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상을 받들고 돌아온 사신‘이 되다

박명원이 ‘봉불지사‘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다

앞에서 보았듯이 박명원 일행은 열하에서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환대를 받고 돌아왔다.
조선 조정이 사은사를 따로 파견해야만 한다고 판단할 정도로 융숭한 대접이었다. 황제의 융숭한 대접만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박명원 일행이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열하에서 받아 온 ‘금불佛‘ 때문에그만 사달이 나고 말았다.

‘사악하고 더러운 물건‘이란 불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유생들은 박명원 일행을 ‘봉불지사奉佛之使"라고규탄하였다. ‘불상을 받들고 돌아온 사신‘이었기에 붙여진 말이었겠지만, ‘부처 또는 불교를 받드는 사신‘이라는 뜻도 되니 박명원은 배불의 나라 조선에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오명을 뒤집어쓴 처지가 된것이다.

사태가 험악해지는 가운데 십일월 12일, 부사였던 정원시가 이 일은 한 번 폭발하지 않을 수 없는 사안이었다고 하면서 불상을 받아 온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지만 성균관 유생들의 원칙을 지킨 비판 앞에서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정사였던 박명원 역시 일이 부득이했음을 호소하면서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처벌을 청한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나 정조는 이 사안은 굳이 잘잘못을 따져처벌을 논할 필요가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박명원에게 안심하라고 일렀다.

박지원『열하일기』의
‘봉불지사‘
변호론

박지원의 입장에서도 사신 일행에 대한 ‘불‘ 혐의는 남의 일이라고 치부하며 마냥 나 몰라라 하고 침묵할 문제가 아니었다. 박명원은 말 그대로 남이 아니라 자신의 팔촌 형이 아닌가. 또한 공식적으로야 아무런 책임도 질 필요가 없는 자제군관의 신분이었을지언정 그자신도 필경 당시 사행의 엄연한 일원이었으므로 ‘봉불지사‘라는 오명과 완전히 무관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

청 예부의거짓을 밝혀 사신을 변호하다
박명원의 불행 중 다행: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쓰다

여기서 잠깐 이런 상상을 해보자. 만약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쓰지 않았다면 박명원은 살아생전에 그리고 ‘천하 후세에 과연 어떤 평가를 받게 되었을까?

물론 박명원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오늘날 우리는 그가 정말 봉불을 했다 한들 전혀 문제시하지 않는세상에 살고 있다. 성균관 유생들은 "다만 우리 국가에 치욕을 끼칠 뿐만 아니라, 또 장차 천하 후세의비웃음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박명원 일행을 비난했지만, 오늘날 불상을 가리켜 대놓고 ‘사악하고 더러운 물건‘이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외국에서 불상을 가져왔다고 국가의 치욕을 운운하며 ‘천하 후세의 비웃음‘을 걱정할 사람도 없다.

하지만 박명원 및 그와 행동을 함께했던 200여 년 전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천하 후세의 비웃음‘까지는가지 않더라도 당장 현실에서 무릅써야 하는 비난과 평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조선의 관료사대부에게 봉불은 정말 최악의 오명이었다.

그러나 정말 다행스럽게도 박명원에게는 박지원이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박명원 역시 『열하일기』를읽었을 것이다. 상상하건대, 그는 박지원을 자제군관으로 삼아 데려갔을 뿐 아니라 정말 갑작스러웠던열하행을 앞에 두고 그냥 베이징에 남아 당시 ‘세상의 중심‘을 한껏 체험하려던 박지원을 설득해서 열하에 동행한 일을 회상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판첸과의 만남 및 불상에 관한 일을 자세하고 치밀하게 해명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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