투를 계기로 세계전쟁사에 ‘화포의 시대‘가 마침내 도래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기사의 시대‘는 영원히 종말을 맞이했다. 이 전투에서 사용된 총핸드캐넌)을 체코어로 ‘피스탈라(Pistala)‘라고 부른다. 참고로, 이것이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권총의 일종인 피스톨(pistol)의 어원이다.

1415년
엔히크 항해 왕자
신항로 개척시대의 초석을 다지다

○ 신항로 개척시대의 트리거가 된 세우타의 향신료

1417년
루크레티우스의 재발견
그리스도교라는 ‘거르개‘를 거치지 않은 독창적 자연관

○ 독일 어느 수도원 서가에서 루크레티우스의책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발견한 이탈리아 학자 포조 브라촐리니

1440년 무렵
활판인쇄술 발명
전 세계적 지식의 빅뱅이 일어나다

○ 중국에서 발명된 활판 인쇄술이 동북아시아가 아닌 유럽으로 더 급속히 퍼져 나간 까닭은?

1450년
백년전쟁 종결
과학·기술 혁신을 등한시한 나라는 반드시 멸망한다

○ 신무기 대표의 힘으로 잉글랜드군을 무찌르고 백년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프랑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동로마제국, 역사 속으로 퇴장하다

○ 1,000년 동안 이민족 공격을 23차례나 막아낸 난공불락의 요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기상천외한 작전으로 무너뜨린 메흐메트 2세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오스만제국의 수도가 된 후 ‘이스탄불‘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그리스계 주민들이 ‘이스탄 폴린(eis tan polin, ‘도시를 향해‘라는 의미)‘
이라고 부르는 것을 터키인들이 듣고 지은 이름이 정식 명칭이 되었다고 한다.

1492년
유럽 열강, 신대륙에 도달하다
오늘날의 우주 진출과 다름없던 신항로 개척시대의 세계일주

○ 유럽에 고무가 전해지는 계기가 된 콜럼버스의 두 번째 항해

1516년
사탕수수 재배
대서양에 형성된 거대한 삼각무역권

○ 사탕수수 재배가 인류의 농업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드는 신호탄과도 같은 일대 사건으로 규정되는 이유는?

1516년
자본주의의 태동
‘교회 비즈니스‘로 막대한 수익을 거둔 유럽의 부호와 권력자

○ 오늘날의 대표적인 기축통화 US 달러의 원형이 된체코 북부산지 장크트요하임스탈 광산의 은화

장크트요아힘스탈(독일어로 ‘성 요아힘 골짜기‘라는 의미, 오늘날 체코 야히모프)이라는 골짜기에서 은광산이발견되었다. 1516년의 일이다. 장크트요아힘스탈은 ‘보헤미아‘로 칭해지던 체코 북부 산지에 속했다.
이곳에서 광산이 발견되자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 수천 명이 부나비처럼 몰려들었다. 사람들은이곳에서 연간 85톤의 은을 캐내어 지름 4센티미터 크기 은화를 대량으로 제작했다. ‘요아힘스탈러(Joachimstaler)‘라고 불린 이 은화는 전 세계적으로 유통되었다. 훗날 요하임스탈러는 어미 부분만을 따서탈러‘로 불렸다. 그리고 그것이 또다시 변화해 ‘달러(dollar)‘, 즉 오늘날의 대표적인 기축통화인 US 달러가 되었다.

1521년
아스테카제국 정복
스페인에 막대한 부를 안겨준 천연염료

ㅇ 아스테카제국 수도 테노치티틀란을 멸망으로 몰고 간 결정적 요인 두 가지는?

1532년
잉카제국 정복
스페인을 세계제국으로 발돋움하게 한 식민지 아메리카대륙의 은

○ 심각한 임플레이션을 발생시켜 유럽 경제를 휘청이게 한 스페인의 포토시 은광산 개발

1541년
‘의학계의 루터‘가 등장하다
새로운 르네상스식 약학을 도입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의학자

○ 최초로 근대적 약학 개념을 주창한 ‘의학계의 루터‘ 파라셀수스

1554년
세계 최초의 커피하우스
커피라는 평범한 음료는 어떻게 세계사를 바꿨나

O초기에 커피는 기호음료보다 ‘약으로 사용되었다는데?
.

"직접적인 경험은 어떤 권위보다 우월하다."
이는 파라셀수스가 남긴 유명한 명언이다. 그는 그 누구보다 실제 관찰과 실험을 중시하는 의학자였다. 그러나 기존 지식과 질서를 공격하는 그의 과격한 주장과 행동은 환영받지 못했고 그는 대학에서추방당해 이곳저곳을 떠도는 괴짜 방랑자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파라셀수스는 낡은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새로운 르네상스식 약학을 도입하기 위해 쉼 없이 노력하다 세상을 떠났다. 이는 미켈란젤로가 바티칸 시스티나예배당 벽화 <최후의 심판>을 완성한 해인 1541년의 일이다. 파라셀수스가 불운한 죽음을맞이한 후 그의 철학과 방법은 ‘의화학(Iatrochemistry)‘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분야로 인정받아 크게 융성했다.

"(커피는) 이슬람교도가 마시는 사탄의 음료다."
유럽에는 이런 말이 유령처럼 떠돌아다녔다. 커피가 전파되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상황이다. 그리고 마침내 교황 클레멘스 8세(Pope Clemens VIII, 재위 1592~1605)에게 커피를 금지해줄 것을 간청하는 성직자들이 나타났다. 1605년의 일이다. 교황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놀랍게도 그는 커피를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직접 커피를 마셔보고 그 맛과 향에 반한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이토록 훌륭한 음료를 이교도만 마실 수 있게 하는 것은 너무 아깝지 않은가. 그러니 세례를 해서 그리스도교의 음료로 만들자"
그 결과 유럽에서도 자유롭게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아침부터 술독에 빠져 살면서도 위대한 업적을 남긴 매우 독특하고도 예외적인 ‘
인물이 존재한다. 전 세계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이던 20세기 중반 영국 총리로 재임한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재임 1940~1945, 1951~1955)이 바로 그다. 경이롭게도 그는 아침에는 탄산수에 희석한위스키, 낮에는 샴페인, 밤에는 와인 등을 들이붓듯 마시면서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조국 영국을구해냈다.

1556년
금속에 관하여 출간
르네상스 시대에 광산개발 발전을 이끈 책

○ 그 의사는 왜 ‘광산‘의 매력에 그토록 깊이 빠져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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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의 멸망은 유럽에서 옛 시대의 구심점이완전히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를 대신해새로운 권위를 갖게 된 그리스도교라는 종교 세력이무소불위의 지배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야흐로 그리스도교가 유럽을 지배하는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 결과 얼마나 성경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며 천국을 지향하느냐가 인생과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이런 시대가 되면 과학도 발전하기 어려워진다. 당대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창했던, 신의 존재에 기반한 우주관과 물질관을 더욱 제대로 구현하는것이 과학의 목적이라고 여겼다.

552년
비단의 비밀
산업 스파이가 유럽에 양잠을 확산시키다.

○ 그리스도교 이단파 수도사 두 명을 파견해 누에고치를 몰래 가져오는 데 성공한 비잔틴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

673년
그리스의 불
비잔틴제국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한 가공할 신무기

○ 위기에 빠진 비잔틴제국의 구세주, ‘그리스의불‘을 발명한 이가 시리아 출신 건축가 · 과학자였다?

사막이라는, 극도로 척박한 환경에 뿌리내린 이슬람인은 어떻게 그런 만만치 않은 악조건을 딛고 말할 수 없이 경쟁이 치열한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차지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로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그들이 가혹한 자연환경 속에서 강인한 정신력을 길렀다는 점이다. 
둘째, 새롭게 등장한 종교의엄청난 열정과 에너지가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이다.
셋째, 거칠고 메마른 사막지대에서 말과 낙타를 이용해 물자를 원활히 이동시키고 보급하는 시스템에최적화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슬람군의 규율이 엄격했으며 점령지 민중에게 관용적이었다는 점이다.

800년 무렵
우연한 폭발세계사를 송두리째 바꾼 화약의 발명

○ 도교의 연단술이 흑색화약 발명으로 이어졌다고?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프로파간다에 성공한 권력자라고 할 만한 인물이다

1085년
레콩키스타
르네상스와 과학혁명의 문을 활짝 열어준 영토 재탈환 전쟁

○ 알폰소 6세의 ‘톨레도 탈환‘은 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결정적 분기점이 되었나?

○ 세계사의 주도권이 아라비아에서 유럽으로 넘어가게 한 결정적 원동력, 알폰소 10세의 방대한 문헌 번역 프로젝트

1096년
십자군 원정
탐욕스런 유럽이 운명적으로 조우한 미지의 세계

○ 인류 역사상 최초로 프로파간다에 성공한 권력자,
교황 우르바누스 2세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프로파간다에 성공한 권력자라고 할 만한 인물이다. 그가 교묘한 책략과 선전·선동·정보 조작을 통해 서유럽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참고로, 프로파간다는 ‘씨앗을 뿌리다‘, ‘번식시키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프로파가레 (propagare)‘에서 기원한 단어다. 프로파간다는 ‘대중을 선동하는 정보 조작‘을 의미한다.

1099년 7월,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간 십자군은 민간인 대량학살과 약탈을 자행한 후 예루살렘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이슬람 세력은 조용히 물러나지 않았다. 다시 기세를 올린 이슬람 세력이 예루살렘을 재점령하는 데는 100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아이유브왕조를 세운 쿠르드인 명장 살라흐앗딘(Salāh al-Din Yusuf ibn Ayyüb, 재위 1169~1193, 흔히
‘살라딘(Saladin)‘이라고 불린다)이 탁월한 전략과 리더십으로 예루살렘왕국을 멸망시켰다. 이는 1187년의일이다.

○ 십자군을 혼비백산하게 만든이슬람의 가공할 신무기, 소이병기

1202년
변질되는 십자군
이슬람 세계 조우에서 엄청난 문화충격을 받은 유럽

○ 잉글랜드의 유명 축구클럽 ‘아스널‘이 왕립 병기 공장에서일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팀에서 유래했다는데?

○ 이슬람 세계와의 조우로 인한 문화 충격이 향신료 경쟁을 통한 신항로 개척시대의 막을 열다

인간은 누구나 고난과 역경 속에서, 혹은 새로운환경에 적응해가는 과정에서 성장하고 성숙해진다.
그 점에서는 국가나 사회도 다르지 않다.

그런 상징성과 대표성을 모두 지닌 사례 가운데하나가 바로 이슬람 세계에 설치되어 운영되고 있던병원이다. 오늘날 시리아아랍공화국의 수도이기도한 다마스쿠스에 비마리스탄(Bimaristan, 페르시아어로 ‘병자가 있는 곳‘을 의미)이 역사상 최초로 세워졌다. 이는 707년의 일이다. 비마리스탄은 오늘날의현대식 병원으로 이어진 가장 오래된 기관이라고 할수 있다. 

1221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약국
유럽 약품 공급망을 장악한 메디치 가문

○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약국은 언제, 어디에서 영업을 시작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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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1년
갈리아의 와인
오늘날의 ‘와인 왕국‘ 프랑스를 만든 일등공신 카이사르

○ 갈리아 원정을 떠난 카이사르 군대의 진군과 함께 퍼져 나간 와인 제조법

기원전 1세기
유리 제조 기술 혁신
획기적인 유리 제조 기술·문화를 유럽 전역으로 확산시킨 로마제국

○ 고대 로마 유리공업의 원동력이 된 와인 산업

70년 무렵
약의 백과사전
이슬람 의사에게도 전파된 고대 로마 최고의 약학서

○ 고전 의약을 집대성한 책 『데 마테리아 메디카』를 집필한 로마군 군의, 페다니우스 디오스 코리데스

1세기 무렵(?)
연금술의 마리아
뛰어난 연금술사이자 화학자였던 유대인 마리아

⑥ 알렉산드리아를 세계 최고의 화학 도시로 만든 걸출한 여성 연금술사. 화학자

105년
제지법 개발
지식 세계를 확장시킨 중국의 제지 기술

○ 인류 기록 문화에 대혁명을 일으킨 후한 시대 환관  채륜의 종이

오랜 옛날부터 인류가 이용해온 주요 기록 매체에는 무엇이 있을까?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파피루스(papyrus) 풀의 줄기로 만든다)와 양피지 (양의 표피를 무두질해서 만든다)를 무엇보다 먼저 꼽을 수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사용하는 종이와 같은 물질은 중국에서개발되었다. 이것을 발명한 이는 식물 섬유(셀룰로오스)를 물속에서 분산시킨 다음 촘촘한 망으로 걷어올리는(종이뜨기) 방법을 사용했다.

128년
시멘트 사용
로마는 ‘시멘트 제국‘이었다?

○ 시멘트와 콘크리트로 건설된 제국, 로마

시멘트(cement)는 ‘쇄석‘, ‘거친 작은 돌‘을 의미하는 라틴어 ‘카이멘툼(caementum)‘에서 유래했다. 로마의 공용어인 라틴어에 이미 단어가 있었다는 사실로 알 수 있듯 이는 고대 로마에서 꽃피운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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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로 기록되는 모든 사건은
‘화학 반응‘에 의해 좌우된다."
라이너스 폴링 노벨화학상 노벨평화상 수상 화학자

쿠푸 왕의 피라미드에서
유리 생산과 활용,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염색 위장술‘에 이르기까지
‘화학 기술‘이 세계사를 바꿨다

‘화학 지식‘은 세계사를 바꾸는 원동력이었다. 고대 이집트를 대표하는 쿠푸 왕의 피라미드도 예외는 아니었다.
쿠푸 왕의 피라미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건축물이라 할 만하다. 이는 높이 약 139 미터(지어질 당시에는 약 147미터였으나 사람들이 석회암 외장재를 모두 뜯어가는 바람에 모양도 달라지고 높이도 줄어들었다), 각 밑변 길이 약 230미터에 평균 무게 2.6톤인 돌 230만 개로 이루어진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다. 이 피라미드는 오늘날까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간직하고 있으며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그 탓에 외계인이 쿠푸 왕의 피라미드를 건설했다는 허무맹랑한 주장마저 제기될 정도다.

에너지가 고도로 응축된, 크기가 제로에 가까운 미세한 점상태였던 것이 지름 1센티미터 정도의 ‘공간‘으로 순식간에 팽창했다. 지금으로부터 138억 년 전 어느 날의 일이다. 이 사건을 우리는 ‘인플레이션(Inflation)‘ 혹은 ‘급팽창‘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좁은 ‘공간‘이 흔히 ‘빅뱅‘이라고 하는 대폭발을 일으킨 것은 그 직후의 일이다.

아프리카대륙 어느 숲에서 원인(人)이 출현해 두 다리로 걷는 ‘이족보행‘을 하기  시작했다. 700만 년쯤 전의 일이다. 이후 좀 더 진화한 인류인 네안데르탈인과 호모에렉투스가 아프리카대륙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퍼져 나갔으나 절멸했다.

2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우리 인류의 직계 조상인 호모사피엔스(영리한 사람‘이라는 뜻)가 등장했다(네안데르탈인은 상당 기간 동안 호모사피엔스와 공존했으나 결국 경쟁에 밀려나 도태되었다). 호모사피엔스가 아프리카대륙을 떠나 전 세계로 이동한 것은 8만~5만 년 전의 일이다.

그들은 막대기를 빠른 속도로 돌에 문지르면 불을 피울 수 있다는 사실, 저 열매는 먹어선 안 되지만 이 식물은 먹어도 된다는 등의 사실을 경험을 통해 학습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다양한 방식의 삶과 죽음을 겪으며 방대한 경험과 지식을 쌓아나간 것이다.

140만 년 전 무렵 불 이용 가열조리가 인류를  인류답게 만들었다.
○ 구운 고기 섭취가 뇌를 크게 진화시켰다

4만 1,000년 전 무렵적색 안료 이용
‘색‘을 사용하게 되면서 진화의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 인류
○ 인류는 언제부터 ‘색‘을 의식적으로 사용했을까?

○ 눈으로 본 것을 사진처럼 기억하며동굴벽화로 재현해낸 고대 인류

3 만 년 전 무렵 재봉 바늘 발명
호모사피엔스를 전 세계로 진출할 수 있게 한  ‘도구 이용 능력‘
○ 북유럽 · 시베리아 등 혹한지 진출을 가능케 한 ‘재봉 바늘‘

2 만년전 무렵점토 이용
문명 태동과 발전의 가장 중요한 재료, 흙

ㅇ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토기는?

기원전 8000년 무렵 농경 시작
마을 • 도시 • 국가와 체계적인 권력 구조가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다

○ 씨앗 한 톨이 1년 만에 수백 배가 되는 이치를 터득한 호모사피엔스

농경의 본질은 알곡을 먹어치우지 않고 땅에 뿌리거나 심은 다음 기다리면 수백 배 결실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지혜로운 누군가가 깨닫고  실행에 옮겼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 근원에는
1년을 기다리면 씨앗 한 톨이 수백 배로 늘어나는 희망적인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기적을
창출해내는 시간 개념을 이해할 수 있는 인간  지성이 자리한다.

○ 마을 · 도시 • 국가 그리고 왕과 지배체제를  탄생시킨 농경

기원전 6000년 무렵 리넨과 LINE
문명으로 나아가는 첫걸음, 식물섬유 이용

O 인류는 석기 시대에 이미 식물섬유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리넨 실을 끈으로 사용해왔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피라미드 건설 과정에 직선을그리는 데 리넨 실을 사용했다. 아시아 일부 국가에서도 오래전부터 목공 작업에서 목재 등에 직선을그을 때 ‘먹통‘을 사용해왔다. 여기에서 말하는 ‘먹통‘ 이란 먹물을 먹인 아마실을 손가락으로 튕겨서 직선을 그리는 도구다(오늘날에는 레이저 등을 사용한다). 이렇듯 리넨 실로 직선을 정확히 그을 수 있다는 점으로 인해 리넨에서 직선의 의미가 생겨났다. ‘선‘을 의미하는 단어 ‘라인(line)‘은 이렇게 태어났다.

기원전 6000~6500 메소포타미아
기원전 3000 이집트
기원전 2600 인더스
기원전 2000 황하

기원전 4000년 무렵
금·구리 이용
청동기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인류가 가장 애용한 두 금속

○ 구리가 농기구 · 무기 재료로 적합하지 않은 이유는?

기원전 4000년 무렵
빵의 탄생
‘효모를 이용한 발효 빵‘으로 수준 높은 음식문화를 누린 고대 이집트인

○ 신석기시대 사람들도 빵을 구워 먹었다고?

기원전 4000년 무렵
맥주의 탄생
세계 음료사를 바꾼 미생물, 효모 발견

● 고대 메소포타미아 · 이집트 문명에서는맥주를 급여 대신 지급했다고?

기원전 4000년 무렵
와인의 탄생
세계 음료사를 바꾼 또 하나의 위대한 알코올

Q 고대 이집트인에게 와인 제조법을 전수해준 민족은?

기원전 3000년 무렵
청동기의 이용
고대 세계의 글로벌화가 진행되다

○ 인류 최초의 무역상품은 기원전 6500년 무렵 오늘날의 튀르키예에서 채굴한 ‘흑요석‘이라고?

기원전 3000년 무렵
유리의 이용
유리가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최첨단 과학 문명도 없었다

○ 인류 역사상 최초로 유리를 발명한 이들은 메소포타미아인일까, 이집트인일까?

기원전 2800년 무렵
가장 오래된 약학서
온갖 종류의 한약을 집대성한 ‘신농본초경

○ 오늘날의 최첨단 분석 기술과 생화학 기술이 4,000년 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한약의 특효 비밀을 밝히다

기원전 2500년 무렵
쿠푸 왕의 피라미드
화학 지식을 이용해 가장 위대한 건축물을 탄생시킨 고대 이집트인

○ 돌 절단기 등의 도구가 없던 4,500 년 전 이집트인은피라미드 제작용 석재를 어떻게 잘랐을까?

기원전 1500년 무렵
철기의 이용
철기 기술을 가진 민족이 지배한 고대 세계

○ 우주에서 날아온 운철을 응용해 철을 생산하고 사용하기 시작한 고대 인류

ㅇ ‘이온화 경향‘을 알면 세계사가 한눈에 보인다

인류가 금속을 이용해온 역사를 ‘이온화 경향‘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온화 경향이란 뭘까?
금속 원자가 전자를 방출해 양이온이 되려고 하는 경향을 말한다. 일테면 구리와 철, 알루미늄, 금의 이온화 경향을 살펴보면 큰 것부터 알루미늄(AI)> 철(Fe)) 구리(Cu) 금(Au)의 순서가 된다.

20세기는 ‘알루미늄의 시대‘다. 즉, 이때에 이르러 이온화 경향이 매우 큰 알루미늄 이온에 전자를 강제로 주는 ‘전기 분해‘ 기술이 발명되어 알루미늄이 널리 보급될 수 있었다.
-이렇듯 인류의 금속 이용은 수천 년의 세월을 지나며 금 구리 → 철→ 알루미늄으로 이온화 경향을 거슬러 올라온 역사다.

기원전 1600 년 무렵
보라색은 제왕의 색
고대인은 왜 그토록 ‘보라색‘에 집착했나

○ 보라색 염료 1.5그램을 얻는 데 뿔고등 1만 2,000개가 필요했다는데?

강력한 권력자이던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100~44 BC)는 사실상 황제나 다름없던 자신과 자신의 핏줄을 이어받은 사람만 보라색 염료로 물들인 토가를 입을 자격이 있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카이사르의 연인이던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여왕 전용 군함의 돛을 보라색으로 물들였다. 이렇듯 보라색은 고대로마 시대에 고귀한 신분을 드러내는 상징색이 되었다.

귀중한 보라색 염료는 아라비아 세계를 넘어 인도,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중국까지 전래되었다. 그와 함께 보라색을 고귀한 색으로 여기는 문화도 염료와 함께 전해졌다. 

자금성(紫禁城)이나 자신전(紫宸殿)같은 건물 명칭에 보라색[紫]이 사용되고, 쇼토쿠 태자(聖德太子, 574~622)가 603년에 관위십이계(冠位十二階, 일본 최초의 위계 제도)를 제정하면서 가장 높은 지위를 보라색으로 정한 것도 그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기원전 1323 년 무렵
투탕카멘의 가면
고대부터 사람들을 매료시킨 광물, 금

○ 투탕카멘과 암모니아의 어원이 같은 이유는?

기원전 700년 무렵
올리브기름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를 지탱해 준 두 가지 핵심요소 중 하나

○ 올리브 압착기를 이용해 철학자도 얼마든지 돈을 벌 수 있음을 보여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

기원전 500년 무렵
철의 주물 제작
철제 농기구 · 무기로 국력을 강화해 통일국가를 건설하다

춘추시대에 철기 기술이 발명되지 않았다면 진시황제의 전국 통일도 없었다?!

기원전 429년
세계 최초로 독가스가 사용된 전쟁
전쟁의 패러다임이 바뀌다

○ 기원전 5세기, 펠로폰네소스전쟁에 화학무기인 독가스를 사용한 고대 그리스인

기원전 400년 무렵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
우주 만물이 원자로 구성돼 있음을 주창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

o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가 "원자 같은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라며 그 존재를 부정했다고?

고대 그리스의 압데라라는 도시에 데모크리토스(Démókritos, c. 460~c. 370 BC)라는 유쾌한 성격의 괴짜 철학자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데모크리토스는 스승 레우키포스(Leúkippos, ?~?)와 함께 바닷가에 산책을 나갔다. 그곳에서 그는 머릿속에 한 가지 매우 흥미롭고도 기발한 생각을 떠올렸다. 기원전 400년무렵의 상황이다. "만물은 이 모래처럼 아주 작은 뭔가가 모여서 만들어진 게 아닐까? 더는 나눌 수 없는 궁극의 입자(원자)가 존재하며, 그 입자가 만물을 형성하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획기적이고도 위대한발상이었다. 그는 그 궁극의 입자를 ‘아톰(atom, 원자)‘이라고 불렀다. 이는 그리스어에서 ‘~하지 않다‘라는 부정적 의미의 접두어 ‘아(a)‘와 ‘자르다‘라는 의미의 ‘템네인(temnein)‘으로 구성된 ‘아토모스(atomos, "더는 자를 수 없다‘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어휘다.
어느 날, 데모크리토스는 우연히 진한 치즈 냄새를 맡게 되었다. 그는 이 현상을 자신이 새롭게 구상한 ‘원자론‘의 관점에서 해석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를 해석했다. "치즈 원자가 내 몸속으로 날아 들어왔기 때문에 치즈 냄새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이 치즈를 잘라서 나누고, 다시 잘라서 나누기를 반복하다 보면 결국 더는 자를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것이 바로 원자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명언도 남겼다.
"이 세상에는 원자와 텅빈 공간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것은 모두 견해에 불과하다."

에피쿠로스 철학을 간략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이 세상은 전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 이상도그 이하도 아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몸 전체가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죽으면 그것으로끝이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지금을 살자!‘ 이렇듯 그의 철학은 실재론의 본질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에피쿠로스는 ‘사물은 원자가 우연히 혹은 필연적으로 모이고 흩어진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목적과 사실을 무엇보다 중시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했기에 실재론에 기반한 에피쿠로스 철학은 많은 사람에게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기원전 385 년 무렵
플라톤의 『향연』
와인이 낳은 철학과 민주정

○ 고대 그리스인의 ‘와인=문명인, 맥주=야만인‘이라는 공식 같은 인식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기원전 334 년
향료를 찾아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원정에 나선 숨은 이유

o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배운 과학 식견과 지식을 자신의 군대에 지혜롭게 접목시킨 알렉산드로스 대왕

누구나 한 번쯤들어보았을 법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은 사실 "모든 길은 페르세폴리스로 통한다"라는 말을 패러디해 만든 말이다.

기원전 300년 무렵
고대의 아로마 열풍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가 아로마 사용을 적극 권장한 까닭은?

○ 납 화합물로 고대 그리스 사회에 ‘미백 열풍‘을 불러일으킨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테오프라스토스

기원전 250 년 무렵
알렉산드리아
거대한 소비 도시에 전 세계 지식을 축적하다

○ 무세이온을 건설해 전 세계의 지식을 알렉산드리아에 모으고자 한 이집트왕 프톨레마이오스 1세

지식을 무세이온에 모은다‘라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그 계획을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기기 위해 항구에 정박한 선박에 관리를 파견하여 그곳에실려 있는 책을 모조리 제출하도록 했다. 그러고는전부 사본을 만들어 소장했다고 한다.

"기하학을 배우는 지름길은 없는가?"
"기하학에 왕도는 없습니다."

이는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와 당시 그리스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이주해 살고 있던 위대한 수학자유클리드(Euclid, c. 300 BC)가 어느 날 만나 진지하게 나누었다는 흥미로운 대화 중 한 토막이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세상의 부가 집중되었다. 도시인구는 순식간에 50만 명으로 늘어났고, 금과 은, 그밖의 온갖 사치품을 손에 넣고 싶어 하는 부유한 사람들이 급속도로 증가하면서 거대한 소비 사회가 형성되었다. 사람들의 욕망이 꿈틀대는 이 거대한 도시에서는 납·구리 등 금속으로 금을 만들려고 하는연금술도 발달했다.

기원전 221년
진나라의 중국 통일
소금이 세계사를 바꾸다

○ 소금을 대체하는 짠맛을 내는 분자는 존재하지않는다?!

소금은 인류가 생명을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물질이다. 인간의 신경 시스템은 소금의나트륨 이온(Na+), 염화물 이온(Cl) 없이는 작동하지않는다. 두 이온이 세포 안팎을 드나들면서 발생한전기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소금이 미각에서 중요한역할(짠맛을 담당하게 된 것은 아마도 이 시스템을유지하기 위한 인체의 노력이 아닐까.

기원전 55년(?) 무렵
루크레티우스의 시
뛰어난 통찰력을 지닌 ‘원자론‘을 노래한 그의 시는 왜 배척당했나
①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7,400 행의 라틴어시를 통해 우주 만물이 원자로 이루어져 있음을 주창한 루크레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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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 (다)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절하며 뵈었다’라는 뜻의 ‘배견’과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했다’라는 뜻의 ‘고사叩謝’이다.

「찰십륜포」의 전체 내용은 다시 세 개의 이야기로 나눌 수 있다. 편의상 각각의 이야기에 차례로 ‘만남의 의례 이야기’, ‘처치 곤란 불상 이야기’, ‘건륭과 판첸의 만남 이야기’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한다.

군기대신은 청에서는 황자ㆍ부마는 물론이거니와 황제조차도 판첸에게 고두叩頭를 하니 조선 사신 또한 응당 판첸에게 "절을 하고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拜叩]."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모든 사태는 ‘황제의 명’에 의한 것이었다.

박지원은 귀국길에 연도沿道의 아무 사찰에나 버리고 가자니 자칫 중국의 분노를 살까 두렵고, 그렇다고 그냥 불상을 "들고 입국하자니 물의를 일으킬 것이 뻔하니, 피차의 교계에서 물에 띄워 흘려보내 바다로 보내기에는 압록강만 한 데가 없다."라고 썼다. 이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결국 박명원이 정조의 명령에 따라 불상을 묘향산으로 보낸 것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이다.

박지원은 이런 독자를 겨냥하여 자신이 ‘목도한 바’, 양자의 의례상 지위가 대등했음을 곧바로 드러내는 황제와 판첸의 항례抗禮 장면을 제시함으로써 회심의 결정타를 날렸다. 게다가 박지원은 당시 청에서 화신에 버금가는 권신이었던 복장안이 판첸 앞에서는 차 시중이나 드는 존재였다는 사실도 독자에게 주지시키고 있다.

여기서 좀 ‘비딱한‘ 질문을 던지고 싶어진다. 다른 것은 그렇다 치고, 「찰십륜포」의 이야기들이 정말 박지원이 강조한 대로 ‘팔월 11일‘에 그가 직접 목도한바‘에 근거한 것이었을까? 요즘으로 치면공식 수행원 신분도 아니었던 박지원이『열하일기』의 「찰십륜포」등에 묘사된 장면들을 직접 ‘목도‘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일이었을까?

「찰십륜포」에 실린 ‘건륭과 판첸의 만남 이야기‘는 사실 ‘팔월 11일‘에 일어난일을 쓴 것이 아니다. 불꽃놀이 관람을 위한 두 사람의 만남은 팔월 14일에 일어났다. 그리고 박지원은 두 사람의 만남을 직접 목도하지 않았다.

‘건륭과 판첸의 만남이야기‘는 기껏해야 박명원으로부터 전해들은 바에 근거한 것이었을 따름이다. 심지어 ‘만남의 의례 이야기‘와 ‘처치 곤란불상 이야기‘ 역시 전해 들은 바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뚜렷한 증거가 없는 이상 일단은 박지원의 말대로 팔월 11일에 그가 직접 목도한 바였다고 간주해도 무방할 것 같다.

팔월 11일 자신이 ‘목도한 바’를 기록한 ‘만남의 의례 이야기’와 ‘처치 곤란 불상 이야기’ 바로 다음에 팔월 14일에 있었던 ‘건륭과 판첸의 만남’에 대해 ‘전해 들은 바’를 접속함으로써 박지원이 박명원을 위한 변호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한편, 『열하일기』를 제외한 모든 사료가 불꽃놀이가 팔월 14일의 일이었음을증언한다. 청의 기거주는 팔월 14일 오후피서산장 내 만수원에서 불꽃놀이가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당시 참석자 명단에서박명원 등 조선 사신 3인을 발견할 수 있다. 티베트 사료에서도 불꽃놀이 날짜는팔월 14일이다.

요컨대, 박지원은 치밀한 구성을 통해「찰십륜포」를 읽는 독자의 ‘시간 착오‘를유도했다. 이 시간 착오는 두 가지 효과를노린 것이었다.

첫째, 독자로 하여금 「찰십륜포」 전체를 같은 날의 일로 읽게 하는 것이다. 둘째, 「찰십륜포」 전체를 박지원 자신의 목격담으로 읽게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공히 ‘불‘의 사신 박명원을 위한 변호 효과 극대화에 기여했음은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열하일기』의 열하 이야기에서 관심의 초점은온통 판첸에게 쏠려버렸다고 해도과언이 아니다.

이는 ‘봉불지사‘ 문제 때문에 박지원의 시야가 좁아진 결과였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다른한편으로는 청과 몽골·티베트의 관계에 대한 박지원의 이해 수준이 그다지  높지  못한 데서 비롯된 측면도 있는 것 같다.

결국 봉불지사를 위한 변호의 필요성과 당시의 몽골ㆍ티베트에 대한 박지원의 인식 부족 등으로 『열하일기』의 열하 이야기에는 건륭 칠순 만수절에 대한 좀 더 다양한 각도의 관찰 및 이해가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사라져버렸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당시 열하에서 판첸의 존재감을 고려할 때 설사 귀국 후에 봉불지사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박지원은 아마 판첸과의 만남을 대서특필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추측된다.

게다가 판첸은 이미 열하에서부터 박명원 일행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돌발 사태’의 진원이었다. 따라서 『열하일기』의 열하 이야기가 황제의 칠순 잔치보다는 판첸에 초점을 맞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까지 우리는 박지원의 명성에 가려 『열하일기』를 역사학적 사료의 비판 대상으로 올린 적이 거의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에 순간 등골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느낌이 든다.

이제부터는 『열하일기』에서 적어도 직ㆍ간접으로 판첸과 관련이 있는 부분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충실히 전달한 것이라고 무작정 믿지 말아야 한다. 뜻하지 않은 봉불 혐의로 비난의 대상이 되어버린 박명원과 그 일행의 변호를 위해 박지원이 고안한 주도면밀한 구성의 산물로 보아야 한다.

‘외번外藩’이라는 한자 단어는 ‘바깥 울타리’를 의미한다. 여기서 ‘울타리’는 천하의 중심인 천자, 즉 황제를 보호하는 제후의 역할을 비유한 말이다. ‘바깥’이라고 했으니, ‘안쪽’에도 또 다른 울타리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안쪽 울타리’ 역할을 하는 제후를 가리키는 말은 여러 가지가 있고 또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었지만, 명ㆍ청의 경우 외번에 딱 대응하는 용어를 하나만 꼽자면 ‘종번宗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오늘날 ‘종주宗主-번속藩屬’의 준말로 와전되어 오용되고 있지만, 원래 ‘종번’의 ‘종宗’은 황제의 친족, 즉 종실宗室을 지칭한다. 황제의 아들 가운데 황위를 계승한 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대개 왕작王爵을 받았는데, 종번이란 바로 황족 중 왕작 소유자를 가리킨다.

조선의 대청 관계와 대청 인식이 분노와 원한을 출발점으로 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게다가 조선은 그 분노와 원한을 복수로 씻어내는 통쾌한 순간을 누리지도 못하였다. 씻지 못한 원한은 단시간에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시간 앞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한순간에 사라질 수는 없더라도, 세월이 흐르면 분노와 원한의 기억은 흐릿해지기 마련이다. 당장의 어떤 현실적 필요도 없는 상황에서, 부모 세대가 겪은 원한의 기억을 자식 세대가 고스란히 간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더군다나 영조와 정조는 부자父子가 아닌 조손祖孫 관계라 그만큼 세대 차가 클 수 있었거니와 영조는 1694년생, 정조는 1752년생으로 나이 차도 무려 60년 가까이나 났다.

송시열은 주자朱子를 인용하면서 ‘복수오세설’을 주장하였다. 복수의 의무는 다섯 세대에 걸쳐 유효하다는 말이었다. 이에 따르자면 할머니의 원수인 오랑캐 칙사를 접대하라는 왕명은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었다. 아니, 거부해야 마땅했다. 결국 논쟁은 복수오세설의 승리로 끝이 났고, 김만균에 대한 처벌을 주장한 사람이 오히려 파직을 당하고 말았다.

건륭의 의도가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천하의 모든 이들‘에게 얼마나 잘 먹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먼훗날 21세기 초에 이르러 적잖은사람들이 17~18세기 폭력과 전쟁의 실제를 까맣게 망각하게 만드는데에는 꽤나 성공한 셈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건륭이 이런 효과까지 내다본 것은 아닐 터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변화상 또한 전체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영조와 같은 반청 의식과 조선중화주의는 정조의 시대는 물론이거니와 19세기, 아니 조선 왕조가 망할 때까지도 그 생명력을 잃지 않았다.

그 때문에 17세기 중엽 명ㆍ청 교체 이후의 조선은 이미 멸망하고 없는 과거의 중국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모화사상慕華思想에 발목을 잡힌 나머지 역사를 한 걸음도 전진시키지 못한 채 ‘정지된 시간’을 살았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그러한 비판에서 1704년 명의 황제를 제사하기 위해 만든 대보단은 퇴행적 역사의 상징으로 간주된다.

왕이 존주尊周의 의리에 대해 자나 깨나 선왕의 뜻을 이어갈 생각으로 황단에 망배望拜를 하고, (···) 삼학사三學士 후예들을 발탁하여 등용하고 칠의사七義士들을 한꺼번에 제사 지내고 (···) 의義를 지켜 척화했던 신하들에 대해서는 모두 표창하고 기록으로 남겨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드러내 밝혔으며, 임진년에 공을 세우고 목숨을 바쳤던 신하들도 모두 다 세상에 알렸다.

주나라는 중화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나라이니 ‘주나라를 높인다’는 뜻의 ‘존주’란 곧 ‘존화尊華’, 즉 ‘중화를 높인다’라는 의미이다. ‘황단’은 대보단을 가리키고, ‘삼학사’는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에 끌려가 죽은 사람들, ‘칠의사’는 명나라와 몰래 연락하여 청나라를 치려다가 발각되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다. ‘임진년에 공을 세우고 목숨을 바쳤던 신하들’이란 일본의 침략에 맞서 명나라와 함께 싸운 전쟁의 유공자들을 의미한다.

정조는 조선이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킨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관련 사실을 한데 모아 기록으로 남기려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대개 이 인용문에 나타나는 바와 같은 정조의 존주론尊周論에 주목하였지만, 이 책을 통해 드러났듯이 정조가 현실에서 실천한 대청 외교는 분명 친청 분위기가 농후하게 감도는 것이었다.

정조의 치세에 이르러 박제가, 박지원 등으로 대표되는 북학파 지식인들이 또렷하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정조의 반청 역사의식 계승과 현실의 대청 사대 외교를 모두 사실로 인정하는 전제 위에서,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현상의 공존ㆍ병행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풀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지금 우리는 당시 교전 상대였다는 이유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원수로 여기지는 않는다. 물론 한동안은 높은 담을 쌓고 원수처럼 지냈다. 

하지만 전쟁으로부터 채 40년도 지나지 않은 1990년대 초에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하여 정치·군사적으로는 몰라도최소한 경제적 측면에서는 서로 없어서는안 된다고 여길 만큼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최근 들어 관계가 악화되긴 했지만, 심지어 일본과도 1945년의 해방으로부터 겨우 20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 국교를 회복하지 않았던가. 

세계사적으로는이와 비슷한 사례를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러니일견 모순으로 보이는 정조의 ‘존주‘와 대청 외교도 따지고 보면 그런 사례 중 하나로 꼽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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