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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츠먼의 변호인 ㅣ 묘보설림 17
탕푸루이 지음, 강초아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6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전부터 서양보다는 동양 쪽 문화에 더 끌렸고, 대만에 다녀온 뒤로는 중국어권 콘텐츠에 관심이 많아졌다. 그런데 추리 소설 전문 잡지 『미스테리아』의 작년 11월 호에서 중국어권 추리 소설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었고, 거기서 소개한 소설 중 『바츠먼의 변호인』에 관심이 갔다. 대만 원주민 출신인 주인공이 사촌형 일가를 죽인 살인범의 변호를 맡게 되면서 일어나는 일을 그린 소설이라는데, 대만의 사회 문제를 다루고 있다니 대만에 관심을 가지게 된 나로서는 끌릴 수밖에 없었다.
근대에 중국의 한족이 들어오기 전까지 대만 섬의 주인은 원주민이었다. 그러나 한족이 들어오면서 원주민의 상당수는 한족에게 동화되었고 한족들로부터 차별받고 억압당했다. 대만이 고도 성장하던 시기에도 원주민은 주거 지역이 개발에서 소외되어 경제 발전의 혜택을 받지 못했고 교육 수준이 낮아 사회적으로 더 높은 위치로 이동할 가능성도 낮았다. 지금도 원주민들은 중국식 이름을 반드시 지어야 하고, 원주민 출신 군인들은 영관급 장성이 되는 경우가 드문 등 차별이 남아 있다. 2020년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서도 주인공 퉁바오쥐의 고향에서 고소득 전문직이 된 사람은 주인공 퉁바오쥐 한 사람뿐이다. 마을 사람들은 유일한 고소득자이고 한족들과 어울려 살아가며 고향 사람들과 대화할 때도 중국어만 쓰는 퉁바오쥐를 곱게 보지 않는다. 퉁바오쥐는 원주민 특유의 외모 특징이 별로 없고 중국어에도 능숙해 스스로 밝히지 않으면 원주민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을 수 있지만, 자신이 원주민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사람들이 보이는 미묘한 차별적 태도에 이골이 나 있다. 동포들에게는 배척받고 한족들에게는 차별당하는 그의 처지에서 대만 원주민의 오늘날 실상을 엿볼 수 있다.
국선 변호사인 그는 뜻밖의 변호를 하게 된다. 인도네시아 출신의 선원이 선장인 자신의 사촌형과 그의 아내, 어린 딸까지 죽였는데 그 선원을 변호하게 된 것이다. 고향 마을에서는 안 그래도 눈엣가시인 퉁바오쥐가 마을 사람을 죽인 살인범을 변호한다니, 그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려버린다. 퉁바오쥐의 제멋대로인 태도 때문에 법조계에서도 그의 편이 많지 않다. 그와 함께하는 사람은 법원에서 복무하는 사회 복무 요원 롄진핑과 통역을 맡게 된 인도네시아 출신 간병인 리나뿐. 원주민과 한족과 이주 노동자가 모여 또 다른 이주 노동자를 변호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이 소설은 대만 내의 이주 노동자 문제로도 가지를 뻗는다.
범인이 인도네시아인 선원 압둘아들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밝혀진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죽였는가'가 아니라 '압둘아들의 사형을 막을 수 있는가'이다. 압둘아들은 세 사람이나 죽였고 심지어 그중 한 사람은 두 살 난 어린아이였다. 그런데도 그의 사형을 막아야 할까? 롄진핑과 법무부 장관 천칭쉐는 사법 제도에는 결함이 있을 수밖에 없고 사형은 돌이킬 수 없다며 사형을 반대한다. 그러나 퉁바오쥐는 사형을 열렬히 반대하는 이들의 신념에 심드렁할 뿐이고 대만 국민의 대다수는 사형 제도가 유지되길 원한다. 사형이라는 제도 자체의 존재에 대한 찬반은 이 소설의 또 다른 핵심 줄기가 된다.
작가는 후기에서 사형제 폐지를 다루려고 했지만 원주민과 이주 노동자 문제까지 다루게 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 법조계 동료에게서 이주 노동자 관련 이슈를 듣고, 소설을 쓰기 위해 조사하다 대만 원주민이 어업에서 겪는 노동 현실을 알게 되면서 그는 세 가지 주제를 모두 다루게 되었다. 한 주제만으로도 책 한 권은 쓸 수 있는 굵직굵직한 이슈이기에 작가로서도 쉽지 않았을 도전이지만, 작가는 이 세 가지 주제의 균형을 잡으면서도 스릴러 장르의 완성도도 놓치지 않는다. 네 개의 공으로 저글링하는 듯한 도전을 완수한 것이다.
작가가 법조인 출신인 것이 확실히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법학대학원에서 석사 학위까지 땄고 5년 동안 변호사로 일했다. 그 덕분에 법정물로서의 디테일이 탄탄하다. 퉁바오쥐 쪽이나 그의 반대편에 선 사람들이나 법을 이용해 자신에게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 치열하게 두뇌 싸움을 한다. 법이란 것은 결국 논리의 싸움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작가가 대만의 사법 체계와 정치 체제, 관련된 판례, 통계 등을 각주로 보충 설명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500페이지에 이르는 분량 동안 퉁바오쥐와 상대편은 몇 번이나 승기를 빼앗고 뺏겨 승부를 예측할 수 없다. 사실 동등하게 싸운다기보다는 퉁바오쥐 팀이 체급부터 다른 상대편의 허점을 파고들면서 간신히 싸우고 있다는 것에 가깝다. 거기에 퉁바오쥐가 원주민으로서 겪는 갈등과 리나가 이주 노동자로서 겪는 폭력과 차별이 겹쳐 이들의 싸움은 더욱 힘겨워진다. 이들이 발버둥치는 동안 사형제 폐지를 위해 막후에서 움직이는 법무부 장관도 믿을 수 없다. 이런 힘겨운 싸움이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압둘아들을 둘러싼 더 큰 악의 실상이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속도가 붙는다. 쉴 새 없이 달려가는 소설의 후반부에서 독자들은 퉁바오쥐 팀이 과연 이 거대한 악의 실상을 드러낼 수 있을지, 그럼으로써 압둘아들의 사형을 막을 수 있을지 조마조마하며 지켜보게 된다. 퉁바오쥐 팀이 진실을 밝힐 기회를 얻으면 상대는 그 기회를 걷어차고, 또 다른 기회를 얻으면 또 다시 걷어차는 일이 반복된다. 그럼에도 독자들은 압둘아들이 사형장에 끌려온 상황에서도 희망을 놓지 못한다.
결말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들은 압둘아들의 사형을 막지 못한다. 마지막 기회는 스스로가 정의라고 믿는 오만한 악인이, 정의를 이루려면 희생이 따라야 한다며 날려버린다. 정의라는 가면을 쓴 불의 앞에서 퉁바오쥐 팀의 분투는 헛수고가 되고 만다. 그럼에도 퉁바오쥐도 롄진핑도 리나도 절망하거나 자포자기하지 않는다. 비록 압둘아들은 지키지 못했지만 각자 다른 곳에서 성실히 살아가면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퉁바오쥐가 통역인 리나 없이 압둘아들의 모국어인 자바어로 압둘아들을 안심시키는 장면에서, 살해당한 증인의 어린 아들을 거두어서 자식으로 키우는 장면에서 따뜻한 인류애와 희망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인간과 정의에 대한 희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다섯 번째 토끼인 감동까지 잡았다.
결말까지 가는 과정은 독자들에게도 쉽지 않은데, 지켜야 할 사람은 결국 지키지 못했으며 악인 중 누구도 처벌받지 않는 답답한 결말이 나왔다. 그중 하나는 처벌할 단서를 얻었지만 나머지 하나를 처벌한 단서는 얻지 못했다. 그렇기에 다시 읽기는 솔직히 버겁지만, 한 번 정독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 대만 사회의 문제점들을 디테일하고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법정물과 스릴러로서의 재미도 갖추었고, 약간의 감동도 있으니 여러모로 잘 만들어진 사회물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