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상을 받들고 돌아온 사신‘이 되다

박명원이 ‘봉불지사‘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다

앞에서 보았듯이 박명원 일행은 열하에서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환대를 받고 돌아왔다.
조선 조정이 사은사를 따로 파견해야만 한다고 판단할 정도로 융숭한 대접이었다. 황제의 융숭한 대접만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박명원 일행이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열하에서 받아 온 ‘금불佛‘ 때문에그만 사달이 나고 말았다.

‘사악하고 더러운 물건‘이란 불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유생들은 박명원 일행을 ‘봉불지사奉佛之使"라고규탄하였다. ‘불상을 받들고 돌아온 사신‘이었기에 붙여진 말이었겠지만, ‘부처 또는 불교를 받드는 사신‘이라는 뜻도 되니 박명원은 배불의 나라 조선에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오명을 뒤집어쓴 처지가 된것이다.

사태가 험악해지는 가운데 십일월 12일, 부사였던 정원시가 이 일은 한 번 폭발하지 않을 수 없는 사안이었다고 하면서 불상을 받아 온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지만 성균관 유생들의 원칙을 지킨 비판 앞에서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정사였던 박명원 역시 일이 부득이했음을 호소하면서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처벌을 청한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나 정조는 이 사안은 굳이 잘잘못을 따져처벌을 논할 필요가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박명원에게 안심하라고 일렀다.

박지원『열하일기』의
‘봉불지사‘
변호론

박지원의 입장에서도 사신 일행에 대한 ‘불‘ 혐의는 남의 일이라고 치부하며 마냥 나 몰라라 하고 침묵할 문제가 아니었다. 박명원은 말 그대로 남이 아니라 자신의 팔촌 형이 아닌가. 또한 공식적으로야 아무런 책임도 질 필요가 없는 자제군관의 신분이었을지언정 그자신도 필경 당시 사행의 엄연한 일원이었으므로 ‘봉불지사‘라는 오명과 완전히 무관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

청 예부의거짓을 밝혀 사신을 변호하다
박명원의 불행 중 다행: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쓰다

여기서 잠깐 이런 상상을 해보자. 만약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쓰지 않았다면 박명원은 살아생전에 그리고 ‘천하 후세에 과연 어떤 평가를 받게 되었을까?

물론 박명원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오늘날 우리는 그가 정말 봉불을 했다 한들 전혀 문제시하지 않는세상에 살고 있다. 성균관 유생들은 "다만 우리 국가에 치욕을 끼칠 뿐만 아니라, 또 장차 천하 후세의비웃음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박명원 일행을 비난했지만, 오늘날 불상을 가리켜 대놓고 ‘사악하고 더러운 물건‘이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외국에서 불상을 가져왔다고 국가의 치욕을 운운하며 ‘천하 후세의 비웃음‘을 걱정할 사람도 없다.

하지만 박명원 및 그와 행동을 함께했던 200여 년 전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천하 후세의 비웃음‘까지는가지 않더라도 당장 현실에서 무릅써야 하는 비난과 평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조선의 관료사대부에게 봉불은 정말 최악의 오명이었다.

그러나 정말 다행스럽게도 박명원에게는 박지원이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박명원 역시 『열하일기』를읽었을 것이다. 상상하건대, 그는 박지원을 자제군관으로 삼아 데려갔을 뿐 아니라 정말 갑작스러웠던열하행을 앞에 두고 그냥 베이징에 남아 당시 ‘세상의 중심‘을 한껏 체험하려던 박지원을 설득해서 열하에 동행한 일을 회상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판첸과의 만남 및 불상에 관한 일을 자세하고 치밀하게 해명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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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청에 대한 사신 파견은 크게 정기 사행과 비정기 사행의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비정기 사행은 축하ㆍ위로ㆍ감사 등의 뜻을 표할 필요가 있을 때나 특별한 현안이 발생했을 때 보내는 것으로, 초기에는 파견 빈도가 대단히 높았으나 시간이 갈수록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다. 정기 사행은 양국 관계의 현안 유무와 무관하게 매년 정해진 때마다 파견하는 것이었는데, 그 파견 빈도는 병자호란 종결 직전에 문서로 규정되었다.

이처럼 한 번의 사신이 둘 이상의 조공 임무를 한꺼번에 수행하는 것을 병공倂貢이라고 한다. 병자호란 이후 몇 년 동안 갖가지 이유로 별사 파견이 매우 잦았지만, 조선은 적어도 ‘1년 4행’의 정기 사행에 관한 한 실제로는 두 차례 정도의 사신 파견으로 청이 부과한 의무를 그럭저럭 이행할 수 있었다.

1644년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이 이자성李自成(1606~1645)이 이끄는 농민 반란군에게 떨어지고 숭정제가 자결하는 돌발 사태가 일어났다. 청나라는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십분 활용하여 베이징을 점령하고는 아예 자신들의 수도마저 그곳으로 옮겨버렸다. 이 사건은 보통 청의 입관入關이라고 불린다.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고 하는 만리장성 동쪽 끝의 산해관 안쪽으로 들어왔다는 의미이다.

삼절연공행을 위해 떠나는 사신 일행을 당시 조선 사람들은 관행적으로 ‘동지사’라고 불렀다. 동지를 축하하는 표문과 방물도 가져가긴 했지만, 동지 자체와는 사실상 무관한 사행임에도 그렇게 부른 것이다. 가까운 과거에 명나라로 가던 절사 중에서 동지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관행을 계속 이어간 것일까? 아니면, 시월 말에서 십일월 초에 서울을 떠나 동짓달의 대부분을 길에서 보내는 사행이었기 때문일까? 여전히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기에서는 ‘삼절연공행’ 대신에 ‘동지사’라는 명칭을 쓰기로 한다. 이름이 짧기도 하거니와 당시 사람들의 관행을 존중한다는 의미도 있다. 게다가 동지사라고 하면 그것이 겨울 여행이었다는 사실을 잘 드러낸다는 장점도 있다.

하마연과 상마연
사신에 대한 환영연과 환송연은 각각 하마연下馬宴, 상마연上馬宴이라고 불렸다. 도착하면 ‘말에서 내리기’ 마련이고, 떠나려면 ‘말에 오르기’ 마련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문자 그대로라면 하마연은 사신이 베이징에 도착한 직후에, 상마연은 베이징을 출발하기 직전에 여는 것이 정상이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초의 기록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하마연은 사신이 베이징에 도착한 지 6~7일 안에, 상마연은 베이징을 떠나기 전 5~6일 안에 열리는 것이 원래의 관례였다고 한다.

사행 참가자들은 오늘날 한ㆍ중을 오가는 속칭 ‘따이궁’이라는 보따리상들과 비슷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다들 인삼이나 은처럼 가볍고 값나가는 것들을 힘이 닿는 대로 바리바리 싸서 가지고 갔다. 각 개인의 무역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워낙에 인원이 많고 빈도가 잦다 보니 전체 무역 규모는 매우 컸다.

조선의 사신이 140년 만에청 황제의 만수절 하례에 참석한 일은 두말할 나위 없이 조선의 정조가 파견 의무도 없었던 진하 특사를 자발적으로 보냈기 때문에 가능했다. 더군다나 청에 조공하는 여러 외국가운데 1780 년 열하의 칠순잔치에 축하 사절을 보낸 나라는 조선이 유일했다. 조선의진하 특사 파견은 당시 건륭제도 기대하지 않았던 이례적인성의 표시였으며, 바로 그러한까닭에 앞선 황인점 사행의 칠순 축하 이상으로 "대단하게생색"이 났다.

만수절 행사에는 다른 황제의 시대에는 발견할 수 없는 고유의 특징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대부분의 만수절 행사가 베이징의 자금성이 아니라 열하의 피서산장避暑山莊에서 개최되었다는 점이다.

건륭제가 열하 피서산장에서 만수절을 기념하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요인이 동시에 작용하였다. 첫째는 가을 사냥이 황제의 연례행사였다는 점이고, 둘째는 공교롭게도 그의 생일이 음력 팔월 13일이었다는 점이다.

건륭제는 매년 가을 정기적으로 만리장성 북방의 전용 사냥터에서 대규모 사냥을 벌였는데, 그의 생일 음력 팔월 13일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명절인 팔월 보름 중추절仲秋節의 이틀 전이었다. 이에 건륭제는 매년 만수절을 열하에서 보낸 다음에 가을 사냥을 떠나는 일정을 되풀이하게 된 것이다.

1780년 건륭제가 열하에서 특별한 칠순 잔치를 벌이다

그러나 칠순 생일을 여느 생일과 다름없이 평범하고 소박하게 보내겠다는 것은 그저 듣기 좋은 수사修辭였을 따름이다. 1780년 열하에서 열린 건륭의 칠순 잔치는 결코 평범한 이벤트가 아니었다.

열하의 칠순 잔치는 건륭 자신이 이룩한 제국을 표상하는 기념비적 이벤트였다. 그것이 그저 우연이 아니라 건륭이 구상하고 추진한 ‘기획’의 산물이었다면, 건륭제는 왕조의 의례 규범과는 다른 차원의 대경으로 자신의 칠순 생일을 기념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건륭은 또한 제왕으로서 자신의 삶을 이렇게 요약했다. "황제의 자리에 정정당당하게 올라, 영토를 크게 넓히고 온 세상을 신하로 복속시켰으며, 뭇 백성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시대와정치를 이 정도면 "소강小康이라고 말할 만하다."라면서 짐짓 겸손한 체했지만,
공전의 성세를 일군 고희천자의 자부심을 감출 방도는 없었다.

정조가 건륭의 칠순을축하하러특사를 보내다
조선이 요식 행위로 청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다

베이징은 천연두 면역이 없는 왕공들을 불러들이기에 부담스러운 장소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신장 지역에서 유목하던 두르베트나 토르구트의 왕공들은 당시 천연두 면역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베이징에서는 건륭이 바라는 대로 ‘외번이 모두 모이는’ 환경을 만들기가 곤란했다. 반면에 열하에서라면 건륭제 자신이 ‘초청’하고 싶은 ‘특별 하객’들을 천연두에 대한 염려 없이 모이게 할 수 있었다.

진하특사 박명원과 봉불지사 소동

박명원 일행은 열하에서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환대를 받고 돌아왔다. 조선조정이 사은사를 따로 파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할 정도로 융숭한 대접이었다. 황제의 융숭한 대접만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박명원 일행이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열하에서 받아 온 ‘불‘ 때문에 그만 사달이 나고 말았다.

정조의 특사 박명원이 열하에 다녀오다

박명원의 사행이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낳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오늘날에도 인기가 꽤 많은 책이다. 김창업金昌業(1658~1721)의 1712~1713년 연행 기록인 『연행일기燕行日記』, 홍대용洪大容(1731~1783)의 1765~1766년 연행 기록인 『연기燕記』와 더불어 18세기 연행록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기 때문에 한국 문학사와 사상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기본적으로 문학 작품으로서의 우수성에 더하여 저자 박지원이 18세기 후반의 조선에서라면 ‘진보 지식인’이라 부를 만한 북학파北學派의 대표자이며, 당대의 조선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았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또한 『열하일기』는 만주인들이 세운 청 왕조 치하의 중국에 대한 외국인의 관찰 기록이라는 측면에서도 그 가치를 널리 인정받아왔다.

하지만 막상 『열하일기』를 직접 읽어본 독자라면 결코 쉬운 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열하일기』는 워낙에 한글이 아니라 한문으로 쓴 책이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국가가 은폐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남김없이 다 폭로했다. 당시의 기록물들이 제도적ㆍ사회적ㆍ이데올로기적 제약을 받았던 것과 대조적으로, 『열하일기』는 시대를 앞서가던 자유로운 인간 박지원이 쓴 책이기에 그러한 제약에 구속되지 않을 수 있었다.

박명원 일행이 열하에서 건륭의 특별한 환대를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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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대청對淸 정기 사행은 성절ㆍ정단ㆍ동지에 연공 납부를 더한 네 차례, 즉 ‘1년 4행’으로 정해졌다고 할 수 있다.

성절ㆍ정단ㆍ동지 등은 모두 옛날 사람들이 해마다 축하하고 기념하는 절일節日, 즉 명절이었다. 성절은 ‘성탄절聖誕節’이라고도 하는데 황제의 생일을 가리키는 말이다.

지금이야 크리스마스를 가리켜 성탄절이라고 하지만 원래는 황제의 생일에나 쓰는 말이었던 것이다. ‘만수성절萬壽聖節’ 또는 ‘만수절萬壽節’이라는 말도 썼는데, 글자 그대로 만 년을 장수하라는 축수祝壽의 의미였다.

오늘날에도 북한 같은 권위주의 국가에서 최고 지도자의 생일을 국경일로 기념한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옛날의 왕조 국가에서 군주의 생일이 명절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단은 음력 정월 초하루, 즉 새해 첫날의 아침을 가리킨다. 정조正朝, 원단元旦, 원조元朝라고도 썼다.

오늘날에도 중국에서는 ‘춘제chun jie[春節]’라는 이름으로 정월 초하루를 연중 최대의 명절로 쇤다. 우리나라에서도 설날은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조상에게 차례를 올리기도 하지만, 설날에는 떡국을 차려놓고 나이를 한 살씩 먹게 된 것을 모두 함께 기념한다.

동지는 24절기의 하나로 연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이다. 오늘날, 특히 도시에서는 동지 하면 팥죽 정도를 떠올릴 따름이지만 옛날에 동지는 1년의 새로운 주기가 시작되는 중요한 명절이었다.

음陰의 기운이 극점에 도달하여 이제부터는 양陽의 기운이 점점 자라기 시작하는 전환점이기 때문이다. 전통 달력의 정월 초하루나 오늘날 달력의 1월 1일January 1이 사람에 의해 인위적으로 정해진 1년의 첫날이라면, 동지는 우주의 자연이 정한 1년의 첫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명ㆍ청의 황제들이나 조선의 왕들은 큰 제사를 거행하여 동지를 기념하였다. 요즘 달력으로 동지는 12월 21일이나 22일에 오지만, 음력으로 동지는 늘 십일월에 있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동지가 반드시 십일월에 오도록 달력을 만들었다. 그래서 한 해의 마지막 달을 십이월 대신에 섣달로 부른 것처럼 십일월은 동짓달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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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正祖)
조선 22대 왕으로, 1776년 왕위에 올라 25년간 재위했다. 각종 개혁 정책을 추진하면서 선왕 영조와 함께 조선 최고 부흥기를 이끌었다. 청나라에 대한 반감이 지배적이었던 조야(朝野)의 분위기에서 벗어나 대청 친화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에 힘입어 북학파(北學派), 즉 청나라의 학술과 문물을 배우려 한 조선의 학자들이 정조 치세에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건륭제(乾隆帝)
청(淸)나라 6대 황제로, 1735년 즉위하여 60년간 재위했다. 조선의 영조ㆍ정조와 재위 기간이 거의 겹친다. 오늘날의 신장에 위치한 유목 제국 준가르를 정복하는 등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건륭제는 장수 황제로도 유명한데, 1780년 그의 칠순 잔치에 정조가 이례적으로 특사를 파견한 이래 조선과 청의 외교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우호 관계로 전환한다.

청(淸)
조선이 수백 년 동안 변방의 오랑캐로 여겼던 만주인(滿洲人)들이 세운 나라.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1616년 후금을 세우고, 명(明)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이후 1636년 청 태종 홍타이지가 스스로 황제를 칭하면서 국호를 청나라로 바꿨다. 명나라가 무너진 후 중원을 정복하고 몽골ㆍ티베트ㆍ신장까지 판도를 넓혔다. 신해혁명으로 1912년에 멸망할 때까지 268년간 중국을 통치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조선과 만주인의 후금-청 사이에서 일어난 세 번의 전쟁 중 마지막 전쟁을 가리킨다. 조선은 1619년 사르후 전투와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을 거쳐 후금과 형제 관계의 국교를 수립하였으나, 1636년 후금이 일방적으로 군신 관계를 강요하자 그 요구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러나 그것이 빌미가 되어 일어난 병자호란에서 치욕적으로 패배함으로써 결국 군신 관계를 받아들여야 했다. 조선이 오랫동안 청나라에 반감을 품은 이유가 되었다.

사행(使行)
사신 행차를 말하는데, 정기 사행과 비정기 사행으로 나눌 수 있다. 조선은 1년에 네 차례의 정기 사행을 청나라로 보내야 했다. 청나라가 국가 차원에서 기념하는 3대 명절 축하와 연공(年貢) 납부를 위한 사행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청나라가 베이징으로 천도한 이후 한 차례의 사신 파견으로 네 가지 사행 임무를 한꺼번에 해결하게 되었다.

만수절(萬壽節)
옛날 중국에서 황제의 생일을 가리켜서 사용한 말이다. 청나라의 만수절은 국가적으로 기념해야 할 중요한 날이었으므로, 의례 규정에 따르면 하례를 거행하고 연회를 베풀어야 했다. 건륭제는 만수절을 공적 행사로 치르는 데 소극적이었던 앞선 황제들과 달리 자신의 생일을 꼬박꼬박 챙겼는데, 대부분의 만수절을 베이징의 황궁 자금성이 아니라 열하의 여름 궁전 피서산장(避暑山莊)에서 기념하였다.

진하 특사(進賀 特使)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신하가 군주에게 특별히 축하의 뜻을 밝히는 것을 ‘진하’라 한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나라에 큰 경사가 생기면 진하를 위한 사신을 파견하곤 했다. 이 책에서는 건륭제의 칠순 잔치에 정조가 특별히 파견한 진하 특사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열하일기(熱河日記)』

열하일기(熱河日記)」
열하는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동북부에 위치한 청더(承德)의 옛 이름으로, 청나라 황제들의 여름 궁전 피서산장이있던 곳이다. 건륭제의 시대에 열하는 황제가 매년 여름과 가을의 몇 달을 머문 곳이었으므로 사실상 베이징에 버금가는 청나라의 두 번째 수도였다고 할 수 있다. 건륭제의 칠순 잔치에 정조가 파견한 진하 특사 일행이 조선의 사신으로는 최초로 열하를 방문하였다. 「열하일기」는 박지원이 진하 특사와 동행하면서 보고 겪은 일을 기록한 여행기이다.

앞으로 이 책의 본문에서 펼칠 이야기는 주제와 분량을 고려하여 크게 다섯 꼭지로 나누었다. 첫 번째 꼭지에서는 1780년 이전 조선의 반청反淸 의식이 어떤 연유로 형성되어 어떤 식으로 표출되었는지를 대략 설명하고, 청에 대한 사신 파견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소개할 예정이다. 이 꼭지에서 언급하는 사실들은 1780년 이후의 변화를 포착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다.

두 번째 꼭지에서는 먼저 청의 황제들이 자신의 생일을 어떻게 기념했는지, 건륭이 1780년 열하에서 벌인 칠순 잔치가 청나라에서는 어떤 의미의 ‘이벤트’였는지 소개할 것이다. 이어서 1780년에 젊은 국왕 정조正祖(1752~1800)가 과거 조선이 청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던 틀에서 벗어나 건륭의 칠순 생일을 ‘진하進賀 특사’ 파견이라는 특별한 방식으로 축하하였음을 이야기할 것이다.

세 번째 꼭지를 통해서는 1780년 건륭 칠순 진하 특사의 활동에 관한 여러 역사적 사실을 면밀히 추적해볼 것이다. 1780년 조선의 정조가 건륭의 칠순을 축하하는 특별 사절을 보내지 않았다면 박지원의 열하 방문도, 따라서 『열하일기』의 탄생도 아예 불가능했을 터이니 진하 특사 파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또한 『열하일기』 속의 열하 이야기가 역사적 실제와 어떻게 다른지 포착하려면 1780년의 진하 특사와 관련하여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논의의 전제 조건이 된다.

네 번째 꼭지에서는 박지원이 특히 어떤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열하일기』 속 열하 이야기를 구성하고 서술하였는지, 그리고 그러한 구성과 서술은 어떤 배경과 의도에서 나온 것인지 탐구할 예정이다.

마지막 다섯 번째 꼭지에서는 먼저 1780년의 열하 이후 조선 사신들에 대한 청나라의 접대에 나타난 변화를 소개할 것이다. 조선 사신을 접대하는 데 어떤 변화가, 어떤 경위를 거쳐 일어났는지 그리고 조선ㆍ청 양국 관계의 역사라는 맥락에서 그 변화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지 생각해볼 것이다. 또한 이런 청의 변화가 사실은 1780년대 이후 전체 제국 경영 및 대외 관계 운영에서 건륭제가 도입한 변화의 일부였음을 밝히고, 그러한 변화의 의도 및 효과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것이다.

조선은 건국 이래 수백 년 동안 여진인들을 변방의 보잘것 없는 오랑캐라고만 여겼다. 그러나 병자호란에서 치욕적으로 패전함으로써 그들이 세운 청나라의 신하로 전락하였다. 그에 따라 병자호란 이전 명나라를 대국으로 섬겼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부터는 청나라를대국으로 섬기며 때마다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쳐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조공을 위해 오랑캐 소굴 선양을 향한 사행길에 올라야 했던 조선 사신들의 심정은 얼마나 참담했을까?

정묘호란으로 오랑캐의 나라 후금과 형제가 되다
조선 왕조(1392~1910)는 건국 초기부터 중원의 주인 명나라(1368~1644)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무진장 애를 썼다. 조선의 국왕은 1년에 몇 번씩이나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를 보통 조공朝貢이라고 부른다. 명의 황제는 비록 형식적이고 사후적인 행위이긴 했지만 조선의 국왕을 공식적으로임명하였는데, 이를 책봉이라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외교 관계의 역사적 연원을 고대 중국에서 천자의 권위를 누리던 주나라 왕이 제후를 책봉하고, 제후가 때마다 주나라 왕의 조정에 찾아가 인사를 올리고 공물을 바치던 관계에서 찾았다.

이에 따라 명 황제와 조선 국왕의 관계는 명분상 임금과 신하의 관계, 즉 군신관계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중국의 입장에서 조선은 엄연히 ‘외이의 나라였으며, 조선의 국왕은 명 국내의문. 무신료, 즉 ‘신과 명백히 구별되는 ‘외신‘이었다. 조선의 문·무 신료들도 명 황제의 신하가 아니라 명황제의외신인 조선 국왕의 신하였기 때문에, 명의 ‘내신‘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국왕의 ‘배신‘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명과 조선의 관계는 보통 ‘사대자소事大字小’ 관계의 전형이라고 한다. 사대자소란 ‘약소국은 강대국을 지성으로 섬기고, 강대국은 약소국을 자애롭게 보살핀다’는 의미이다.

조선은 명나라를 대국으로 섬기는 것을 당연시하였다. 마찬가지로 여진인女眞人들에게 섬김을 받는 것 또한 당연하게 여겼다. 훗날 청나라의 핵심을 형성하는 만주인滿洲人들은 여진인들의 후예였고, 여진인들은 원래 조선 땅 동북쪽에 빌붙어 지내는 ‘오랑캐’에 불과한 존재로 취급되었다.

조선 초기의 실록을 잠깐이라도 들여다보면 여진의 추장들이 때마다 예물을 바치러 찾아오고, 조선의 왕들이 선물을 하사하면서 그들을 다독이는 모습을 금세 찾을 수 있다. 말하자면, 여진은 조선을 섬기고 조선은 명을 섬기는 위계hierarchy질서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16세기 말까지는 그랬다.

이런 오랑캐들의 세계에 17세기 초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나라가 나타나더니만, 급기야는 이제 명나라와 맞먹겠다면서 조선에 자기들을 섬기라는 요구를 들이대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명이나 조선으로서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사태였다.

보복에 나선 명나라는 대규모 원정군을 조직하면서 조선에도 파병을 요구하였다. 그때 조선은 남의 싸움에 끼기 싫었지만 명의 압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약 1만 3000명의 병력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1619년 봄에 벌어진 사르후 전투에서 명군은 후금군에 대패하였다.

조선군도 심하深河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크게 패하였다. 도원수 강홍립姜弘立(1560~1627)은 무려 8000~9000명의 희생자를 낸 끝에 생존자들을 데리고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강홍립의 투항 결정이 광해군光海君(1575~1641)의 밀지密旨에 따른 것이라는 이야기가 일찍부터 돌았는데, 20세기 전반 일본인 학자들은 이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광해군이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의 길을 갔다는 주장을 내놓은 바 있다.

그러나 ‘밀지설’은 강홍립의 투항이 8000~9000명이나 희생될 정도의 격렬한 전투를 치른 뒤에야 결정되었다는 사실과 모순이니, 나중에 누군가가 지어낸 낭설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설령 광해군이 정말 중립 외교를 추구했다손 치더라도 결국에 가서는 파병을 결정한 이상 그의 중립 외교는 기껏해야 실현하지 못한 바람에 불과하다.

한편 1626년 후금의 두 번째 칸(한汗)으로 즉위한 홍타이지(1592~1643, 청 태종) 앞에는, 조선과의 관계와 관련하여 누르하치가 미처 처리하지 못하고 간 두 가지 과제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눈엣가시 같은 조선 주둔 명군의 처리였고, 다른 하나는 조선과의 국교 수립이었다. 1627년에 일어난 두 번째 전쟁 정묘호란은 바로 후금이 이러한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다.

그러나 당시 후금과 명은 적대 관계에 있었다. 정묘호란 이후 조선은 새로 체결한 후금과의 형제 관계를 명과의 군신 관계와 충돌하지 않도록 운영해야 하는 난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인조가 1633년 홍타이지에게 보낸 국서에서 "귀국이 바야흐로 천조天朝와 원수가 되니, 우리는 그 사이에 끼어 부자와 형제의 은의恩義를 둘 다 온전히 하고자" 한다며 고충을 토로했듯이, 그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병자호란 직후 소현세자와 함께 청의 수도 선양으로 끌려가 볼모 생활을 했던 효종은 반청 의식이 남달랐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북벌을 위해 양성했다는 조선의 군사들은 1650년대에 청을 도와 만주 북부로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을 저지하는 싸움에 투입되었을 뿐이다.

효종은 끝내 북벌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지극한 원통함이 마음에 있건만,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至痛在心, 日暮途遠]."라는 안타까움 속에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어떤 이들은 효종의 북벌 계획을 시세를 읽지 못한 무모한 망상이었다고 폄하하지만, 1650년대까지만 해도 남명 등의 무장항청抗淸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명의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기다렸다가청을 협공한다는  발상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1662년 남명의 마지막 황제 영력제永曆帝 (1625~1662)가 청에 죽임을 당한 이후로는 사정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노년의 영조가 ‘황하가 맑아지는 날’을 고대하다
앞선 시기는 차치하더라도 1754년 영조가 스스로 밝힌 결코 "잊을 수 없는 네 가지 일"은 18세기 중엽 청의 멸망에 대한 조선의 기대감을 잘 드러낸다. 1754년이면 왕위에 오른 지 30년이 된 시점인데, 이때 영조는 자신이 절대 잊지 않고 사는 것 네 가지로 첫째 교목세신喬木世臣, 둘째 황하지청黃河之淸, 셋째 백성百姓, 넷째 조제調劑를 꼽았다.

‘황하지청’은 황하가 맑아지기를 기다린다는 의미인데,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와 『영조실록英祖實錄』에는 이 무렵부터 영조가 신하들과 나눈 대화에 이 문구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 의미를 이해하려면, 먼저 영조가 청나라에 다녀온 사신들과 나눈 이야기들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승정원일기』 영조 28년(1752) 사월 24일 기록을 보면, 영조가 전년 겨울 청나라에 갔다가 막 돌아온 사신 일행과 만나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 ‘백년하청百年河淸’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듯이 황하가 맑아진다는 것은 원래 아무리 기다려도 실현되지 않는 일을 의미한다. 영조는 청의 멸망을 기다리기란 곧 황하가 맑아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을 시인하고 있었던 셈이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말 그대로 옛날 사람들에게는 정말 드물었던 나이 칠순에 이른 1763년에도 영조는 막 귀국한 사신 일행에게 청 국내의 사정에 대해 듣고는 "황하가 맑아진다는 소식은 들을 가망이 없구나!"라고 탄식하였다.

영조가 일흔일곱 살이던 1770년, 청나라에서 돌아온 사신 서명응 徐命膺(1716~1787)은 영조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건륭의 실덕이 심하니 오래버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날 대화에서 영조는 ‘하청‘ 소식을 묻지 않았다. 그럼에도 서명응은 건륭제의 청나라가 조만간 망할 것 같다는 말을 던진 것이다.

서명응은 노년의 영조가 청나라가 번영을계속하고 있다는 현실에 얼마나 낙담하고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임금을 위한다는 마음에 이런 위로의 말을 건넸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조직이든 구성원이 아무런 근거도 없거나 심지어 사실에 반하는데도 지도자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는 상황은 그 조직의 미래를 위하여 결코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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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여기가 맞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주변 상가는 그대로인데 약국이 있어야 할 자리에 정작 약국이 없었다. 상가와 상가 사이 텅빈공터만이 이 과장을 맞이했다.
"하아……. 젠장. 정말 미치겠네. 귀신에 홀렸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 과장이 경험한 약의 효능은 기필코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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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로스 헤븐.
전 세계를 휩쓴 끔찍한 연쇄 자살 유행의 시작이었다. 자살률 1위에 빛나는 한국은 그 상황이 더욱심각했다.
혼자서는 죽을 수 없다며 캡슐 안에 든 로스 가루를 음료수에 타 사람들과 나눠 마시고 혼수상태에빠지는 집단 로스 헤븐 사건이 벌어지는가 하면, 배우자를 잠재우기 위해 다량의 로스를 음식에 섞어먹이는 사건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이 과장은 결국 차장을 달지 못한 채 회사에서 쫓겨났다. 만년 과장으로 경력을 마친 그에게 지인들은 조롱의 의미로 이 과장이라는 직함으로 그를 불렀다. 사회생활에서 위로 가지 못하고 정체되다 결국 도태돼버린 이 과장의 껍데기가 이름을 대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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