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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메르 문자 기행 - 사람을 닮은 캄보디아 문자 덕질기
노성일 지음 / 소장각 / 2020년 10월
평점 :
'크메르 문자'라고 했을 때 어느 나라의 문자인지 바로 알아챌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바로 캄보디아의 고유 문자이다. 캄보디아라고 하면 앙코르와트, 킬링필드, 범죄 단지 밖의 다른 것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어떻게 크메르 문자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캄보디아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아는 앙코르와트에 직접 가면서부터다. 그는 그래픽 디자이너였기에 앙코르와트의 웅장한 건물과 정교한 조각보다는 거기 새겨진 독특한 글씨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것이 크메르 문자였다.
크메르 문자에 대한 관심은 캄보디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한 문자를 이해하려면 그 문자가 탄생한 배경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크메르 문자와 그에 얽힌 캄보디아의 역사를 한 사람의 삶에 비유해 탄생-성장-죽음-부활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인도 브라흐미 문자에서 파생된 문자로 시작해 기록 문화를 꽃피우다 크메르 루주로 소멸 직전까지 몰렸다 캄보디아 사람들의 노력으로 조금씩 소생하고 있는 과정을. 크메르 루주가 일으킨 대재난으로 국립도서관조차 서가가 휑하고 크메르 문자로 된 책들의 품질도 아직은 조잡하다. '유료 폰트'라는 개념도 캄보디아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리 잡지 않았다. 크메르 문자 자체가 수많은 모음과 자음을 갖고 있는 데다 자음과 모음의 조합에 따라 형태가 바뀌고, 모음이 자음의 상하좌우 사방에 붙으니 사용하기에 복잡하다. 그래서 캄보디아인들은 크메르 문자로 메시지를 보내기보다는 음성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을 더 편하게 여긴다. 저자도 크메르 문자의 미래가 밝다고 확언하지는 못하지만, 크메르 문자를 지키고 발전시키려는 사람들을 응원한다.
크메르 문자라는 낯선 소재를 저자는 새로운 디자인에 담았다. 저자 자신이 그래픽 디자이너이기에 자신의 이야기에 가장 잘 맞도록 이 책을 직접 디자인한 것이다. 우선 제목, 부제, 저자 이름, 출판사 로고를 넣지 않고 크메르 문자의 첫 글자 하나만으로 화면 전체를 꽉 채운 표지가 눈에 띈다. 그것도 붉은색 하나로 채워진 바탕에 검고 굵은 글씨로 박아놔서 눈에 더 잘 띈다. 뒤표지도 크메르 문자 중 한 글자만 넣었고, 앞표지와 뒤표지의 글씨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ISBN은 책등에, 바코드는 책날개에 넣었다. 챕터 페이지에는 캄보디아의 전통 무용 '압사라'에서 싹을 틔우고 자라나 꽃과 열매를 맺고 땅으로 돌아가는 식물 생의 각 단계를 표현하는 동작을 하나씩 넣었다. 크메르 문자의 글자를 하나하나씩 소개하는 부록을 114페이지나 넣었다. 하얀 본문 종이와는 다른 레몬색의 얇은 종이를 쓰고, 크메르 문자의 틀이 되는 선들을 넣어 마치 글자 연습을 하는 노트 같다.
이렇게 한 문자를 깊이 파고드는 책이 시리즈로 나오면 좋겠다. 우리에게 익숙한 한글과 알파벳뿐 아니라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지만 나름의 문자 문화를 오랫동안 꽃피워 왔던 문자들을 더 깊이 알고 싶다. 그것들을 더 깊이 탐구한다면 우리와 지리적, 문화적으로 가까운 나라나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 강대국에 국한되어 있던 시야를 넓혀 더 많은 나라를 깊이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