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문 (다)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절하며 뵈었다’라는 뜻의 ‘배견’과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했다’라는 뜻의 ‘고사叩謝’이다.

「찰십륜포」의 전체 내용은 다시 세 개의 이야기로 나눌 수 있다. 편의상 각각의 이야기에 차례로 ‘만남의 의례 이야기’, ‘처치 곤란 불상 이야기’, ‘건륭과 판첸의 만남 이야기’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한다.

군기대신은 청에서는 황자ㆍ부마는 물론이거니와 황제조차도 판첸에게 고두叩頭를 하니 조선 사신 또한 응당 판첸에게 "절을 하고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拜叩]."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모든 사태는 ‘황제의 명’에 의한 것이었다.

박지원은 귀국길에 연도沿道의 아무 사찰에나 버리고 가자니 자칫 중국의 분노를 살까 두렵고, 그렇다고 그냥 불상을 "들고 입국하자니 물의를 일으킬 것이 뻔하니, 피차의 교계에서 물에 띄워 흘려보내 바다로 보내기에는 압록강만 한 데가 없다."라고 썼다. 이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결국 박명원이 정조의 명령에 따라 불상을 묘향산으로 보낸 것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이다.

박지원은 이런 독자를 겨냥하여 자신이 ‘목도한 바’, 양자의 의례상 지위가 대등했음을 곧바로 드러내는 황제와 판첸의 항례抗禮 장면을 제시함으로써 회심의 결정타를 날렸다. 게다가 박지원은 당시 청에서 화신에 버금가는 권신이었던 복장안이 판첸 앞에서는 차 시중이나 드는 존재였다는 사실도 독자에게 주지시키고 있다.

여기서 좀 ‘비딱한‘ 질문을 던지고 싶어진다. 다른 것은 그렇다 치고, 「찰십륜포」의 이야기들이 정말 박지원이 강조한 대로 ‘팔월 11일‘에 그가 직접 목도한바‘에 근거한 것이었을까? 요즘으로 치면공식 수행원 신분도 아니었던 박지원이『열하일기』의 「찰십륜포」등에 묘사된 장면들을 직접 ‘목도‘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일이었을까?

「찰십륜포」에 실린 ‘건륭과 판첸의 만남 이야기‘는 사실 ‘팔월 11일‘에 일어난일을 쓴 것이 아니다. 불꽃놀이 관람을 위한 두 사람의 만남은 팔월 14일에 일어났다. 그리고 박지원은 두 사람의 만남을 직접 목도하지 않았다.

‘건륭과 판첸의 만남이야기‘는 기껏해야 박명원으로부터 전해들은 바에 근거한 것이었을 따름이다. 심지어 ‘만남의 의례 이야기‘와 ‘처치 곤란불상 이야기‘ 역시 전해 들은 바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뚜렷한 증거가 없는 이상 일단은 박지원의 말대로 팔월 11일에 그가 직접 목도한 바였다고 간주해도 무방할 것 같다.

팔월 11일 자신이 ‘목도한 바’를 기록한 ‘만남의 의례 이야기’와 ‘처치 곤란 불상 이야기’ 바로 다음에 팔월 14일에 있었던 ‘건륭과 판첸의 만남’에 대해 ‘전해 들은 바’를 접속함으로써 박지원이 박명원을 위한 변호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한편, 『열하일기』를 제외한 모든 사료가 불꽃놀이가 팔월 14일의 일이었음을증언한다. 청의 기거주는 팔월 14일 오후피서산장 내 만수원에서 불꽃놀이가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당시 참석자 명단에서박명원 등 조선 사신 3인을 발견할 수 있다. 티베트 사료에서도 불꽃놀이 날짜는팔월 14일이다.

요컨대, 박지원은 치밀한 구성을 통해「찰십륜포」를 읽는 독자의 ‘시간 착오‘를유도했다. 이 시간 착오는 두 가지 효과를노린 것이었다.

첫째, 독자로 하여금 「찰십륜포」 전체를 같은 날의 일로 읽게 하는 것이다. 둘째, 「찰십륜포」 전체를 박지원 자신의 목격담으로 읽게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공히 ‘불‘의 사신 박명원을 위한 변호 효과 극대화에 기여했음은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열하일기』의 열하 이야기에서 관심의 초점은온통 판첸에게 쏠려버렸다고 해도과언이 아니다.

이는 ‘봉불지사‘ 문제 때문에 박지원의 시야가 좁아진 결과였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다른한편으로는 청과 몽골·티베트의 관계에 대한 박지원의 이해 수준이 그다지  높지  못한 데서 비롯된 측면도 있는 것 같다.

결국 봉불지사를 위한 변호의 필요성과 당시의 몽골ㆍ티베트에 대한 박지원의 인식 부족 등으로 『열하일기』의 열하 이야기에는 건륭 칠순 만수절에 대한 좀 더 다양한 각도의 관찰 및 이해가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사라져버렸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당시 열하에서 판첸의 존재감을 고려할 때 설사 귀국 후에 봉불지사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박지원은 아마 판첸과의 만남을 대서특필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추측된다.

게다가 판첸은 이미 열하에서부터 박명원 일행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돌발 사태’의 진원이었다. 따라서 『열하일기』의 열하 이야기가 황제의 칠순 잔치보다는 판첸에 초점을 맞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까지 우리는 박지원의 명성에 가려 『열하일기』를 역사학적 사료의 비판 대상으로 올린 적이 거의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에 순간 등골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느낌이 든다.

이제부터는 『열하일기』에서 적어도 직ㆍ간접으로 판첸과 관련이 있는 부분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충실히 전달한 것이라고 무작정 믿지 말아야 한다. 뜻하지 않은 봉불 혐의로 비난의 대상이 되어버린 박명원과 그 일행의 변호를 위해 박지원이 고안한 주도면밀한 구성의 산물로 보아야 한다.

‘외번外藩’이라는 한자 단어는 ‘바깥 울타리’를 의미한다. 여기서 ‘울타리’는 천하의 중심인 천자, 즉 황제를 보호하는 제후의 역할을 비유한 말이다. ‘바깥’이라고 했으니, ‘안쪽’에도 또 다른 울타리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안쪽 울타리’ 역할을 하는 제후를 가리키는 말은 여러 가지가 있고 또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었지만, 명ㆍ청의 경우 외번에 딱 대응하는 용어를 하나만 꼽자면 ‘종번宗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오늘날 ‘종주宗主-번속藩屬’의 준말로 와전되어 오용되고 있지만, 원래 ‘종번’의 ‘종宗’은 황제의 친족, 즉 종실宗室을 지칭한다. 황제의 아들 가운데 황위를 계승한 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대개 왕작王爵을 받았는데, 종번이란 바로 황족 중 왕작 소유자를 가리킨다.

조선의 대청 관계와 대청 인식이 분노와 원한을 출발점으로 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게다가 조선은 그 분노와 원한을 복수로 씻어내는 통쾌한 순간을 누리지도 못하였다. 씻지 못한 원한은 단시간에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시간 앞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한순간에 사라질 수는 없더라도, 세월이 흐르면 분노와 원한의 기억은 흐릿해지기 마련이다. 당장의 어떤 현실적 필요도 없는 상황에서, 부모 세대가 겪은 원한의 기억을 자식 세대가 고스란히 간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더군다나 영조와 정조는 부자父子가 아닌 조손祖孫 관계라 그만큼 세대 차가 클 수 있었거니와 영조는 1694년생, 정조는 1752년생으로 나이 차도 무려 60년 가까이나 났다.

송시열은 주자朱子를 인용하면서 ‘복수오세설’을 주장하였다. 복수의 의무는 다섯 세대에 걸쳐 유효하다는 말이었다. 이에 따르자면 할머니의 원수인 오랑캐 칙사를 접대하라는 왕명은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었다. 아니, 거부해야 마땅했다. 결국 논쟁은 복수오세설의 승리로 끝이 났고, 김만균에 대한 처벌을 주장한 사람이 오히려 파직을 당하고 말았다.

건륭의 의도가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천하의 모든 이들‘에게 얼마나 잘 먹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먼훗날 21세기 초에 이르러 적잖은사람들이 17~18세기 폭력과 전쟁의 실제를 까맣게 망각하게 만드는데에는 꽤나 성공한 셈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건륭이 이런 효과까지 내다본 것은 아닐 터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변화상 또한 전체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영조와 같은 반청 의식과 조선중화주의는 정조의 시대는 물론이거니와 19세기, 아니 조선 왕조가 망할 때까지도 그 생명력을 잃지 않았다.

그 때문에 17세기 중엽 명ㆍ청 교체 이후의 조선은 이미 멸망하고 없는 과거의 중국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모화사상慕華思想에 발목을 잡힌 나머지 역사를 한 걸음도 전진시키지 못한 채 ‘정지된 시간’을 살았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그러한 비판에서 1704년 명의 황제를 제사하기 위해 만든 대보단은 퇴행적 역사의 상징으로 간주된다.

왕이 존주尊周의 의리에 대해 자나 깨나 선왕의 뜻을 이어갈 생각으로 황단에 망배望拜를 하고, (···) 삼학사三學士 후예들을 발탁하여 등용하고 칠의사七義士들을 한꺼번에 제사 지내고 (···) 의義를 지켜 척화했던 신하들에 대해서는 모두 표창하고 기록으로 남겨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드러내 밝혔으며, 임진년에 공을 세우고 목숨을 바쳤던 신하들도 모두 다 세상에 알렸다.

주나라는 중화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나라이니 ‘주나라를 높인다’는 뜻의 ‘존주’란 곧 ‘존화尊華’, 즉 ‘중화를 높인다’라는 의미이다. ‘황단’은 대보단을 가리키고, ‘삼학사’는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에 끌려가 죽은 사람들, ‘칠의사’는 명나라와 몰래 연락하여 청나라를 치려다가 발각되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다. ‘임진년에 공을 세우고 목숨을 바쳤던 신하들’이란 일본의 침략에 맞서 명나라와 함께 싸운 전쟁의 유공자들을 의미한다.

정조는 조선이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킨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관련 사실을 한데 모아 기록으로 남기려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대개 이 인용문에 나타나는 바와 같은 정조의 존주론尊周論에 주목하였지만, 이 책을 통해 드러났듯이 정조가 현실에서 실천한 대청 외교는 분명 친청 분위기가 농후하게 감도는 것이었다.

정조의 치세에 이르러 박제가, 박지원 등으로 대표되는 북학파 지식인들이 또렷하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정조의 반청 역사의식 계승과 현실의 대청 사대 외교를 모두 사실로 인정하는 전제 위에서,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현상의 공존ㆍ병행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풀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지금 우리는 당시 교전 상대였다는 이유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원수로 여기지는 않는다. 물론 한동안은 높은 담을 쌓고 원수처럼 지냈다. 

하지만 전쟁으로부터 채 40년도 지나지 않은 1990년대 초에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하여 정치·군사적으로는 몰라도최소한 경제적 측면에서는 서로 없어서는안 된다고 여길 만큼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최근 들어 관계가 악화되긴 했지만, 심지어 일본과도 1945년의 해방으로부터 겨우 20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 국교를 회복하지 않았던가. 

세계사적으로는이와 비슷한 사례를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러니일견 모순으로 보이는 정조의 ‘존주‘와 대청 외교도 따지고 보면 그런 사례 중 하나로 꼽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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