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7년
몽골군과 화약의 확산
유라시아대륙 동서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족

○ 몽골초원 기마민족, 드넓은 유라시아대륙동쪽에서 서쪽에 걸친 거대 제국을 건설하다

13세기
화약이 유럽으로
화포, 전 유럽을 뒤흔들다

○ 흑색화약에 관한 기록을 남긴프란체스코수도회 수도사 로저 베이컨

1300년 무렵
증류주 출현
활력을 되찾아주는 기적의 약으로 여겨진 새로운 알코올

ㅇ세계사를 바꾼 증류주, 브랜디와 위스키의 탄생

1300년 무렵
대포 굉음이 울려 퍼지는 유럽
신형 무기가 유럽 판도를 뒤흔들다

○ 교회 종을 만드는 당시 주물 기술자들이 특별히 주목받은 까닭은?

1346~1353년
페스트 전야
14세기 페스트가 식민지 도시 카파에서 시작된 이유

ㅇ 여러 대륙으로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팬데믹‘으로 발전한최초 사례, ‘유스티니아누스 페스트‘

1346년
페스트 = 생물병기
페스트에 걸린 시체를 성안으로 던져 넣어 화학무기로 활용한 몽골군

○ 유럽 인구 3분의 1의 목숨을 앗아간 최악의 감염병, 페스트

1377년
검역의 시작
역설적으로 사회 변화와 발전을 앞당긴 페스트 팬데믹

ㅇ ‘검역‘을 뜻하는 영어 단어 ‘쿼런틴‘이40 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에서 유래한 까닭은?

농민도 많이 죽었기에 노동력이 부족해지며 임금이 크게 상승했다.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기 위한 기술 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한편, 농촌 인구의 격감으로 인해 오랫동안 농노가 지탱해온 중세의 상징인 장원제도가 붕괴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의 지위는 자연스럽게 향상되었다. 이에 따라 영주의 부당한 요구에 대해 농민 봉기나 반란이 빈번히 일어나곤 했다.

14세기 페스트 팬데믹으로 인한 사회 구조와 시대정신의 커다란 변화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으로 이어졌다.

1415년
얀 후스의 교회 비판
한 성직자의 투쟁이 역사의 흐름을 바꾸다.

○ 체코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화형당한 불운의  성직자 얀 후스

잉글랜드의 성직자이자 종교개혁가인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c. 1328~1384)는 "성경이야말로 신앙의 최고 권위다"라고 주장하며 당대 타락한 교회를 비판했다. 14세기 후반의 일이다. 그리고 위클리프는 가톨릭교회가 엄격히 금지하고 있던 성경의 모국어 번역, 즉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과감히 실행에 옮겼다.

당시 라틴어를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은 교회의 권위를 부여받은 사제 등 소수 엘리트에 국한되어 있었다. 당연하게도 민중은 라틴어를 알지 못했다. 이런 사회 구조상 라틴어 성경밖에 존재하지 않던 시대에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아 라틴어를 익혔다는 사실만으로 성직자의 권력과 부와 명예가 보장되었다.

얀 후스는 가톨릭교회의 이단자로 몰려 화형을 선고받았다. 1415년에 열린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내려진 결정이었다. 그러나 후스가 남긴 말은 오늘날까지 계승되어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다. "진실을 사랑하고,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지켜라" 라는 말이다. 이 문구는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에 있는 얀후스 동상 기단에 새겨져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문구는 오늘날 체코 대통령실에서 사용하는 깃발에도 "진실은 승리한다"라는 문구로 응용되어 새겨져 있다.

얀 후스를 추종하는 후스파는 거대한 세력이 되었다. 후스가 화형당한 뒤 보헤미아 독립운동, 농민반란 등과 결합한 결과였다. 이에 로마 교황 마르티누스 5세(Pope Martin V, 재위 1417~1431)는 십자군을소집해 전쟁에 돌입했다. 당시 십자군이 주 타깃으로 삼은 세력은 후스파 가운데 보헤미아 타보르를 중심으로 급진적인 움직임을 보인 타보르파였다.

○ 농민군 1만 명이 독일기사단을 중심으로 한신성로마제국의 십자군 10만 명을 괴멸시켰다고?
농민군 1만 명이 독일 기사단을 중심으로 한 신성로마제국의 십자군 10만 명과 대치했다. 그야말로정확히 10배의 전력 차이였다. 1421년 12월 21일, 쿠트나호라(Kutná Hora, 프라하에서 동쪽으로 60킬로미터 남짓 떨어져 있는 도시)에서였다. 농민군이 승리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그러나 전쟁이 벌어지자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1만 명뿐인 지슈카의 군대가 무려 10배에 달하는 신성로마제국의 십자군 기사단을 상대로 단지 승리를 거둔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괴멸시킨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신병기를 교묘히 운용해 화포를 집중적으로 발사함으로써 마구잡이로 공격해 들어오는 적군을 무력화시켰기 때문이었다. 독일 기사단이라는 명문 프로 집단의 최강군대가 최신 화포로 무장하고 집중 훈련을 받은 농민군에게 패한 것이다. 이 전투는 현대로 이어지는 ‘전쟁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전쟁사에 길이 남을 이 흥미진진한 전투를 계기로 세계전쟁사에 ‘화포의 시대‘가 마침내 도래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기사의 시대‘는 영원히 종말을 맞이했다. 이 전투에서 사용된 총핸드캐넌)을 체코어로 ‘피스탈라(Pistala)‘라고 부른다. 참고로, 이것이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권총의 일종인 피스톨(pistol)의 어원이다.

1415년
엔히크 항해 왕자
신항로 개척시대의 초석을 다지다

○ 신항로 개척시대의 트리거가 된 세우타의 향신료

1417년
루크레티우스의 재발견
그리스도교라는 ‘거르개‘를 거치지 않은 독창적 자연관

○ 독일 어느 수도원 서가에서 루크레티우스의책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발견한 이탈리아 학자 포조 브라촐리니

1440년 무렵
활판인쇄술 발명
전 세계적 지식의 빅뱅이 일어나다

○ 중국에서 발명된 활판 인쇄술이 동북아시아가 아닌 유럽으로 더 급속히 퍼져 나간 까닭은?

1450년
백년전쟁 종결
과학·기술 혁신을 등한시한 나라는 반드시 멸망한다

○ 신무기 대표의 힘으로 잉글랜드군을 무찌르고 백년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프랑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동로마제국, 역사 속으로 퇴장하다

○ 1,000년 동안 이민족 공격을 23차례나 막아낸 난공불락의 요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기상천외한 작전으로 무너뜨린 메흐메트 2세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오스만제국의 수도가 된 후 ‘이스탄불‘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그리스계 주민들이 ‘이스탄 폴린(eis tan polin, ‘도시를 향해‘라는 의미)‘
이라고 부르는 것을 터키인들이 듣고 지은 이름이 정식 명칭이 되었다고 한다.

1492년
유럽 열강, 신대륙에 도달하다
오늘날의 우주 진출과 다름없던 신항로 개척시대의 세계일주

○ 유럽에 고무가 전해지는 계기가 된 콜럼버스의 두 번째 항해

1516년
사탕수수 재배
대서양에 형성된 거대한 삼각무역권

○ 사탕수수 재배가 인류의 농업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드는 신호탄과도 같은 일대 사건으로 규정되는 이유는?

1516년
자본주의의 태동
‘교회 비즈니스‘로 막대한 수익을 거둔 유럽의 부호와 권력자

○ 오늘날의 대표적인 기축통화 US 달러의 원형이 된체코 북부산지 장크트요하임스탈 광산의 은화

장크트요아힘스탈(독일어로 ‘성 요아힘 골짜기‘라는 의미, 오늘날 체코 야히모프)이라는 골짜기에서 은광산이발견되었다. 1516년의 일이다. 장크트요아힘스탈은 ‘보헤미아‘로 칭해지던 체코 북부 산지에 속했다.
이곳에서 광산이 발견되자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 수천 명이 부나비처럼 몰려들었다. 사람들은이곳에서 연간 85톤의 은을 캐내어 지름 4센티미터 크기 은화를 대량으로 제작했다. ‘요아힘스탈러(Joachimstaler)‘라고 불린 이 은화는 전 세계적으로 유통되었다. 훗날 요하임스탈러는 어미 부분만을 따서탈러‘로 불렸다. 그리고 그것이 또다시 변화해 ‘달러(dollar)‘, 즉 오늘날의 대표적인 기축통화인 US 달러가 되었다.

1521년
아스테카제국 정복
스페인에 막대한 부를 안겨준 천연염료

ㅇ 아스테카제국 수도 테노치티틀란을 멸망으로 몰고 간 결정적 요인 두 가지는?

1532년
잉카제국 정복
스페인을 세계제국으로 발돋움하게 한 식민지 아메리카대륙의 은

○ 심각한 임플레이션을 발생시켜 유럽 경제를 휘청이게 한 스페인의 포토시 은광산 개발

1541년
‘의학계의 루터‘가 등장하다
새로운 르네상스식 약학을 도입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의학자

○ 최초로 근대적 약학 개념을 주창한 ‘의학계의 루터‘ 파라셀수스

1554년
세계 최초의 커피하우스
커피라는 평범한 음료는 어떻게 세계사를 바꿨나

O초기에 커피는 기호음료보다 ‘약으로 사용되었다는데?
.

"직접적인 경험은 어떤 권위보다 우월하다."
이는 파라셀수스가 남긴 유명한 명언이다. 그는 그 누구보다 실제 관찰과 실험을 중시하는 의학자였다. 그러나 기존 지식과 질서를 공격하는 그의 과격한 주장과 행동은 환영받지 못했고 그는 대학에서추방당해 이곳저곳을 떠도는 괴짜 방랑자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파라셀수스는 낡은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새로운 르네상스식 약학을 도입하기 위해 쉼 없이 노력하다 세상을 떠났다. 이는 미켈란젤로가 바티칸 시스티나예배당 벽화 <최후의 심판>을 완성한 해인 1541년의 일이다. 파라셀수스가 불운한 죽음을맞이한 후 그의 철학과 방법은 ‘의화학(Iatrochemistry)‘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분야로 인정받아 크게 융성했다.

"(커피는) 이슬람교도가 마시는 사탄의 음료다."
유럽에는 이런 말이 유령처럼 떠돌아다녔다. 커피가 전파되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상황이다. 그리고 마침내 교황 클레멘스 8세(Pope Clemens VIII, 재위 1592~1605)에게 커피를 금지해줄 것을 간청하는 성직자들이 나타났다. 1605년의 일이다. 교황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놀랍게도 그는 커피를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직접 커피를 마셔보고 그 맛과 향에 반한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이토록 훌륭한 음료를 이교도만 마실 수 있게 하는 것은 너무 아깝지 않은가. 그러니 세례를 해서 그리스도교의 음료로 만들자"
그 결과 유럽에서도 자유롭게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아침부터 술독에 빠져 살면서도 위대한 업적을 남긴 매우 독특하고도 예외적인 ‘
인물이 존재한다. 전 세계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이던 20세기 중반 영국 총리로 재임한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재임 1940~1945, 1951~1955)이 바로 그다. 경이롭게도 그는 아침에는 탄산수에 희석한위스키, 낮에는 샴페인, 밤에는 와인 등을 들이붓듯 마시면서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조국 영국을구해냈다.

1556년
금속에 관하여 출간
르네상스 시대에 광산개발 발전을 이끈 책

○ 그 의사는 왜 ‘광산‘의 매력에 그토록 깊이 빠져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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