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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월; 초선전
박서련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7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삼국지』를 좋아했던 터라 『삼국지』의 2차 창작들에도 눈길이 갔다. 그러다 발견한 게 중국 작가가 제갈량 휘하의 촉나라 첩보 조직을 상상해서 쓴 『풍기농서』와 이 소설 『폐월 초선전』이었다. '폐월(閉月)'은 달조차 그 아름다움에 부끄러워져 얼굴을 가려버렸다는 뜻으로, 『삼국지』 최고의 미녀 초선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국 작가 박서련은 초선을 한 인간으로서 그려내고 싶었다면서 이 소설을 썼다. 초선의 1인칭 주인공 시점, 그녀 자신의 목소리로 그녀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것이다. 설정만 들어도 흥미롭지만, 과연 이 소설은 초선을 한 인간으로서 그려내겠다는 원래의 목적을 이루었을까.
도입부부터 후원 연못을 둘러싼 사건까지는 『삼국지』에 없는 부분인데, 딱 그 부분까지는 원래의 목적에 충실하다. 작가가 초선이라는 인물을 마음대로 만들어낼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가 그리는 초선은 열 살도 안 된 어린 나이에 거짓말로 자기 신분을 속여 상대에게 호감을 살 정도로 영악한 성품을 타고났다. 그녀는 어린 시절 자신이 굶어 죽지 않게 구해주고 돌봐줬던 거지 동료도,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가차없이 버린다. 작가는 밀도 있게 당시의 생활상과 생활감을 그려내기보다는 필요한 장면만 슥슥 스케치하듯 묘사하지만, 초선이 살아갔던 비정한 시대와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비정해져야 했던 초선이라는 인물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후반부에서는 『삼국지』의 서사 안에서 초선의 이야기를 풀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2차 창작 작가에게 원작은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여 갈 탄탄한 뼈대가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자신이 새롭게 풀어가고 싶은 내용을 다 풀지 못하게 하는 틀이 될 수도 있다. 『폐월 초선전』의 경우에는 원작이 뼈대가 아니라 틀이 되었다. 초선은 양부 왕윤의 뜻에 따라 동탁과 여포 사이를 오가며 이간질해, 동탁이 파멸하게 만들었다. 이 서사의 틀 안에서 인간 초선의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 소설의 작가는 어떻게 했을까? 초선을 왕윤에 대한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애정으로 움직이는 인물로 설정하고, 초선이 동탁과 여포를 이간질하던 시기는 초선이 동탁, 여포와 어떻게 성관계를 가졌고 거기서 어떤 것을 느꼈는지를 중점으로 묘사한다. 사람에 따라 취향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초선이 자신보다 서른 살은 많을 왕윤을 아버지가 아니라 연정의 상대로 애정을 쏟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동탁이나 여포나 잘못 건드리면 자신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아버지와 나라까지 파멸시킬 인물들인데, 그들 사이를 오가던 위태로운 시기의 초선에 대해 할 이야기가 오직 성밖에 없는가? 본문 뒤의 해설에서 평론가는 초선이 동탁과 여포와의 성관계에서 쾌락을 느낀 것을 주체성의 회복으로 보던데, 왕윤의 목적을 위해 이용당하고 동탁과 여포에게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상황에서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조차 가질 수 없는데 그 상황에서 주체성을 회복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작가의 이 두 가지 선택은 초선을 한 인간으로 되살려 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본다.
작가의 마지막 수는 초선에게 주는 결말이다. 전해지는 초선의 결말은 여러 가지다.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자결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여포의 아내가 되었다가 여포가 훗날 조조의 손에 죽자 여포를 따라 자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작가가 초선에게 준 결말은, 왕윤의 동반 자결 제의를 거절하고 혼자 천수를 누리다 죽었다는 것이다. 초선은 자신에게 같이 죽자고 하는 왕윤을 보고 나서야 그에게 자신은 언제까지나 이용할 도구일 뿐이고, 그와 함께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렇게 사랑했던 왕윤을 버리고서라도 살아남았다. 소설 전반부에서 묘사된 것처럼 영악하고 비정한 초선이라는 캐릭터가 할 수 있는 선택이기는 하고, 동탁과 여포와의 성관계에서 쾌락을 느낀 것은 그 상황에 대한 초선 자신의 방어 기제일 수도 있다. 그게 작가가 『삼국지』라는 틀 안에서 초선에게 줄 수 있던 최대한의 주체성이었을 것이다. 초선이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았을 때부터 가질 수밖에 없던 한계였지만, 그 한계를 돌파할 다른 방법은 없었을지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