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청에 대한 사신 파견은 크게 정기 사행과 비정기 사행의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비정기 사행은 축하ㆍ위로ㆍ감사 등의 뜻을 표할 필요가 있을 때나 특별한 현안이 발생했을 때 보내는 것으로, 초기에는 파견 빈도가 대단히 높았으나 시간이 갈수록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다. 정기 사행은 양국 관계의 현안 유무와 무관하게 매년 정해진 때마다 파견하는 것이었는데, 그 파견 빈도는 병자호란 종결 직전에 문서로 규정되었다.

이처럼 한 번의 사신이 둘 이상의 조공 임무를 한꺼번에 수행하는 것을 병공倂貢이라고 한다. 병자호란 이후 몇 년 동안 갖가지 이유로 별사 파견이 매우 잦았지만, 조선은 적어도 ‘1년 4행’의 정기 사행에 관한 한 실제로는 두 차례 정도의 사신 파견으로 청이 부과한 의무를 그럭저럭 이행할 수 있었다.

1644년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이 이자성李自成(1606~1645)이 이끄는 농민 반란군에게 떨어지고 숭정제가 자결하는 돌발 사태가 일어났다. 청나라는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십분 활용하여 베이징을 점령하고는 아예 자신들의 수도마저 그곳으로 옮겨버렸다. 이 사건은 보통 청의 입관入關이라고 불린다.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고 하는 만리장성 동쪽 끝의 산해관 안쪽으로 들어왔다는 의미이다.

삼절연공행을 위해 떠나는 사신 일행을 당시 조선 사람들은 관행적으로 ‘동지사’라고 불렀다. 동지를 축하하는 표문과 방물도 가져가긴 했지만, 동지 자체와는 사실상 무관한 사행임에도 그렇게 부른 것이다. 가까운 과거에 명나라로 가던 절사 중에서 동지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관행을 계속 이어간 것일까? 아니면, 시월 말에서 십일월 초에 서울을 떠나 동짓달의 대부분을 길에서 보내는 사행이었기 때문일까? 여전히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기에서는 ‘삼절연공행’ 대신에 ‘동지사’라는 명칭을 쓰기로 한다. 이름이 짧기도 하거니와 당시 사람들의 관행을 존중한다는 의미도 있다. 게다가 동지사라고 하면 그것이 겨울 여행이었다는 사실을 잘 드러낸다는 장점도 있다.

하마연과 상마연
사신에 대한 환영연과 환송연은 각각 하마연下馬宴, 상마연上馬宴이라고 불렸다. 도착하면 ‘말에서 내리기’ 마련이고, 떠나려면 ‘말에 오르기’ 마련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문자 그대로라면 하마연은 사신이 베이징에 도착한 직후에, 상마연은 베이징을 출발하기 직전에 여는 것이 정상이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초의 기록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하마연은 사신이 베이징에 도착한 지 6~7일 안에, 상마연은 베이징을 떠나기 전 5~6일 안에 열리는 것이 원래의 관례였다고 한다.

사행 참가자들은 오늘날 한ㆍ중을 오가는 속칭 ‘따이궁’이라는 보따리상들과 비슷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다들 인삼이나 은처럼 가볍고 값나가는 것들을 힘이 닿는 대로 바리바리 싸서 가지고 갔다. 각 개인의 무역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워낙에 인원이 많고 빈도가 잦다 보니 전체 무역 규모는 매우 컸다.

조선의 사신이 140년 만에청 황제의 만수절 하례에 참석한 일은 두말할 나위 없이 조선의 정조가 파견 의무도 없었던 진하 특사를 자발적으로 보냈기 때문에 가능했다. 더군다나 청에 조공하는 여러 외국가운데 1780 년 열하의 칠순잔치에 축하 사절을 보낸 나라는 조선이 유일했다. 조선의진하 특사 파견은 당시 건륭제도 기대하지 않았던 이례적인성의 표시였으며, 바로 그러한까닭에 앞선 황인점 사행의 칠순 축하 이상으로 "대단하게생색"이 났다.

만수절 행사에는 다른 황제의 시대에는 발견할 수 없는 고유의 특징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대부분의 만수절 행사가 베이징의 자금성이 아니라 열하의 피서산장避暑山莊에서 개최되었다는 점이다.

건륭제가 열하 피서산장에서 만수절을 기념하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요인이 동시에 작용하였다. 첫째는 가을 사냥이 황제의 연례행사였다는 점이고, 둘째는 공교롭게도 그의 생일이 음력 팔월 13일이었다는 점이다.

건륭제는 매년 가을 정기적으로 만리장성 북방의 전용 사냥터에서 대규모 사냥을 벌였는데, 그의 생일 음력 팔월 13일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명절인 팔월 보름 중추절仲秋節의 이틀 전이었다. 이에 건륭제는 매년 만수절을 열하에서 보낸 다음에 가을 사냥을 떠나는 일정을 되풀이하게 된 것이다.

1780년 건륭제가 열하에서 특별한 칠순 잔치를 벌이다

그러나 칠순 생일을 여느 생일과 다름없이 평범하고 소박하게 보내겠다는 것은 그저 듣기 좋은 수사修辭였을 따름이다. 1780년 열하에서 열린 건륭의 칠순 잔치는 결코 평범한 이벤트가 아니었다.

열하의 칠순 잔치는 건륭 자신이 이룩한 제국을 표상하는 기념비적 이벤트였다. 그것이 그저 우연이 아니라 건륭이 구상하고 추진한 ‘기획’의 산물이었다면, 건륭제는 왕조의 의례 규범과는 다른 차원의 대경으로 자신의 칠순 생일을 기념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건륭은 또한 제왕으로서 자신의 삶을 이렇게 요약했다. "황제의 자리에 정정당당하게 올라, 영토를 크게 넓히고 온 세상을 신하로 복속시켰으며, 뭇 백성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시대와정치를 이 정도면 "소강小康이라고 말할 만하다."라면서 짐짓 겸손한 체했지만,
공전의 성세를 일군 고희천자의 자부심을 감출 방도는 없었다.

정조가 건륭의 칠순을축하하러특사를 보내다
조선이 요식 행위로 청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다

베이징은 천연두 면역이 없는 왕공들을 불러들이기에 부담스러운 장소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신장 지역에서 유목하던 두르베트나 토르구트의 왕공들은 당시 천연두 면역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베이징에서는 건륭이 바라는 대로 ‘외번이 모두 모이는’ 환경을 만들기가 곤란했다. 반면에 열하에서라면 건륭제 자신이 ‘초청’하고 싶은 ‘특별 하객’들을 천연두에 대한 염려 없이 모이게 할 수 있었다.

진하특사 박명원과 봉불지사 소동

박명원 일행은 열하에서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환대를 받고 돌아왔다. 조선조정이 사은사를 따로 파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할 정도로 융숭한 대접이었다. 황제의 융숭한 대접만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박명원 일행이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열하에서 받아 온 ‘불‘ 때문에 그만 사달이 나고 말았다.

정조의 특사 박명원이 열하에 다녀오다

박명원의 사행이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낳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오늘날에도 인기가 꽤 많은 책이다. 김창업金昌業(1658~1721)의 1712~1713년 연행 기록인 『연행일기燕行日記』, 홍대용洪大容(1731~1783)의 1765~1766년 연행 기록인 『연기燕記』와 더불어 18세기 연행록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기 때문에 한국 문학사와 사상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기본적으로 문학 작품으로서의 우수성에 더하여 저자 박지원이 18세기 후반의 조선에서라면 ‘진보 지식인’이라 부를 만한 북학파北學派의 대표자이며, 당대의 조선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았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또한 『열하일기』는 만주인들이 세운 청 왕조 치하의 중국에 대한 외국인의 관찰 기록이라는 측면에서도 그 가치를 널리 인정받아왔다.

하지만 막상 『열하일기』를 직접 읽어본 독자라면 결코 쉬운 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열하일기』는 워낙에 한글이 아니라 한문으로 쓴 책이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국가가 은폐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남김없이 다 폭로했다. 당시의 기록물들이 제도적ㆍ사회적ㆍ이데올로기적 제약을 받았던 것과 대조적으로, 『열하일기』는 시대를 앞서가던 자유로운 인간 박지원이 쓴 책이기에 그러한 제약에 구속되지 않을 수 있었다.

박명원 일행이 열하에서 건륭의 특별한 환대를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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