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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말 ㅣ 풍요의 바다 2
미시마 유키오 지음, 유라주 옮김 / 민음사 / 2024년 7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해당 책과 『봄눈』의 스포일러 포함
민음사에서 미시마 유키오의 <풍요의 바다> 시리즈 첫 권 『봄눈』이 2020년에 출간되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같은 시리즈의 다음 권들을 기다렸다. 4년이나 소식이 없어 프로젝트가 중단됐나 했다. 그런데 작년 7월 두 번째 권인 『달리는 말』이 출간됐고, 지난 달에 세 번째 권 『새벽의 사원』이 출간됐다. 올해 안에는 마지막 권인 『천인오쇠』를 출간할 예정이라고 하니 <풍요의 바다> 시리즈 전체를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았다.
『봄눈』을 읽으면서 순간순간의 미세한 감각과 감정까지 포착할 수 있을 정도로 섬세한 감성을 지닌 사람이 어떻게 폭력적인 제국주의에 경도됐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 의문은 2년 뒤 다음 권인 『달리는 말』을 읽으면서 풀렸다. 『달리는 말』은 예상보다 작가의 극우 성향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소설이었다. 그가 빠져버린 파시즘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와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추구했던 순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봄눈』의 주인공 기요아키와 『달리는 말』의 주인공의 이사오는 겉보기엔 성향이 정반대다. 기요아키는 나라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자기 감정에만 집중해서 살지만, 이사오는 나라를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내던진다. 혼다는 이사오가 기요아키의 환생이라고 생각하지만 둘이 같은 시대에 공존했다면 틀림없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기가 생각하는 순수를 위해서 다른 것들은 다 내던져 버린다는 점에서 둘은 한 사람처럼 닮았다. 문제는 이사오가 추구하는 순수, 절대적인 가치가 천황제라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이 추구하는 순수와 어긋나는 것들은 무조건 악으로 간주하고 배척하고 제거하려고까지 하면서, 그의 순수는 폭력과 파시즘으로 변질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사오는 정계와 재계가 유착해 부정부패를 일삼으면서 자기들의 배만 불리고, 서민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현실에 분개한다. 여기까지는 나라를 사랑하는 국민으로서 당연히 가질 수 있는 감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사오가 생각하는 해결책은 상식적인 현대 민주 시민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정재계의 부패한 인사들을 암살하고 계엄령(이사오 무리가 거사를 일으키기로 계획했던 날이 우연하게도 12월 3일이니 지금 이 시국을 헤쳐 나가고 있는 한국 독자로서는 더 섬뜩하지 않을 수 없다)을 선포해 사회를 청소하고, 천황을 중심으로 모두가 단결해 과거의 태평성대를 회복하자니. 그의 해결책은 시대 착오적일 뿐만 아니라 일본에는 애초에 그런 과거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허상이다. 허상을 순수한 가치이자 궁극의 아름다움이라고 믿었던 이사오는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붙잡아도 허상을 향해 달려가다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자신이 바라던 최후를 맞는다.
작가의 삶만으로 작품을 평가할 수는 없지만, 『달리는 말』 속 이사오의 모습을 작가 자신의 모습과 겹쳐 보지 않을 수 없다. 운동이라고는 숨 쉬기밖에 안 하며 나라에는 관심도 없던 기요아키가 (혼다의 환생 이론이 맞다는 전제하에) 검도로 몸을 꾸준히 단련하며 애국심이 투철한 이사오로 환생한 것은, 작고 병약한 문학 소년에서 근육질의 극우 청년단 지도자로 변신한 미시마를 떠올리게 한다. 이사오에게는 상황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어떻게든 살 길을 찾아주었던 혼다와 사와 같은 어른들이 있었고, 미시마에게는 혼다와 작품 속에서 그가 말하는 논리들을 만들어낸 이성이 있었다. 그러나 이사오도 미시마도 그 모든 것을 뿌리치고 자신이 추구하는 절대적 가치를 향해 달려 나갔다 그토록 꿈꾸었던 할복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들의 마지막은 자신들이 생각했던 만큼 아름답지도 장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등장인물들이 마음속에 떠올리는 상념과 감정의 단편들, 그 순간 그들을 둘러싼 주변의 모든 것들을 세밀히 포착하는 솜씨는 여전하다. 도입부에서 혼다가 바라보는 무미건조한 법원과 교도소 풍경 묘사조차 혼다의 복잡한 마음 한 구석 한 구석을 더 생생하게 보여준다. 참신한 비유와 날카로운 통찰로 그 순간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을 더없이 적확하게 묘사한다. 뭘 해도 결론은 할복인 이사오의 심리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기는 하지만, 그가 어떤 사고와 감정을 통해 그런 결론에 이르렀는지는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사오의 무모한 행보를 이성의 눈으로 지켜보지만 결국 그의 순수함에는 감동을 받는 혼다의 모습에, 결국 순수의 손을 들어준 작가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미시마는 천황제와 극우 사상을 향한 이사오의 열정을 진지한 마음으로 썼겠지만, 맨 정신으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한 치도 타협하지 않는 순수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는 데 이 책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P.S. 『달리는 말』에서부터 번역자가 바뀌었고, 두 사람에서 한 사람으로 줄었다. 같은 시리즈의 전작인 『봄눈』과 번역의 톤을 맞추기 위해 출간이 늦어졌다고 한다. 『봄눈』에서 『달리는 말』로 이야기가 그대로 이어졌다고 느낄 수 있게 신경 쓴 것이 보인다. 그러나 『봄눈』과 달리, 문장 구조가 뒤엉킨 비문과 사람들이 평소에 잘 쓰지 않는 난해한 한자어가 곳곳에서 보인다. 『봄눈』의 번역자들이 문장 구조를 정돈하고 생경하고 난해한 한자어는 풀어 썼는데, 새 번역자는 영어 번역체가 심하고 일본어의 일상적 화법에서 많이 벗어났다는 원문에 가깝게 번역하다 그렇게 된 걸까('대칭을 이루는'이라고 옮겼으면 좋았을 텐데 '시머트리컬한'이라고 영어 발음 그대로 음차한 부분에서는 좀 놀랐다). 내가 『봄눈』을 읽은 게 2년 전이니 내 기억이 정확하지 않고 원문과 비교하지 않았으니 더더욱 정확하지 않겠지만, 읽으면서 그렇게 느꼈다. 그럼에도 글의 아름다움은 남아 있지만, 유려하고 부드럽게 읽혔던 『봄눈』 번역본의 한국어 문장들을 생각하면 아쉽다. 『새벽의 사원』과 『천인오쇠』의 번역은 어떨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