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장무덤이 고고학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세 가지 필요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첫 번째 조건은무덤 주인과 순장당한 자가 같은 시대에 죽었어야 한다. 무덤의 주인공이 생을 다한 지 수십 수백년이 흐른 후에야 산 자를 죽이는 것은 순장이 아니라 제사나 희생으로 취급된다. 두 번째 조건은강제성이다. 순장당하는 사람이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목숨을 버린다면 그것은 순장이 아니라순사로 취급된다. 마지막 조건은 종속성이다. 윗사람을 위해 아랫사람이 죽어야 순장이지, 그 반대의 경우는 순장이 아니다.
이와 같은 동시성과 강제성, 종속성은 순장의 충분조건이 아니라 필요조건이므로 최소한 이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순장 여부를 논할 수 있다.
순장 연구는 한국 고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연구사적 의미를 지닌다. 당시의 사회구조를 규명하는데 순장 실시 여부가 유효하기 때문이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 우리보다 먼저 순장제도에 주목했던중국 학계의 사례를 살펴보자. 흔히 우리가 은나라라고 부르는 국가의 정식 명칭은 상인데, 문헌기록과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종합한 결과 상나라는 고대 노예제 사회였음이 밝혀졌다.
노예제 사회의 성격을 드러내는 대표적 현상이 바로 광범위하게 실시한 순장제도인데, 이 풍속은 상나라에서 주나라와 춘추전국시대까지 이어졌다.
순장을 실시한 사람은 노예 소유주이고, 당하는 사람은노예이며, 많은 사람을 순장할수록 노예를 많이 소유했다. 진나라와 한나라 때에 이르러 순장체도가 점차 사라지고 사람 대신 흙으로 빚은 인형을 무덤에 넣게 되는데, 이때부터 고대 노예제 사회가 종말을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순장 실시 여부는 고대 노예제 사회의 징표이다.
결론적으로 북한 학계는 고조선 사회가 이토록 많은 노예를 순장할 정도로 계층 분화가 심화된 노예제 사회였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필자는 강상묘 등의 무덤이 순장으로 인정받기 위한 세 가지 필요조건, 즉 동시성, 강제성, 종속성을 만족시키지 못했으므로 순장묘라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강상묘를 순장묘로 보려는 북한 학계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으나 순장을 통해 당시 사회의 면모를 보려는 시도 자체는 바른 방향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중국의 사례를 보아도 그렇고 한국사에서도 순장이 본격적으로 실시되던 때와 소멸되던 때를 확인할 수 있으며 그 사이에 일어난 사회적 변혁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순장은 단순한 장례 풍습의 의미만이 아니라 계층분화 현상과 신분제 사회의 실체를 규명하는 실마리라 할 수 있다.
순장은 단순한 장례 풍습의 의미만이 아니라 계층분화 현상과 신분제 사회의 실체를 규명하는 실마리라 할 수 있다.
확실한 사실은 인간 존엄성에 대한 고대 사회의 인식은 현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대 사회를 유토피아처럼 그려서는 안 된다. 소수의 지배 집단이 사회적 특권과 부를 독점하고 대다수의 백성은 고통 속에서 젊은 나이에 비참하게 생을 마친 경우가많았다. 순장된 인골들은 고대 사회의 내면을 숨김없이 생생하게 보여준다.
한편 이 무덤의 주인공이 건장한 남자일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키가 146센티미터 정도 되는 작은 체형의 40대 여성이란 점도 확인되었다. 지배자가 당연히 남성일 거라 추측했던 선입견이 잘못되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은 말을 탈 때 사용하는 안장과 발걸이에서 볼 수 있는 푸른 형광 물체이다. 비단벌레를 잡아 날개 수천 개를 이어 붙이고 그 위에 화려한 무늬를 투조해 금판을 씌운 것이니, 요즘 시중에 판매되는 명품이 제아무리 고가라도 이에 비할 수 있을까?
이같은 후장품들은 아무나 누릴 수 없는 휘황찬란함을 자랑한다. 그렇다면 우리 선조들은 왜 이렇게까지 장례에 막대한 투자를 했을까? 바로 이승의 안락함이 저승까지 이어진다는 계세사상 때문이다.
이후 신라 지증왕이 502년에 순장을 폐지하면서 후장의 풍습도 사라져갔다. 경쟁적으로 대형 무덤을 축조하던 신라의 사회적 분위기는 6세기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 순장과 후장을 폐지하고 현실세계의 삶에 무게를 두면서 산성을 축조하고 군사력을 키운 것이다.
반면 가야는 여전히 종전의 장례 풍습을 버리지 못했다. 어찌 보면 가야는 망하고 신라는 흥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중국에서 순장이 사라진 배경에는 유교의 영향도 있겠으나 많은 사람을 아깝게 희생시킬 바에야 노동을 시키거나 군대로 동원하는 것이 낫다는 현실적 이유가 작용했다. 진시황릉 병마용갱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된다.
고대인들은 사후세계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한나라 이후 중국에서는 불로장생하는 약과 선도를 갖고 있어 장생을 주관한다는 서쪽의 여신서왕모를 찾아가 신선이 되는 것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
대형 고분의 시대에서 불교 사원의 시대로 고대인들이 내세관을 바꾼 결정적인 사건은 불교의 도입과 공인이다. 살생을 금하는 불교 교리를따르게 된 신자들에게 순상은 용납하기 어려운 풍습이 됐다. ‘공수래공수거‘라는 가르침을 생각하면 무덤에 많은 부장품을 넣는 일이 부끄럽게 여겨졌을 것이다.
왕릉을 만드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소음과 순장당하는 사람의 비탄으로 그득하던 신라의 수도 경주에는 황룡사와 분황사 등 수많은 사찰이 세워져 불국토가 구현됐다. 초대형 무덤을 축조하던 토목기술과 건축기술, 화려한 부장품을 만드는 금속기술은 사찰과 탑 그리고 불상과 각종 공양구를만드는 기술로 변했다. 사회가 바뀐 것이다. 대형 고분의 시대에서 불교 사원으로의 이행은 다시말해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한편 무덤과 인골이 들려주는 생생한 이야기는 중세 사회에서 또 다른 형태로 계속된다.
앞서 살핀 것처럼 고대 사회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순장자와 피순장자가 엄격히 구분되는 사회였다. 삶의 여건도 수도와 지방 사이, 즉 영위하는 공간에 따라 크게 달랐다. 과거에도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삼국시대의 도성 혹은 왕성 등을 일컫는 수도유적은 심장부 역할과 동시에 모든 차별의 발원지로 자리했다. 3부에서는 삼국의 수도유적을 면밀히 살펴 고대 국가의 진면목을 확인할 것이다.
작은 취락이 거대한 도시가 되기까지 수도유적과 방어시설, 고대 국가 출현의 상관관계 수도유적이란 용어는 역사학 영역에서 다소 생소한 표현으로 왕궁과 왕성, 도성과 왕경 등을 포괄하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수도유적이 아우른 다양한 내용을 영어로 번역하면 모두 ‘royalpalace‘나 ‘royal capital‘이란 단어로 귀결된다.
이처럼 환호를 짓지 않더라도 높은 산 위에 위치하면서 방어력을 최대로 높인 고지성 취락이 발달하기도 한다. 대전의 보문산 유적은 해발고도가 457 미터나 돼 일반인은 쉽게 올라갈 수 없을 정도인데, 정상부에서 초기 철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됐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높은 산 위에 거주했음을보여준다. 극단적인 고지성 방어취락의 한 사례다.
취락의 발전과 계급의 탄생 청동기시대부터는 신석기시대까지 이어져 오던 평등한 사회가 깨지며, 잘 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으로 나뉜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가진 집단과 못 가진 집단 간의 대립, 사회적 갈등, 긴장된분위기 등이 청동기시대를 대변하는 이미지인 것이다. 이때부터 등장한 환호취락은 지속해서 발전한다. 방어적인 측면을 강조한 취락은 산 위로 올라가고, 많은 주민이 사는 취락은 나지막한 구릉위에 마련된다. 환호는 방어기능 외에도 마을 안팎을 나누는 역할을 했는데, 이 때문에 수도 안에사는 중앙인과 바깥에 사는 지방인을 구분 짓는 차별의 시발점이 됐다. 이렇게 발전한 취락을 중심취락 혹은 거점취락이라고 부른다.
한편 길성리처럼 대규모의 토성을 축조한 것은 아니지만 세종시에서는 취락 안에 자신의 가옥만을 위한 도랑을 두르고, 외관을 멋지게 꾸미며, 창고에 잔뜩 물건을 쌓아놓은 고위층 호화주택이발견되기도 했다. 지금은 과거의 지명이 됐지만, 연기 나성리 유적이라 이름 지어진 이곳에서는 금강과 미호천 유역을 무대로 성장한 지방 우두머리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지방 도시들은 형성초기에는 중앙의 수도와 경쟁했지만, 국가체제를 정비할수록 독자성을 상실해 중앙에 종속된 지방도시로 강등되었다.
어떤 연구자의 통계에 따르면 남한 지역에만 2000개가 넘는 성이 존재한다. 조선 전기의 문나라를 지키는 10가지 방책 중 ‘성보를 수선하고 관방을 정하는는신이자 학자였던 양성지일‘을 거론하는데, 이를 달리 말하면 성곽을 잘 관리하는 것이다. 즉 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산성을 축조하고 관리하는 일은 중요국방사항에 포함됐다.
서울의 몽촌토성과 석촌동 고분군도 일반인이 방문하면 언제든지 발굴현장을 관람할 수 있도록시스템화했다. "아저씨,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나가주세요!" 같은 말을 외치는 조사원은 이제찾아볼 수 없다. 이제는 밀실에서 전투적인 자세로 속전속결 진행하는 발굴조사 대신 공개된 장소에서 여유를 갖고 교육과 관광 효과까지 누리는 방향으로 발굴조사가 전환되고 있다.
도다이지를 건설하는 데에도 백제계 인물들의 역할이 컸다. 대표적인 인물이 행기라는 승려다. 그는 대규모의 사찰을 짓기 위해 많은 희생을 감수하는 백성들의 고통을 어루만지고 정신적으로달래주며 빈민 구제사업을 벌였다. 그 결과 민심이 흉흉해지는 일이 미연에 방지되었다. 거대한 사원을 지은 기술자는 백제인이었으며, 대불에 쓸 금을 채취해 바친 이도 백제인이었다. 당시 백제는망했지만, 백제계 유민들이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건축 토목분야는 물론이고 불교, 회화, 음악 등여러 분야를 주도하며 일본 고대 문명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던 것이다.
풍납토성의 우월함은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설명할 수 있다. 당시로는 최첨단 토목기술인 판축기법을 사용했는데, 중국에서 유래한 이 기술은 나무로 틀을 짜고 그 안에 흙을 채운 후 나무나 돌로만든 공이로 흙을 다져 강도를 높이는 공법이다. 백제는 중국과 다른 풍토, 토질을 지녔기에 풍납토성에는 백제식으로 변형한 판축공법을 적용했으며 부엽공법을 추가했다. 부엽공법이란 흙과 흙사이에 부직포를 깔 듯 나뭇잎과 줄기를 깔아서 토층 간의 마찰력을 높이고 이 층을 통하여 구조물에 스며든 물이 배수되게 하는 공법이다. 요즘 토목공학에서 이야기하는 지오텍스타일 Geotextile 공법과 동일한 원리로, 훗날 김제 벽골제와 같은 제방을 축조할 때 자주 활용했다. 이런 최첨단의 판축공법과 부엽공법은 백제인에 의해 일본으로 전래돼 토성과 궁궐, 고분, 제방 축조에 활용되었다. 이렇게 풍납토성을 짓는 데는 최첨단 기술과 최고의 기술자가 동원되었다. 풍납토성이란 걸작을만든 이들은 당대 최고의 기술자임이 틀림없다.
이처럼 화장실은 왕족과 귀족들의 일상 생활상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당시의 환경과 위생 상태를보여준다. 오물에 섞여 있는 기생충알을 통해 위생 상태를 알 수 있으며 소화되지 않고 배출된 음식물을 통해 식생활을 엿볼 수도 있다. 실수로 화장실에 떨어뜨린 짚신이나 목간 같은 유기질 유물도 소중하다. 이처럼 화장실의 고고학은 왕궁과 왕릉 같은 유적만으로는 알 수 없는 과거의 은밀한모습을 보여주기에 그 나름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
3부까지 땅에서 발견한 유물과 유적을 통해 삼국시대를 탐험했다면, 이제는 고대선인들이 교역했던 3개의 길을 따라가 볼 차례다. 위도가 높은 지역으로 떠나는 초원길, 사막과 오아시스로 이어지는 길, 그리고 바닷길을 통해 중국과 일본을 넘어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까지 대외교섭의 범위를 넓혔던 삼국시대의 흔적을 함께 추적해보자.
초원길에서 시작된 다문화의 역사 한반도 최초의 국가, 고조선의 다양한 대외관계
그동안 우리는 이런 실상을 보지 못한 채, 동북아시아만을 보도록 강요받아 왔다. 한국과 중국, 한국과 일본의 관계만을 바라보는 좁은 시야 때문에 한과 경쟁했던 고조선을 조망하며 ‘외로운 동쪽의 섬나라‘였던 우리의 처지를 한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조금만 시각을 넓히면 고조선과 같은 시기 고대 국가를 형성하며 비슷한 운명에 처했던 여러 세력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만 그토록 외롭게항쟁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한국은 동쪽의 고요한 은자의나라가 아니었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에 자리잡고 유라시아 곳곳의 이웃들과 다양하게 교섭했다. 그리고 당시 이웃을 맺었던 나라들 중 일부는 지금도 국가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21세기를 주도할 후손들에게 넓은 세계를 바라보는 통찰력과 시각을 전해줘야 한다. 앞으로 ‘코리안‘이란 정체성은 태어난 장소와 얼굴 형태, 핏줄을 통해 정해지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코리안의 인종적 스펙트럼은 훨씬 넓어질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민이기에 총을 어깨에 짊어지고 야간 보초를 서며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젊은이들의 얼굴도 지금보다 다양해질 것이다. 이들에게 대한민국의 미래를 맡겨야 한다.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이 지닌 공격성 때문에 곳곳에서 파열음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상호공존을 원칙 삼아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짜야 할 것이다. 이때 역사학은 어떻게 공헌할 수 있을까? 역사학은 과거의 역사에서 긍정적인 교류 모델을 찾아내 국가 발전전략 수립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돌궐족의 유적은 지금도 몽골지역 곳곳에 남아 있다. 그들은 수백 년에 걸쳐 서쪽으로 계속 이주해가면서 혼혈을 거듭했고 따라서 생김새가 점차 변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면서 위구르족,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이 모두 투르크계 국가이다. 투르크 벨트의 동쪽에 해당하는 카자흐스탄 사람들은 우리와 가장 비슷한 생김새를 지녔다. 그리고 서쪽으로 갈수록 백인에 가깝다. 이런 양상은 돌궐족의 이동과정 중 생성된 변화다.
한편 기원전 6세기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에 걸친 대제국 페르시아를 건국한 고레스(키로스) 왕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온 유대인들을 해방시키면서 인종과 종교, 언어가 다르다고 차별하지 말고 모두를 공평하게 대하라 명령했다. 세계 최초의 인권 선언인 셈이다. 이러한 관용과 포용으로고레스 왕은 제국을 유지했다. 고레스 칙령은 점토로 된 원통에 새겨졌으며, 훗날 발굴돼 영국의브리티시 뮤지엄에 전시되어 있다. 복제품은 뉴욕의 UN 본부에 걸렸다. 대한민국이 제국과 같은강대한 국가가 되려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여전히 순수한 단일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고집하며 다문화 사회를 거부할 것인가?
중앙아시아 속 한국 고대사의 흔적들 소그드족의 벽화에 등장한 고구려인 중국 서안에서부터 우즈베키스탄, 이란, 터키, 로마로 이어지는 길은 대부분 황량한 사막길이다. 중간중간 섬처럼 분포하는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이어지는 여정은 낭만적이기보다 목숨을 건모험에 가깝다. 그러나 그 끝에 다다른 목적지는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장사치들은 ‘대상‘ 혹은 ‘캐러밴caravan‘ 이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매번 목숨 건 모험의 끝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내게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을 몇 군데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 사막길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와 이란의 이스파한을 꼽는다. 특히 사마르칸트에 있는 비비하눔 모스크의 눈 내리는 풍경은 잊을 수가 없다.
소드그족은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입에다 꿀을, 손에는 아교를 발랐다고 한다. 꿀처럼 달콤한 말로 상대방을 현혹해 돈을 벌고, 한번 손에 들어온 돈은 절대 놓치지 말라는 의미다. 이들은 이 어린 시절의 배움을 교훈 삼아 천하제일의 장사꾼으로 자란다. 수나라와 당나라는 물론 신라와 일본까지 진출해 장사를 벌였던 이들이 바로 소그드족이다.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대개 소그드와 투르크, 몽골의 혼혈인데, 자칫 이들을 상대로 물건값을 흥정하려 들었다간 손해를 보기 쉽다. 필자도 시장에서 흥정에 실패해 손해를 본 후 역시 소그드의 후예는 다르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왜 사마르칸트를 조사해야 할까? 국제관계학을 전공하는 분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이다. 국익을 위한 이합집산이 무궁무진하게 반복되는 외교 무대에서 대한민국이 살아남으려면 항상 우리편을 들어주는 국가가 셋 이상은 있어야 하는데, 가장 유력한 후보는 단연 중앙아시아의 국가들이라는 것이다. 중국이라는 초강대국 주변에서 생존 전략을 모색해야 하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우리와 비슷한 입장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을 우리의 전략적 파트너로 삼을 수 있다면 얻을 수 있는 것은 너무나도 많다.
이제 대한민국도 민족사를 넘어 세계사 연구에 공헌할 때가 되었다. 그래서 욕심을 내 참여한 것이 2018년부터 시작한 시베리아 남부의 거대왕릉인 쿠르간 조사다. 몽골과 러시아, 카자흐스탄과중국이 만나는 알타이지역 동편에는 러시아에 속한 투바공화국이 있고, 여기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르잔 유적이 있다. 이 유적이 유명해진 것은 1호분과 2호분, 단 두 기의 쿠르간을 조사하면서부터이다. 특히 아르잔 2호분은 러시아와 독일 연구팀이 공동 조사한 것으로, 세계사 서술을 바꿀만한 위대한 발견을 이뤄냈다. 기원전 6세기 무렵 흑해 연안에서 발생한 스키타이 문화가 점차 동으로 퍼졌다는 기존의 정설을 뒤집은 것이다. 기원전 9~8세기에 이미 스키타이 문화는 아르잔에서발생했으며 점차 서쪽으로 퍼져나간 사실이 입증되었다.
비록 한국사와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더라도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유적이라면 조사와 보존에 뛰어들어야 한다. 민족사를 넘어서서 인류 공동의 역사 연구에 앞장서는 대한민국이 되어야 진정한 선진국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내일을 앞당기기 위해 젊은 연구자들이 지금도 현장에서 땀 흘리고있음을 밝히며, 그들이 진심으로 자랑스럽다. 그들은 우리의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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