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카잔차키를 품고 그리스를 가다!˝

인간의 탁월함, 그 근원을 찾아서

문명의 배꼽 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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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스 카잔차키스를 품고그리스를 가다!"

인간의 탁월함, 그 근원을 찾아서
문명의 배꼽 그리스

그런 까닭에 이 여행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인도 없이는 불가능한일이었습니다. 하여 구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가 쓴 거의 모든 저작들을 구하여, 읽고 또 읽었습니다. 영국의 문예비평가 콜린 윌슨이 그를두고, "이름이 ‘카잔초프스키‘였고, 러시아어로 작품을 썼더라면 그는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을 것"이라 했을 만큼 대단한 문학가였던 그의 소설들은 물론 여행기와 자서전 그리고 지인들과 주고받은 편지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각을 좇을 수 있는것이라면 모조리 읽었습니다.  - P6

어찌 보면 이 모든 것이 그리스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그리스의 참모습은 아닐 테지요. 니코스는 "그리스의 얼굴은 열두번씩이나 글씨를 써넣었다 지워버린 팰림프세스트이다." "라고 표현합니다. 쓰인 글자를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쓰게 되어 있는 양피지인 팰림프세스트처럼 열두 가지의 서로 다른 색깔을 가진 나라 그리스의 속살은 도통 한눈에 파악하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신화나 철학,
정치나 사회, 문학과 예술이라는 하나의 틀로만 바라본다면 그리스의참모습을 찾을 길이 묘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 P7

한 권의 책은 저자 한 사람이 쓴 것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책을쓰기까지 그 저자가 밑줄 그으며 읽었던 모든 책과 깨우침을 준 모든스승들이 함께 쓴 것일 터, 다시 한 번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있을 오류는 모두 저자의 몫임을 밝힌다. - P10

평생 동안 내가 간직했던 가장 큰 욕망들가운데 하나는 여행이어서-미지의 나라들을 보고 만지며, 미지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지구를 돌면서 새로운 땅과 바다와 사람들을 보고굶주린 듯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든 사물을 보고, 천천히 오랫동안 시선을 던진 다음에 눈을 감고는 그 풍요함이 저마다 조용히, 아니면 태풍처럼 내 마음속에서 침전하다가 마침내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고운체로 걸러지게 하고, 모든 기쁨과 슬픔으로부터 본체를 짜내고 싶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 순례>, <영혼의 자서전> 중에서 - P15

이번 여행을 하면서는 일정을 따로 정하지 않았다. 지도 한 장 달랑들고 비행기와 배로 대륙을 건너고 국경을 넘었다. 철도와 버스, 렌터카와 바이크 그리고 도보로 무수한 경계를 넘고 또 다른 경계에 다다르기도 했다. 해 뜨면 떠나고 해 저물면 머무는 ‘노마드‘ 처럼 동가식서가날들을 보냈다. 더러는 낡은 호텔에 묵고 또 더러는 유스호스텔이나 게스트하우스에 묵으면서 향토사학자나 현지 주민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그리스 구석구석을 파고 들어가 그리스의 참모습에 한 발짝씩 다가가려 했다. 그런 방랑자에게 매끼를 챙기는 것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종종 한 끼 식사에도 감사하며 길을 재촉한 꽤 치열한 여행이었다. - P16

즉물궁리卽物窮理
곧 사물에 나아가 그 이치를 궁구해야 한다는 가르침 - P16

그리하여 책과 논문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삼되, 직접 찾아가 그곳 시간의 무덤에서 들려오는 옛 영웅들의 웅변과 민초들의 함성을 만나고자 했다. 이미 무너진 신전의 잔해를 직접 쓰다듬으며 무너지지 않은 문명의 기둥을 확인하고자 했다. 더디고고될지라도 이렇게현장으로 나아가야만 비로소 내가 만나고자 한 문명과 역사를 온전히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그렇게 이해한 그리스를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 싶었다. - P17

그 공간 여행의 출발지를 펠로폰네소스로 정했다. 바로 이곳 펠로폰네소스가 그리스 문명의 어머니이자 서구 문명의 자궁이기 때문이다. - P18

그런 까닭에 ‘그리스‘라는 미궁의 출발점은 펠로폰네소스여야 했다. - P18

더불어 펠로폰네소스는 헬레네의 고향이다. 아시다시피 헬레네는사상 최초의 팜므파탈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여인이다. 바다 건너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와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인 스파르타의 왕비,
오직 그녀를 되찾기 위해 그녀의 남편 메넬라오스와 시숙 아가멤논은전 그리스의 영웅호걸을 불러 모아 피의 응징에 나선다. 무참한 죽음과 엄청난 피바람을 무릅쓴 끝에 메넬라오스는 스파르타의 왕비를 되찾지만, 그녀의 목을 베기는커녕 다시 품에 안고 만다. 헬레네는 마치영웅처럼 귀환했고, 훗날 스파르타에서 여신으로 거듭난다. - P18

바로 그리스, 혹은 그리스인들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마른 스펀지처럼엄청난 수용성을 자랑한다. 숱한 이민족의 침략을 받고 그들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어느새 침략자들을 그리스인으로 만들어버린다. 멋있다고 느끼면 페르시아의 신이건 이집트의 신이건 가리지 않고 올림포스산정에 함께 모시고 경배한다. 심지어 기독교가 그들의 신앙을 완전히대체한 후에도 그 신들의 이름을 살짝 바꾸어 곳곳의 교회에 수호성인으로 삼기까지 한다. - P19

"하느님의 가호가 우리와 함께하시길! 자, 갑시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조르바>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5쪽 - P19

내 삶을 선택할 권리는 나에게 있다

‘탕!‘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의회 앞 신타그마 광장 쪽이었다.
시위대가 운집해 있던 그곳에서 은퇴한 약사가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평생 약사로 일하다가 은퇴 후 연금으로 생활하던 이 노인은
정부의 연금 삭감에 죽음으로 저항한 것이다.
그가 남긴 유서는 다음날 그리스 사회 전체를 술렁이게 했다.
"나는 조국을 믿고 성실하게 일하며 연금을 납부했다.
하지만 조국은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내게 이런 조국을 선택할 권리는 없다.
하지만 내 삶을 선택할 권리는 나에게 있다!"
아테네에 도착하여 공항버스에서 막 짐을 내리려는 순간,
아테네 민주주의의 심장인 신타그마 광장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스는 지중해의 태양 같은 뜨거운 격정과 말라비틀어진 마른풀 같은 무기력이 공존하고, 처음 만난 여행자를 집으로 들여 재워주는 인류애적인 친절과 백주대낮에 불법체류자를 둘러싸고 돌을 던지는 야만이 공존한다. 더구나 이곳은 한때 유럽 최고의 깍쟁이라 불리던 사람들의 후예가 사는 코린토스가 아닌가! - P26

코린토스
번영의 땅이자 약탈의 땅을 가다 - P27

"오래된 조상 아가멤논에서 모레아의 위대한 애국자에 이르기까지고통받는 모레아(모레아는 펠로폰네소스를 가리키는 옛말이다)‘는 재앙과 영광의 충격을 동시에 견디어왔다네. 그러니 그리스 속으로 떠나는 여행은언제나 오래된 어머니인 펠로폰네소스로부터 시작되어야 마땅하지 않겠나. 여기가 바로 그 굶주리고 피에 물든 문명의 뿌리라네." —1 - P28

그러니 이 길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영원한 주제였던 ‘금기를 넘어서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신과 어깨를 겨루던 당대의 영웅조차도결국에는 인간의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신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는
‘나약한 인간의 실제‘에 대한 내러티브가 담긴 비디오 가이드인 셈이다 - P29

코린토스의 첫인상
생기 없는 얼굴과 마주하다
우리는 코린토스 시청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내렸다. 코린토스에 대한 첫인상은 활력을 잃은 ‘주름‘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그 주름은 땡볕에 그을린 농부의 그것도, 우아하고 기품 있는 노신사의 그것도 아니었다. 거리는 누추했고 상가도 쇠락했다. 그리스에서 손에 꼽히는 인구와 그 이름에 걸맞은 관광도시라는 느낌은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웠다. - P31

결국 손짓 발짓을 동원한 희안한 보디랭귀지와 구글 번역기까지 총동원된 끝에 게츠 한 대를 하루 20유로에 빌릴 수 있었다.
‘신이여 우리를 보호하소서!‘
실로 멋진 가격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9월에서 4월까지의 비수기에그리스를 여행한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 P33

그리스는 어떤 일이든 ‘되는 것도 없지만 안 되는 것도 없는곳‘이라 한다. 그리스의 이런 특징을 모르고 이 나라를 방문하면 대개
‘그리스에는 그리스가 없다‘라거나 ‘돌멩이만 보고 왔다‘ 라는 등 불평가득한 후기만 쏟아내기 십상이다. - P34

어쨌든 내가 빌린 차는 유럽인의 체형에 맞춘 액셀러레이터 유격이하데스의 지하 동굴만큼이나 멀었고, 오랜만에 만져본 수동 기어는 연신 딸꾹질을 하며 쉽게 고삐를 내주지 않았다. 나중에 이 문제로 300유로를 배상하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받긴 했지만 그래도 바퀴는 굴러갔고, 교차로마다 시동을 꺼트리기를 몇 차례 반복한 끝에 구코린토스(코린토스는 코린토스와 1858년 대지진 이후 다시 건설한 신코린토스로나뉜다)의 유적지 인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 P35

"여기에 올 때마다 나는 레온 스구로스의 섬뜩한 광기가 느껴진다.
네."
"나프폴리오의 영주 레온 스구로스 말인가요?"
내가 되물었다.
"바로 그 레온 스구로스 말일세. 저기 저 성채의 남쪽 벽에서 자신의애마를 탄 채로 뛰어내렸지."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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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장무덤이 고고학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세 가지 필요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첫 번째 조건은무덤 주인과 순장당한 자가 같은 시대에 죽었어야 한다. 무덤의 주인공이 생을 다한 지 수십 수백년이 흐른 후에야 산 자를 죽이는 것은 순장이 아니라 제사나 희생으로 취급된다. 두 번째 조건은강제성이다. 순장당하는 사람이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목숨을 버린다면 그것은 순장이 아니라순사로 취급된다. 마지막 조건은 종속성이다. 윗사람을 위해 아랫사람이 죽어야 순장이지, 그 반대의 경우는 순장이 아니다. 

이와 같은 동시성과 강제성, 종속성은 순장의 충분조건이 아니라 필요조건이므로 최소한 이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순장 여부를 논할 수 있다.

순장 연구는 한국 고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연구사적 의미를 지닌다. 당시의 사회구조를 규명하는데 순장 실시 여부가 유효하기 때문이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 우리보다 먼저 순장제도에 주목했던중국 학계의 사례를 살펴보자. 흔히 우리가 은나라라고 부르는 국가의 정식 명칭은 상인데, 문헌기록과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종합한 결과 상나라는 고대 노예제 사회였음이 밝혀졌다. 

노예제 사회의 성격을 드러내는 대표적 현상이 바로 광범위하게 실시한 순장제도인데, 이 풍속은 상나라에서 주나라와 춘추전국시대까지 이어졌다. 

순장을 실시한 사람은 노예 소유주이고, 당하는 사람은노예이며, 많은 사람을 순장할수록 노예를 많이 소유했다. 진나라와 한나라 때에 이르러 순장체도가 점차 사라지고 사람 대신 흙으로 빚은 인형을 무덤에 넣게 되는데, 이때부터 고대 노예제 사회가 종말을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순장 실시 여부는 고대 노예제 사회의 징표이다.

결론적으로 북한 학계는 고조선 사회가 이토록 많은 노예를 순장할 정도로 계층 분화가 심화된 노예제 사회였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필자는 강상묘 등의 무덤이 순장으로 인정받기 위한 세 가지 필요조건, 즉 동시성, 강제성, 종속성을 만족시키지 못했으므로 순장묘라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강상묘를 순장묘로 보려는 북한 학계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으나 순장을 통해 당시 사회의 면모를 보려는 시도 자체는 바른 방향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중국의 사례를 보아도 그렇고 한국사에서도 순장이 본격적으로 실시되던 때와 소멸되던 때를 확인할 수 있으며 그 사이에 일어난 사회적 변혁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순장은 단순한 장례 풍습의 의미만이 아니라 계층분화 현상과 신분제 사회의 실체를 규명하는 실마리라 할 수 있다.

순장은 단순한 장례 풍습의 의미만이 아니라 계층분화 현상과 신분제 사회의 실체를 규명하는 실마리라 할 수 있다.

확실한 사실은 인간 존엄성에 대한 고대 사회의 인식은 현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대 사회를 유토피아처럼 그려서는 안 된다. 소수의 지배 집단이 사회적 특권과 부를 독점하고 대다수의 백성은 고통 속에서 젊은 나이에 비참하게 생을 마친 경우가많았다. 순장된 인골들은 고대 사회의 내면을 숨김없이 생생하게 보여준다.

한편 이 무덤의 주인공이 건장한 남자일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키가 146센티미터 정도 되는 작은 체형의 40대 여성이란 점도 확인되었다. 지배자가 당연히 남성일 거라 추측했던 선입견이 잘못되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은 말을 탈 때 사용하는 안장과 발걸이에서 볼 수 있는 푸른 형광 물체이다. 비단벌레를 잡아 날개 수천 개를 이어 붙이고 그 위에 화려한 무늬를 투조해 금판을 씌운 것이니, 요즘 시중에 판매되는 명품이 제아무리 고가라도 이에 비할 수 있을까? 

이같은 후장품들은 아무나 누릴 수 없는 휘황찬란함을 자랑한다. 그렇다면 우리 선조들은 왜 이렇게까지 장례에 막대한 투자를 했을까? 바로 이승의 안락함이 저승까지 이어진다는 계세사상 때문이다.

이후 신라 지증왕이 502년에 순장을 폐지하면서 후장의 풍습도 사라져갔다. 경쟁적으로 대형 무덤을 축조하던 신라의 사회적 분위기는 6세기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 순장과 후장을 폐지하고 현실세계의 삶에 무게를 두면서 산성을 축조하고 군사력을 키운 것이다. 

반면 가야는 여전히 종전의 장례 풍습을 버리지 못했다. 어찌 보면 가야는 망하고 신라는 흥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중국에서 순장이 사라진 배경에는 유교의 영향도 있겠으나 많은 사람을 아깝게 희생시킬 바에야 노동을 시키거나 군대로 동원하는 것이 낫다는 현실적 이유가 작용했다. 진시황릉 병마용갱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된다.

고대인들은 사후세계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한나라 이후 중국에서는 불로장생하는 약과 선도를 갖고 있어 장생을 주관한다는 서쪽의 여신서왕모를 찾아가 신선이 되는 것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 

대형 고분의 시대에서 불교 사원의 시대로
고대인들이 내세관을 바꾼 결정적인 사건은 불교의 도입과 공인이다. 살생을 금하는 불교 교리를따르게 된 신자들에게 순상은 용납하기 어려운 풍습이 됐다. ‘공수래공수거‘라는 가르침을 생각하면 무덤에 많은 부장품을 넣는 일이 부끄럽게 여겨졌을 것이다.

왕릉을 만드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소음과 순장당하는 사람의 비탄으로 그득하던 신라의 수도 경주에는 황룡사와 분황사 등 수많은 사찰이 세워져 불국토가 구현됐다. 초대형 무덤을 축조하던 토목기술과 건축기술, 화려한 부장품을 만드는 금속기술은 사찰과 탑 그리고 불상과 각종 공양구를만드는 기술로 변했다. 사회가 바뀐 것이다. 대형 고분의 시대에서 불교 사원으로의 이행은 다시말해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한편 무덤과 인골이 들려주는 생생한 이야기는 중세 사회에서 또 다른 형태로 계속된다.

수도유적,
삼국의 심장이 깨어나다

앞서 살핀 것처럼 고대 사회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순장자와 피순장자가 엄격히 구분되는 사회였다. 삶의 여건도 수도와 지방 사이, 즉 영위하는 공간에 따라 크게 달랐다. 과거에도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삼국시대의 도성 혹은 왕성 등을 일컫는 수도유적은 심장부 역할과 동시에 모든 차별의 발원지로 자리했다.
3부에서는 삼국의 수도유적을 면밀히 살펴 고대 국가의 진면목을 확인할 것이다.

작은 취락이 거대한 도시가 되기까지
수도유적과 방어시설, 고대 국가 출현의 상관관계
수도유적이란 용어는 역사학 영역에서 다소 생소한 표현으로 왕궁과 왕성, 도성과 왕경 등을 포괄하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수도유적이 아우른 다양한 내용을 영어로 번역하면 모두 ‘royalpalace‘나 ‘royal capital‘이란 단어로 귀결된다.

이처럼 환호를 짓지 않더라도 높은 산 위에 위치하면서 방어력을 최대로 높인 고지성 취락이 발달하기도 한다. 대전의 보문산 유적은 해발고도가 457 미터나 돼 일반인은 쉽게 올라갈 수 없을 정도인데, 정상부에서 초기 철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됐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높은 산 위에 거주했음을보여준다. 극단적인 고지성 방어취락의 한 사례다.

취락의 발전과 계급의 탄생
청동기시대부터는 신석기시대까지 이어져 오던 평등한 사회가 깨지며, 잘 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으로 나뉜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가진 집단과 못 가진 집단 간의 대립, 사회적 갈등, 긴장된분위기 등이 청동기시대를 대변하는 이미지인 것이다. 이때부터 등장한 환호취락은 지속해서 발전한다. 방어적인 측면을 강조한 취락은 산 위로 올라가고, 많은 주민이 사는 취락은 나지막한 구릉위에 마련된다. 환호는 방어기능 외에도 마을 안팎을 나누는 역할을 했는데, 이 때문에 수도 안에사는 중앙인과 바깥에 사는 지방인을 구분 짓는 차별의 시발점이 됐다. 이렇게 발전한 취락을 중심취락 혹은 거점취락이라고 부른다.

한편 길성리처럼 대규모의 토성을 축조한 것은 아니지만 세종시에서는 취락 안에 자신의 가옥만을 위한 도랑을 두르고, 외관을 멋지게 꾸미며, 창고에 잔뜩 물건을 쌓아놓은 고위층 호화주택이발견되기도 했다. 지금은 과거의 지명이 됐지만, 연기 나성리 유적이라 이름 지어진 이곳에서는 금강과 미호천 유역을 무대로 성장한 지방 우두머리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지방 도시들은 형성초기에는 중앙의 수도와 경쟁했지만, 국가체제를 정비할수록 독자성을 상실해 중앙에 종속된 지방도시로 강등되었다.

어떤 연구자의 통계에 따르면 남한 지역에만 2000개가 넘는 성이 존재한다. 조선 전기의 문나라를 지키는 10가지 방책 중 ‘성보를 수선하고 관방을 정하는는신이자 학자였던 양성지일‘을 거론하는데, 이를 달리 말하면 성곽을 잘 관리하는 것이다. 즉 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산성을 축조하고 관리하는 일은 중요국방사항에 포함됐다.

서울의 몽촌토성과 석촌동 고분군도 일반인이 방문하면 언제든지 발굴현장을 관람할 수 있도록시스템화했다. "아저씨,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나가주세요!" 같은 말을 외치는 조사원은 이제찾아볼 수 없다. 이제는 밀실에서 전투적인 자세로 속전속결 진행하는 발굴조사 대신 공개된 장소에서 여유를 갖고 교육과 관광 효과까지 누리는 방향으로 발굴조사가 전환되고 있다.

도다이지를 건설하는 데에도 백제계 인물들의 역할이 컸다. 대표적인 인물이 행기라는 승려다.
그는 대규모의 사찰을 짓기 위해 많은 희생을 감수하는 백성들의 고통을 어루만지고 정신적으로달래주며 빈민 구제사업을 벌였다. 그 결과 민심이 흉흉해지는 일이 미연에 방지되었다. 거대한 사원을 지은 기술자는 백제인이었으며, 대불에 쓸 금을 채취해 바친 이도 백제인이었다. 당시 백제는망했지만, 백제계 유민들이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건축 토목분야는 물론이고 불교, 회화, 음악 등여러 분야를 주도하며 일본 고대 문명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던 것이다.

풍납토성의 우월함은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설명할 수 있다. 당시로는 최첨단 토목기술인 판축기법을 사용했는데, 중국에서 유래한 이 기술은 나무로 틀을 짜고 그 안에 흙을 채운 후 나무나 돌로만든 공이로 흙을 다져 강도를 높이는 공법이다. 백제는 중국과 다른 풍토, 토질을 지녔기에 풍납토성에는 백제식으로 변형한 판축공법을 적용했으며 부엽공법을 추가했다. 부엽공법이란 흙과 흙사이에 부직포를 깔 듯 나뭇잎과 줄기를 깔아서 토층 간의 마찰력을 높이고 이 층을 통하여 구조물에 스며든 물이 배수되게 하는 공법이다. 요즘 토목공학에서 이야기하는 지오텍스타일 Geotextile 공법과 동일한 원리로, 훗날 김제 벽골제와 같은 제방을 축조할 때 자주 활용했다. 이런 최첨단의 판축공법과 부엽공법은 백제인에 의해 일본으로 전래돼 토성과 궁궐, 고분, 제방 축조에 활용되었다.
이렇게 풍납토성을 짓는 데는 최첨단 기술과 최고의 기술자가 동원되었다. 풍납토성이란 걸작을만든 이들은 당대 최고의 기술자임이 틀림없다.

이처럼 화장실은 왕족과 귀족들의 일상 생활상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당시의 환경과 위생 상태를보여준다. 오물에 섞여 있는 기생충알을 통해 위생 상태를 알 수 있으며 소화되지 않고 배출된 음식물을 통해 식생활을 엿볼 수도 있다. 실수로 화장실에 떨어뜨린 짚신이나 목간 같은 유기질 유물도 소중하다. 이처럼 화장실의 고고학은 왕궁과 왕릉 같은 유적만으로는 알 수 없는 과거의 은밀한모습을 보여주기에 그 나름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

교류의 길,
글로벌 삼국시대를 열다

3부까지 땅에서 발견한 유물과 유적을 통해 삼국시대를 탐험했다면, 이제는 고대선인들이 교역했던 3개의 길을 따라가 볼 차례다. 위도가 높은 지역으로 떠나는 초원길, 사막과 오아시스로 이어지는 길, 그리고 바닷길을 통해 중국과 일본을 넘어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까지 대외교섭의 범위를 넓혔던 삼국시대의 흔적을 함께 추적해보자.

초원길에서 시작된 다문화의 역사
한반도 최초의 국가, 고조선의 다양한 대외관계

그동안 우리는 이런 실상을 보지 못한 채, 동북아시아만을 보도록 강요받아 왔다. 한국과 중국, 한국과 일본의 관계만을 바라보는 좁은 시야 때문에 한과 경쟁했던 고조선을 조망하며 ‘외로운 동쪽의 섬나라‘였던 우리의 처지를 한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조금만 시각을 넓히면 고조선과 같은 시기 고대 국가를 형성하며 비슷한 운명에 처했던 여러 세력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만 그토록 외롭게항쟁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한국은 동쪽의 고요한 은자의나라가 아니었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에 자리잡고 유라시아 곳곳의 이웃들과 다양하게 교섭했다. 그리고 당시 이웃을 맺었던 나라들 중 일부는 지금도 국가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21세기를 주도할 후손들에게 넓은 세계를 바라보는 통찰력과 시각을 전해줘야 한다. 앞으로 ‘코리안‘이란 정체성은 태어난 장소와 얼굴 형태, 핏줄을 통해 정해지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코리안의 인종적 스펙트럼은 훨씬 넓어질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민이기에 총을 어깨에 짊어지고 야간 보초를 서며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젊은이들의 얼굴도 지금보다 다양해질 것이다. 이들에게 대한민국의 미래를 맡겨야 한다.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이 지닌 공격성 때문에 곳곳에서 파열음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상호공존을 원칙 삼아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짜야 할 것이다. 이때 역사학은 어떻게 공헌할 수 있을까? 역사학은 과거의 역사에서 긍정적인 교류 모델을 찾아내 국가 발전전략 수립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돌궐족의 유적은 지금도 몽골지역 곳곳에 남아 있다. 그들은 수백 년에 걸쳐 서쪽으로 계속 이주해가면서 혼혈을 거듭했고 따라서 생김새가 점차 변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면서 위구르족,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이 모두 투르크계 국가이다. 투르크 벨트의 동쪽에 해당하는 카자흐스탄 사람들은 우리와 가장 비슷한 생김새를 지녔다. 그리고 서쪽으로 갈수록 백인에 가깝다. 이런 양상은 돌궐족의 이동과정 중 생성된 변화다.

한편 기원전 6세기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에 걸친 대제국 페르시아를 건국한 고레스(키로스) 왕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온 유대인들을 해방시키면서 인종과 종교, 언어가 다르다고 차별하지 말고 모두를 공평하게 대하라 명령했다. 세계 최초의 인권 선언인 셈이다. 이러한 관용과 포용으로고레스 왕은 제국을 유지했다. 고레스 칙령은 점토로 된 원통에 새겨졌으며, 훗날 발굴돼 영국의브리티시 뮤지엄에 전시되어 있다. 복제품은 뉴욕의 UN 본부에 걸렸다. 대한민국이 제국과 같은강대한 국가가 되려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여전히 순수한 단일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고집하며 다문화 사회를 거부할 것인가?

중앙아시아 속 한국 고대사의 흔적들
소그드족의 벽화에 등장한 고구려인
중국 서안에서부터 우즈베키스탄, 이란, 터키, 로마로 이어지는 길은 대부분 황량한 사막길이다.
중간중간 섬처럼 분포하는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이어지는 여정은 낭만적이기보다 목숨을 건모험에 가깝다. 그러나 그 끝에 다다른 목적지는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장사치들은 ‘대상‘ 혹은 ‘캐러밴caravan‘ 이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매번 목숨 건 모험의 끝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내게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을 몇 군데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 사막길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와 이란의 이스파한을 꼽는다. 특히 사마르칸트에 있는 비비하눔 모스크의 눈 내리는 풍경은 잊을 수가 없다.

소드그족은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입에다 꿀을, 손에는 아교를 발랐다고 한다. 꿀처럼 달콤한 말로 상대방을 현혹해 돈을 벌고, 한번 손에 들어온 돈은 절대 놓치지 말라는 의미다. 이들은 이 어린 시절의 배움을 교훈 삼아 천하제일의 장사꾼으로 자란다. 수나라와 당나라는 물론 신라와 일본까지 진출해 장사를 벌였던 이들이 바로 소그드족이다.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대개 소그드와 투르크, 몽골의 혼혈인데, 자칫 이들을 상대로 물건값을 흥정하려 들었다간 손해를 보기 쉽다. 필자도 시장에서 흥정에 실패해 손해를 본 후 역시 소그드의 후예는 다르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왜 사마르칸트를 조사해야 할까?
국제관계학을 전공하는 분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이다. 국익을 위한 이합집산이 무궁무진하게 반복되는 외교 무대에서 대한민국이 살아남으려면 항상 우리편을 들어주는 국가가 셋 이상은 있어야 하는데, 가장 유력한 후보는 단연 중앙아시아의 국가들이라는 것이다. 중국이라는 초강대국 주변에서 생존 전략을 모색해야 하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우리와 비슷한 입장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을 우리의 전략적 파트너로 삼을 수 있다면 얻을 수 있는 것은 너무나도 많다.

이제 대한민국도 민족사를 넘어 세계사 연구에 공헌할 때가 되었다. 그래서 욕심을 내 참여한 것이 2018년부터 시작한 시베리아 남부의 거대왕릉인 쿠르간 조사다. 몽골과 러시아, 카자흐스탄과중국이 만나는 알타이지역 동편에는 러시아에 속한 투바공화국이 있고, 여기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르잔 유적이 있다. 이 유적이 유명해진 것은 1호분과 2호분, 단 두 기의 쿠르간을 조사하면서부터이다. 특히 아르잔 2호분은 러시아와 독일 연구팀이 공동 조사한 것으로, 세계사 서술을 바꿀만한 위대한 발견을 이뤄냈다. 기원전 6세기 무렵 흑해 연안에서 발생한 스키타이 문화가 점차 동으로 퍼졌다는 기존의 정설을 뒤집은 것이다. 기원전 9~8세기에 이미 스키타이 문화는 아르잔에서발생했으며 점차 서쪽으로 퍼져나간 사실이 입증되었다.

비록 한국사와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더라도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유적이라면 조사와 보존에 뛰어들어야 한다. 민족사를 넘어서서 인류 공동의 역사 연구에 앞장서는 대한민국이 되어야 진정한 선진국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내일을 앞당기기 위해 젊은 연구자들이 지금도 현장에서 땀 흘리고있음을 밝히며, 그들이 진심으로 자랑스럽다. 그들은 우리의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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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관심이 많은 대중들의 사랑을 잃은 데에는 역사학자들의 책임도 크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특히 세 가지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폭증하는 새로운 자료를 제대로 정리하고 보급하지 못했다. 매년 지하에서 수만 점의 유물이 출토되면서 과거의 통설이 무너지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자료를 활용한 역사의 복원에 소홀한결과, 고대사 해석의 일등 사료인 고고학적 자료가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둘째, 역사하 고유의 방법이라는 도그마에 빠져 눈부시게 발전하는 자연과학과 공학, 통계학, 법의학 등 인접 학문의 방법론을 활용한 융복합적 연구에 소홀했다. 대형 고분이나 토성 축조의 과학적 원리를 설명할수 있는 역사가는 없다. 학제간 연구가 절실한 시점이다.

셋째, 한반도라는 좁은 공간만을 대상으로 연구와 교육을 전개했다. 그 탓에 한국 고대사회의 특징을 외국의 사례와 비교하여 세계사적 보편성과 한국적 특수성을 설명해내는 비교사적 시각이 크게 부족하다.

유물과유적,
삼국시대의 타임캡슐을 열다

한국 고대사학자는 이제 옛 서적만을 뒤적이며 책상에 앉아 고고하게 연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딛고 선 땅 위, 혹은 땅 아래 남겨진 흔적을 찾아다니며 보물을캐듯 유물과 유적을 찾아 나선다. 한계가 분명했던 우리 고대사 연구를 가능성의 영역으로 확장시킨 유적과 유물의 가치 그리고 융합연구의 필요성을 함께 살펴보자.

한국 고대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런 푸념을 접한 사람들은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 같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냐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실제 참고할  내용은 그렇게 많지 않다. 조금 과장하자면 아침 일찍일어나 맘먹고 읽기 시작하면 저녁 즈음 더는 넘겨볼 책장이 남지 않을 정도다. 게다가 『삼국사기』는 12세기, 『삼국유사』는 13세기에 쓰였으니 삼국이 형성되고 천 년이 더 지난 후에야 작성된 것이다. 그러니 각 책의 저자인 고려시대 유학자나 불교 승려의 역사 인식에 따라 상당 부분 잘려 나가고 왜곡되었을 터. 

두 사료 모두 삼국시대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금석문과 목간 자료를 통한 연구
다행히 불타거나 소실된 사료 외에 채 발견되지 않은 사료가 남아 있다. 우리가 두 발로 딛고 서는땅 위 혹은 아래에 말이다. 하나의 사료를 발굴할 때마다 학계는 극적인 순간을 맞이한다. 중진 원로들이 쓴 논문 수십 편이 와르르 무너지는 도미노처럼 힘을 잃을 정도로 정설을 뒤집는 사실들이드러나기 때문이다.

유물과 유적, 땅에서 나오는 빅데이터
땅에 누워 입을 벌리고 떨어지는 사과를 기다릴 수만은 없는 것처럼 가끔, 우연히 발견되는 금석문과 목간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다. 반면 땅속에서 발견되는 매장문화재, 즉 발굴되는 실물자료는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조금 힘들더라도 쏟아지는 고고학적 물질자료에 눈을 돌려 보석을 캐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토기, 기와, 철기, 목기 등이 쏟아져 나오는데 우리는 이것을 ‘남겨진 물건‘이라 해서 유물이라 부른다. 유물이 묻혀 있던 무덤이나 집 자리, 토기나 기와를 굽던 가마 같은 구조물들은 유구라 부르며, 유구와 유물이 묻혀 있는 공간은 유적이라 부른다.

현행법률상 유적을 발굴하면 2년 이내에 반드시 정식 보고서를 발간해야 하는데, 어떤 경우는 한 권으로도 충분하지만 어떤 경우는 유적 한군데를 조사한 후 기록한 내용이 보고서 10권 분량을 훌쩍 넘기는 경우도 있다. 매년 엄청나게 많은 자료가 쏟아지는 셈이다.

당시 한반도 남부에 살던 사람들은 금속기 문명을 기초로 쌀농사를 지으며 잉여 생산물을 거두는 문화를 영위했다. 한정된 농지와 물을 둘러싼 경쟁이 심해지면서 자연스럽게 갈등과 분쟁이 일어났고, 그것이 증폭되어 전쟁과 살인이 나타났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각종 방어시설을 설치한 방어취락은 당시 사회가 극도의 긴장 관계에 놓여 있었음을 증명하는 자료다. 쌀농사로 풍요를 누렸지만, 결코 평화롭지는 않았던 금속기 문화는 일본 북부 규슈를 기점으로 일본 열도 곳곳에 급속도로 번져나갔다.

정치사적으로 국가 형성 과정을 밝히려는 연구자에게도 고고학 자료는 좋은 재료다. 평화롭고 평등한 사회가 전쟁을 거치면서 어떻게 군사를 조직해 나갔는지 추적할 수 있다.

무덤이 말해주는 고대의 지배구조
한반도 청동기시대의 대표 유적인 고인돌을 통해서도 당시의 사회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먼저 밝혀둘 것이 있다. 고인돌의 원래 모습은 상석이라고 부르는 큰 돌 아래 사면을 돌로 감싼 폐쇄 형태다. 우리가 쉽게 접하는 만화나 교과서 속 고인돌 이미지는 대개 큰 돌(상석)을 두 개의 고임돌(지석)이 받치고 있는 형태인데, 이는 후대에 도굴꾼에 의해 양쪽 돌이 떨어져나간 후의 모습이다.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은 있는 자와 없는 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구분을 의미한다.

무덤에서 나오는 무기와 마구는 당시의 군사조직과 전쟁방식을 대변한다.

초대형 무덤들은 5세기 즈음 성행하더니 6세기에 이르러 점점 축소되고 유물부장량도 줄어들었다. ‘율령에의한 지배‘가 본격화되며 나타난 변화다.
결국 율령 지배 이전의 무덤은 사람의 등급을 매기며 지배구조를 표현하는 장치로활용되었던 것이다.

부산 동래구 복천동 고분군에서 처음 발견된 쇠로 만든 말 투구는 4세기 중엽 고구려 고분인 안악 3호분의 벽화를 떠올리게 한다. 기수만이 아니라 말까지 온통 갑옷과 투구로 무장하고 있는 그림으로, 중장기병을 표현한것이며 비유하자면 현대의 탱크부대와 같다. 긴 창을 들고 말의 돌파력으로 적진을 붕괴시킨 후 보병들이 들이닥쳐 뒷마무리하는 탱크부대의 전술로 동북아시아 최강자로 우뚝 선 이가 바로 광개토대왕이다.

대성동 이외에도 한반도 남해안에서는 일본에서 제작했거나 일본의 영향을 받은 왜계 토기가 종종 출토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자료를 가지고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학자는 없다. 가야와 백제, 신라 등 한반도의 주민들이 일본 열도에 건너가 남긴 유물의 양에 비하면 왜인들이 한반도에남긴 유물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 열도 곳곳에서 한반도 주민들이 무리를 이루어 건너간 흔적이 엄청나게 많이 발견되었고 그후 문명이 발전하는 양상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밥그릇까지 규제한 율령의 고고학
삼국시대의 법령, 즉 율령에 표현된 다양한 물질문화의 양상을 밝히는 것을 ‘율령의 고고학‘이라부른다. 이와 관련해 사비기라 불리는 6세기 전반부터 7세기 후반 백제의 무덤에 적용된 율령의 고고학을 살펴보자.

당시 사용한 시루의 모습은 충청,전라, 경상지역의 것과 비슷하다. 한반도 남부 주민들이 규슈 북부에 이주, 정착하면서 식문화를 이어간 것이다.

5세기에 접어들자 규슈 북부를 넘어 나라, 오사카,
교토, 시가 등지에서도 시루를 사용하는 가구 수가 엄청나게 증가했는데, 그 형태가 규슈의 경우와같이 충청도나 전라도 지역의 것을 쏙 빼닮았다. 이는 백제계 주민들이 일본 열도의 심장부로 대거이주, 정착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나라의 난고유적은 한반도 주민들이 대거 이주해 일본 사회의 문명화에 크게 공헌한 사실을 입증하는 대표 사례다. 이 유적을 발굴한 일본의 고고학자들은 한반도 이주민들이 철기와 구슬을 만들고, 말을 키우는 문화를 영위하며 일본 사회의 문명화에 크게 공헌했음을 밝혔다. 

고대 사회에서 말은 군사력과 정보력, 물류의 수단이었고 고기와 가죽으로 부를 축적하는 재산이었다.

비명횡사한 부왕을 기리는 부여의 능사, 먼저 죽은 아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왕흥사 역시 발굴조사 결과 전모가 드러난 유적이다.

한편 익산 미륵사가 무왕과 신라 출신 선화공주의 협력으로조성되었다고 우리에게 말해준 문헌은 13세기에 쓰여진 『삼국유사』인데, 미륵사지 서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사리봉안기가 발견되면서 800년 통설이 무너졌다. 문헌에는 보이지 않던 사택씨 왕후가 등장했고 무왕의 왕비가 누구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시작됐다. 결국 미륵사를 창건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까지 논쟁이 이어졌는데, 결과적으로 무왕의 왕비가 여러 명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이제는 익산 쌍릉에 묻혀 있는 인물이 누구인지를 밝히려는 발굴조사가 이어지면서 7세기전반의 백제사를 새로 써야 할 정도로 통설을 뒤엎는 사실이 속속 발견되고 있다. 이처럼 땅에서새롭게 출토되는 자료에 의해 기존 정설은 붕괴되며 새로운 연구 과제가 지속적으로 창출되고 있다.

역사학자의 연구는 역동적이어야 한다
1부의 결론은 고대사를 연구하는 사학자의 엉덩이가 더 가벼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정된 문헌자료만 가지고 연구실에 틀어박혀 씨름하던 시대는 지났다. 국내는 물론이고 국외 답사가 필수인 시대다.

이때 개로왕이 감행한 대규모 토목공사를 『삼국사기』는 증토축성土築城이라 부른다. 그러데 그 표현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았으니, 수수께끼 같은 의문을 풀겠다며 많은 역사학자들이 달려들었다.
‘증토‘란 ‘흙을 찌다‘란 의미인데, 흙을 단단하게 다진 것이라고 보거나 많은 흙을 모았다는 식으로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명확한 답을 얻었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해답은 바로 옆 나라중국의 섬서성 유림 지역의 통만성에 있었다. 중국 역사서인 『진서」에서 대하라는 나라를 세운흉노족 출신의 혁련발발이 ‘만 가지 오랑캐를 통일했다‘는 의미의 통만성을 쌓는 정황을 설명할 때증토축성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중국 학자들이 통만성을 발굴조사해 성을 쌓은 재료를 분석하니 황토와 석회가 사용되었음이 밝혀졌다. 황토와 석회에 물을 섞으면 화학반응이 일어나 많은수증기가 발생하는데, 고대인들은 이 현상을 보고 흙을 찌다, 즉 증토라고 표현한 것이다. 결국 백제도 토목, 건축 공사에 석회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커졌다. 이 사례는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는 연구자가 한국이란 틀 안에만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앞으로 역사학자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같은 역할을 맡아야 한다. 고고학자가 발굴한 유물을 가지고 화학자와 함께 분석하기도 하고, 토목공학자와 함께 공학적 원리를 규명하는 식으로 새로운연구 방법론을 개발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역사 연구는 퇴보할 수밖에 없다.

사학자라면 과거의 해석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역사는 그런 질문과 대답으로 시작되고 이어지며 미래로 나아간다.

무덤과 인골,
고대인이 말을 걸다.

긴 시간 동안 과거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해온 무덤과 인골은 미처 알지 못했던우리 역사를 밝히는 길잡이가 된다. 그렇지만 인골이 중요한 연구 자료로 인정받기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 고고학과 고대사 연구에서 인골은 어떤 방식으로 다뤄졌을까. 인골 연구의 궤적을 살피며 죽음이 아닌 삶을말하는 생생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땅속에서 복원한 인류의 자서전

고고학 연구의 블루오션, 인골
무덤은 오래전부터 고고학적 자료이자 유구로 중요하게 다뤄졌지만, 인골의 경우는 좀 달랐다. 간혹 인골 자체나 그 흔적이 출토되었다 하더라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이를 고고학적 자료로 인식하는 자세도 부족했다. 인골이 고대사 연구의 일 등급 자료라는 것을 깨달은 것도 최근의 일이다.

인골의 체계적인 수습, 정리에서부터 사망 원인이나 생시에 앓던 질병, 습관, 영양 상태 등을 밝히기 위해서는 여러 분야 전문가들의 협업이 필요하다. 발굴조사 기술이 향상되고 체질인류학이나법의학 등 유관 분야 전문가들과의 융복합적인 협동 연구가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하였으니 과거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영역과 깊이로 연구의 범위가 확장될 것이라 믿는다. 이제부터는 소중한고고학적 자료로서 인골이 우리에게 전해준 이야기들을 살펴보자.

사망할 때 이나이가 모두 제각각이기 때문에 매장의 과정을 상세하게 고려하지 않고서 가족 관계를 추정하는것은 옳지 않다. 이후 고고학적 발굴조사에 법의학자와 형질인류학자가 참여하면서 기존 연구에서빚어졌던 오류가 대거 수정되었다.

심지어 경상도 내륙지방에서도 외이도골종에 걸린 여성 인골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해안가의해녀가 내륙으로 시집을 갔다는 조금 과감한(?) 추정도 가능하게 한다.

경산 임당동 고분군은 진한에서 신라에 걸쳐 장기간 만들어진 무덤들인데, 발굴 결과 유례가 없을정도로 많은 인골이 출토되었다. 현재 발견된 인골 대부분은 영남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200여 개체의 인골 중에서 편두를 한 두개골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진한과변한은 물론 신라와 가야에서도 편두를 실시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고구려 벽화 고분 중에 개마총이란 무덤이 있는데, 여기 금동관을 쓰고 있는 무덤의 주인공역시 편두로 표현되어 있다. 삼국시대에 편두는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광범위하게 시행되던 풍습이었을까.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한국만이 아니라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태평양, 중남미 등편두를 시행했던 지역을 대상으로 삼아 비교 연구할 필요가 있다. 역사학자만이 아니라 고고학자,인류학자, 민속학자, 법의학자 등 여러 분야의 협업 없이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다.

먼저 와 있던 조몬인과 뒤늦게 들어온 야요이인이 섞이면서 현재의 일본인의 얼굴 생김새를 갖췄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이런 설을 뒷받침해준 것이 야마구치현 도이가하마#유적이다. 동해를 바라보며 해안가에 직교하는 방향으로 형성된 사구 위에서 수많은 야요이시대 무덤이 발견됐고 이후 상태가 양호한 인골을 300 개체 이상 발굴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됐다. 가슴에 가마우지를 안고 매장된 무당 여인, 상반신에 15발 이상 화살촉을 맞고 사망한 영웅적인 인물 등의 유골로 유명세를 탔지만, 가장 중요한발견은 이들의 형질적인 특징이 선주민인 조몬인과 달랐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렇게 단순한 기준으로 인종을 나눌 수는 없다. 수천 년 간 서로 다른 인종 간 혈통이 섞였기에 전형적인 조몬인과 야요이인의 얼굴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주나 원거리 혼인이 활발하지 않았던 일본 역사의 특징 때문인지 몰라도 일본의 거리를 걷다 보면불시에 과거의 조몬인이나 야요이인을 마주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수많은 유물이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거나, ‘태왕릉‘이란 글자가 떡하니 새겨진 전돌이 발견되어도 주인공을 쉽게 확정할 수 없는 신라와 고구려 왕릉에 비해,
변변한 유물도 발견되지 않았던 쌍릉대왕묘의 주인공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인골 덕분이다.

한편 북한 학계는 발견된 인골을 과학적 방법으로 측정한 결과 5011년 전에 탄생한 사실이 밝혀져서 기원전 3000년 이전에 단군이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기원전 2333 년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는『삼국유사』 기사보다 단군 조선의 실제 건국 연대가 훨씬 이전이라는 주장인 셈이다. 무덤의 구조와 금동관이 고구려식인 것은 훗날 고구려인들이 단군릉을 개축하고 금동관을 넣은 결과라고 강변했다. 기원전 30세기 이전에 고대 국가가 발생했다는 주장은 세계사의 상식을 뒤엎는 것인데, 북한학계는 이러한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거듭 무리수를 두고 있다.

결과적으로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대동강 문명이 세계 4대 문명보다 더 오래되고 우수하다는 주장, 나아가 인류의 기원지가 아프리카 동남부가 아니라 평양이라는  기상천외한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나가도 너무 나간 북한 학계의연구 성과는 과학과는 동떨어진 처지에 빠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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