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正祖) 조선 22대 왕으로, 1776년 왕위에 올라 25년간 재위했다. 각종 개혁 정책을 추진하면서 선왕 영조와 함께 조선 최고 부흥기를 이끌었다. 청나라에 대한 반감이 지배적이었던 조야(朝野)의 분위기에서 벗어나 대청 친화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에 힘입어 북학파(北學派), 즉 청나라의 학술과 문물을 배우려 한 조선의 학자들이 정조 치세에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건륭제(乾隆帝) 청(淸)나라 6대 황제로, 1735년 즉위하여 60년간 재위했다. 조선의 영조ㆍ정조와 재위 기간이 거의 겹친다. 오늘날의 신장에 위치한 유목 제국 준가르를 정복하는 등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건륭제는 장수 황제로도 유명한데, 1780년 그의 칠순 잔치에 정조가 이례적으로 특사를 파견한 이래 조선과 청의 외교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우호 관계로 전환한다.
청(淸) 조선이 수백 년 동안 변방의 오랑캐로 여겼던 만주인(滿洲人)들이 세운 나라.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1616년 후금을 세우고, 명(明)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이후 1636년 청 태종 홍타이지가 스스로 황제를 칭하면서 국호를 청나라로 바꿨다. 명나라가 무너진 후 중원을 정복하고 몽골ㆍ티베트ㆍ신장까지 판도를 넓혔다. 신해혁명으로 1912년에 멸망할 때까지 268년간 중국을 통치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조선과 만주인의 후금-청 사이에서 일어난 세 번의 전쟁 중 마지막 전쟁을 가리킨다. 조선은 1619년 사르후 전투와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을 거쳐 후금과 형제 관계의 국교를 수립하였으나, 1636년 후금이 일방적으로 군신 관계를 강요하자 그 요구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러나 그것이 빌미가 되어 일어난 병자호란에서 치욕적으로 패배함으로써 결국 군신 관계를 받아들여야 했다. 조선이 오랫동안 청나라에 반감을 품은 이유가 되었다.
사행(使行) 사신 행차를 말하는데, 정기 사행과 비정기 사행으로 나눌 수 있다. 조선은 1년에 네 차례의 정기 사행을 청나라로 보내야 했다. 청나라가 국가 차원에서 기념하는 3대 명절 축하와 연공(年貢) 납부를 위한 사행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청나라가 베이징으로 천도한 이후 한 차례의 사신 파견으로 네 가지 사행 임무를 한꺼번에 해결하게 되었다.
만수절(萬壽節) 옛날 중국에서 황제의 생일을 가리켜서 사용한 말이다. 청나라의 만수절은 국가적으로 기념해야 할 중요한 날이었으므로, 의례 규정에 따르면 하례를 거행하고 연회를 베풀어야 했다. 건륭제는 만수절을 공적 행사로 치르는 데 소극적이었던 앞선 황제들과 달리 자신의 생일을 꼬박꼬박 챙겼는데, 대부분의 만수절을 베이징의 황궁 자금성이 아니라 열하의 여름 궁전 피서산장(避暑山莊)에서 기념하였다.
진하 특사(進賀 特使)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신하가 군주에게 특별히 축하의 뜻을 밝히는 것을 ‘진하’라 한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나라에 큰 경사가 생기면 진하를 위한 사신을 파견하곤 했다. 이 책에서는 건륭제의 칠순 잔치에 정조가 특별히 파견한 진하 특사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열하일기(熱河日記)」 열하는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동북부에 위치한 청더(承德)의 옛 이름으로, 청나라 황제들의 여름 궁전 피서산장이있던 곳이다. 건륭제의 시대에 열하는 황제가 매년 여름과 가을의 몇 달을 머문 곳이었으므로 사실상 베이징에 버금가는 청나라의 두 번째 수도였다고 할 수 있다. 건륭제의 칠순 잔치에 정조가 파견한 진하 특사 일행이 조선의 사신으로는 최초로 열하를 방문하였다. 「열하일기」는 박지원이 진하 특사와 동행하면서 보고 겪은 일을 기록한 여행기이다.
앞으로 이 책의 본문에서 펼칠 이야기는 주제와 분량을 고려하여 크게 다섯 꼭지로 나누었다. 첫 번째 꼭지에서는 1780년 이전 조선의 반청反淸 의식이 어떤 연유로 형성되어 어떤 식으로 표출되었는지를 대략 설명하고, 청에 대한 사신 파견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소개할 예정이다. 이 꼭지에서 언급하는 사실들은 1780년 이후의 변화를 포착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다.
두 번째 꼭지에서는 먼저 청의 황제들이 자신의 생일을 어떻게 기념했는지, 건륭이 1780년 열하에서 벌인 칠순 잔치가 청나라에서는 어떤 의미의 ‘이벤트’였는지 소개할 것이다. 이어서 1780년에 젊은 국왕 정조正祖(1752~1800)가 과거 조선이 청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던 틀에서 벗어나 건륭의 칠순 생일을 ‘진하進賀 특사’ 파견이라는 특별한 방식으로 축하하였음을 이야기할 것이다.
세 번째 꼭지를 통해서는 1780년 건륭 칠순 진하 특사의 활동에 관한 여러 역사적 사실을 면밀히 추적해볼 것이다. 1780년 조선의 정조가 건륭의 칠순을 축하하는 특별 사절을 보내지 않았다면 박지원의 열하 방문도, 따라서 『열하일기』의 탄생도 아예 불가능했을 터이니 진하 특사 파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또한 『열하일기』 속의 열하 이야기가 역사적 실제와 어떻게 다른지 포착하려면 1780년의 진하 특사와 관련하여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논의의 전제 조건이 된다.
네 번째 꼭지에서는 박지원이 특히 어떤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열하일기』 속 열하 이야기를 구성하고 서술하였는지, 그리고 그러한 구성과 서술은 어떤 배경과 의도에서 나온 것인지 탐구할 예정이다.
마지막 다섯 번째 꼭지에서는 먼저 1780년의 열하 이후 조선 사신들에 대한 청나라의 접대에 나타난 변화를 소개할 것이다. 조선 사신을 접대하는 데 어떤 변화가, 어떤 경위를 거쳐 일어났는지 그리고 조선ㆍ청 양국 관계의 역사라는 맥락에서 그 변화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지 생각해볼 것이다. 또한 이런 청의 변화가 사실은 1780년대 이후 전체 제국 경영 및 대외 관계 운영에서 건륭제가 도입한 변화의 일부였음을 밝히고, 그러한 변화의 의도 및 효과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것이다.
조선은 건국 이래 수백 년 동안 여진인들을 변방의 보잘것 없는 오랑캐라고만 여겼다. 그러나 병자호란에서 치욕적으로 패전함으로써 그들이 세운 청나라의 신하로 전락하였다. 그에 따라 병자호란 이전 명나라를 대국으로 섬겼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부터는 청나라를대국으로 섬기며 때마다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쳐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조공을 위해 오랑캐 소굴 선양을 향한 사행길에 올라야 했던 조선 사신들의 심정은 얼마나 참담했을까?
정묘호란으로 오랑캐의 나라 후금과 형제가 되다 조선 왕조(1392~1910)는 건국 초기부터 중원의 주인 명나라(1368~1644)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무진장 애를 썼다. 조선의 국왕은 1년에 몇 번씩이나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를 보통 조공朝貢이라고 부른다. 명의 황제는 비록 형식적이고 사후적인 행위이긴 했지만 조선의 국왕을 공식적으로임명하였는데, 이를 책봉이라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외교 관계의 역사적 연원을 고대 중국에서 천자의 권위를 누리던 주나라 왕이 제후를 책봉하고, 제후가 때마다 주나라 왕의 조정에 찾아가 인사를 올리고 공물을 바치던 관계에서 찾았다.
이에 따라 명 황제와 조선 국왕의 관계는 명분상 임금과 신하의 관계, 즉 군신관계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중국의 입장에서 조선은 엄연히 ‘외이의 나라였으며, 조선의 국왕은 명 국내의문. 무신료, 즉 ‘신과 명백히 구별되는 ‘외신‘이었다. 조선의 문·무 신료들도 명 황제의 신하가 아니라 명황제의외신인 조선 국왕의 신하였기 때문에, 명의 ‘내신‘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국왕의 ‘배신‘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명과 조선의 관계는 보통 ‘사대자소事大字小’ 관계의 전형이라고 한다. 사대자소란 ‘약소국은 강대국을 지성으로 섬기고, 강대국은 약소국을 자애롭게 보살핀다’는 의미이다.
조선은 명나라를 대국으로 섬기는 것을 당연시하였다. 마찬가지로 여진인女眞人들에게 섬김을 받는 것 또한 당연하게 여겼다. 훗날 청나라의 핵심을 형성하는 만주인滿洲人들은 여진인들의 후예였고, 여진인들은 원래 조선 땅 동북쪽에 빌붙어 지내는 ‘오랑캐’에 불과한 존재로 취급되었다.
조선 초기의 실록을 잠깐이라도 들여다보면 여진의 추장들이 때마다 예물을 바치러 찾아오고, 조선의 왕들이 선물을 하사하면서 그들을 다독이는 모습을 금세 찾을 수 있다. 말하자면, 여진은 조선을 섬기고 조선은 명을 섬기는 위계hierarchy질서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16세기 말까지는 그랬다.
이런 오랑캐들의 세계에 17세기 초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나라가 나타나더니만, 급기야는 이제 명나라와 맞먹겠다면서 조선에 자기들을 섬기라는 요구를 들이대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명이나 조선으로서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사태였다.
보복에 나선 명나라는 대규모 원정군을 조직하면서 조선에도 파병을 요구하였다. 그때 조선은 남의 싸움에 끼기 싫었지만 명의 압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약 1만 3000명의 병력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1619년 봄에 벌어진 사르후 전투에서 명군은 후금군에 대패하였다.
조선군도 심하深河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크게 패하였다. 도원수 강홍립姜弘立(1560~1627)은 무려 8000~9000명의 희생자를 낸 끝에 생존자들을 데리고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강홍립의 투항 결정이 광해군光海君(1575~1641)의 밀지密旨에 따른 것이라는 이야기가 일찍부터 돌았는데, 20세기 전반 일본인 학자들은 이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광해군이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의 길을 갔다는 주장을 내놓은 바 있다.
그러나 ‘밀지설’은 강홍립의 투항이 8000~9000명이나 희생될 정도의 격렬한 전투를 치른 뒤에야 결정되었다는 사실과 모순이니, 나중에 누군가가 지어낸 낭설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설령 광해군이 정말 중립 외교를 추구했다손 치더라도 결국에 가서는 파병을 결정한 이상 그의 중립 외교는 기껏해야 실현하지 못한 바람에 불과하다.
한편 1626년 후금의 두 번째 칸(한汗)으로 즉위한 홍타이지(1592~1643, 청 태종) 앞에는, 조선과의 관계와 관련하여 누르하치가 미처 처리하지 못하고 간 두 가지 과제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눈엣가시 같은 조선 주둔 명군의 처리였고, 다른 하나는 조선과의 국교 수립이었다. 1627년에 일어난 두 번째 전쟁 정묘호란은 바로 후금이 이러한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다.
그러나 당시 후금과 명은 적대 관계에 있었다. 정묘호란 이후 조선은 새로 체결한 후금과의 형제 관계를 명과의 군신 관계와 충돌하지 않도록 운영해야 하는 난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인조가 1633년 홍타이지에게 보낸 국서에서 "귀국이 바야흐로 천조天朝와 원수가 되니, 우리는 그 사이에 끼어 부자와 형제의 은의恩義를 둘 다 온전히 하고자" 한다며 고충을 토로했듯이, 그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병자호란 직후 소현세자와 함께 청의 수도 선양으로 끌려가 볼모 생활을 했던 효종은 반청 의식이 남달랐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북벌을 위해 양성했다는 조선의 군사들은 1650년대에 청을 도와 만주 북부로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을 저지하는 싸움에 투입되었을 뿐이다.
효종은 끝내 북벌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지극한 원통함이 마음에 있건만,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至痛在心, 日暮途遠]."라는 안타까움 속에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어떤 이들은 효종의 북벌 계획을 시세를 읽지 못한 무모한 망상이었다고 폄하하지만, 1650년대까지만 해도 남명 등의 무장항청抗淸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명의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기다렸다가청을 협공한다는 발상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1662년 남명의 마지막 황제 영력제永曆帝 (1625~1662)가 청에 죽임을 당한 이후로는 사정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노년의 영조가 ‘황하가 맑아지는 날’을 고대하다 앞선 시기는 차치하더라도 1754년 영조가 스스로 밝힌 결코 "잊을 수 없는 네 가지 일"은 18세기 중엽 청의 멸망에 대한 조선의 기대감을 잘 드러낸다. 1754년이면 왕위에 오른 지 30년이 된 시점인데, 이때 영조는 자신이 절대 잊지 않고 사는 것 네 가지로 첫째 교목세신喬木世臣, 둘째 황하지청黃河之淸, 셋째 백성百姓, 넷째 조제調劑를 꼽았다.
‘황하지청’은 황하가 맑아지기를 기다린다는 의미인데,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와 『영조실록英祖實錄』에는 이 무렵부터 영조가 신하들과 나눈 대화에 이 문구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 의미를 이해하려면, 먼저 영조가 청나라에 다녀온 사신들과 나눈 이야기들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승정원일기』 영조 28년(1752) 사월 24일 기록을 보면, 영조가 전년 겨울 청나라에 갔다가 막 돌아온 사신 일행과 만나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 ‘백년하청百年河淸’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듯이 황하가 맑아진다는 것은 원래 아무리 기다려도 실현되지 않는 일을 의미한다. 영조는 청의 멸망을 기다리기란 곧 황하가 맑아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을 시인하고 있었던 셈이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말 그대로 옛날 사람들에게는 정말 드물었던 나이 칠순에 이른 1763년에도 영조는 막 귀국한 사신 일행에게 청 국내의 사정에 대해 듣고는 "황하가 맑아진다는 소식은 들을 가망이 없구나!"라고 탄식하였다.
영조가 일흔일곱 살이던 1770년, 청나라에서 돌아온 사신 서명응 徐命膺(1716~1787)은 영조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건륭의 실덕이 심하니 오래버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날 대화에서 영조는 ‘하청‘ 소식을 묻지 않았다. 그럼에도 서명응은 건륭제의 청나라가 조만간 망할 것 같다는 말을 던진 것이다.
서명응은 노년의 영조가 청나라가 번영을계속하고 있다는 현실에 얼마나 낙담하고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임금을 위한다는 마음에 이런 위로의 말을 건넸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조직이든 구성원이 아무런 근거도 없거나 심지어 사실에 반하는데도 지도자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는 상황은 그 조직의 미래를 위하여 결코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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