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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눈 ㅣ 풍요의 바다 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윤상인 외 옮김 / 민음사 / 2020년 9월
평점 :
작품 자체의 작품성과는 별개로 이 작가의 작품이 좋다고 말하기 꺼려지는 작가들이 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미시마 유키오다. 그가 극우 천황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이 책 『봄눈』으로 미시마의 글을 처음 접한 나는 읽으면서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문학적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왜 그런 사상에 빠져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이 작품이 속한 <풍요의 바다> 시리즈 이후 그가 더 이상 작품을 내놓을 수 없었다는 게 안타까울 정도였다. 상황을 그렇게 만든 게 작가 자신이었다는 게 더 안타깝다.
이 소설의 서사 자체는 통속적이다. 지체 높은 귀족 가문의 아름다운 청춘 남녀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헤어지는 이야기. 그렇다고 이 소설이 단순한 사랑 이야기인 것은 아니다. 『봄눈』의 남주인공 기요아키가 사랑하는 것은 여주인공 사토코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금지되고 불가능한 사랑에 빠진 자신의 감정이다. 귀족 가문에서 곱게 자란 도련님인 그는 손에 물 한 방울, 흙먼지 한 톨 안 묻히고 오직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게 살려고 한다.
그가 추구하는 세계에는 현실의 더럽고 속된 것, 복잡한 이해관계가 없다. 아름다움과 순수, 그것에 대한 도취만 집착만이 있을 뿐. 박경리 작가는 이러한 탐미주의를 일본 특유의 나약한 로맨티시즘이라고 했는데 그 말에 공감한다. 기요아키와 아야쿠라 백작 같은 나약한 로맨티시스트들에게 침을 뱉고 싶고, 등장인물 중에서 그나마 상식적이고 건실한 혼다에게 더 공감한다. 현실을 회피하면서 결벽적일 정도로 순수한 감정만을 추구하는 기요아키를 보면 아이고, 이 답답한 도련님아, 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그럼에도 글 자체의 아름다움에는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어떤 문장도 평범하지 않고, 어느 페이지를 펼치든 필사하고 싶은 문장들로 가득하다. 단순히 문장이 아름다워 감탄스러운 것이 아니라,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어도 두루뭉술하게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들과 모습들을 너무나 적확하게 표현해 내 더 감탄스럽다. 글 자체만으로 늘 곁에 두고 읽고 싶을 정도다. 예를 들어 '네 사람의 머리 위에는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 펼쳐졌다.'라고 단순히 쓸 수 있지만 작가는 이렇게 표현한다.
어느새 네 사람의 머리 위에는 별들이 가득했고 선명한 은하수가 천정에 걸려 있었다. ... 해가 지고 나니 훨씬 크게 울려 퍼지는 파도 소리, 낮에는 그토록 멀어 보이던 바다와 모래사장이 하나의 어둠으로 녹아드는 모습, 끝도 없이 증식하는 압도적인 별들의 복작거림....... 그런 것들에 둘러싸인 네 젊은이는 거대한 거문고 같은, 보이지 않는 악기 속에 안긴 듯했다.
그 악기는 틀림없는 거문고였다! 그들은 거문고의 몸통 속에 섞여 들어간 네 개의 모래알이었다. 그곳은 한없는 어둠의 세계였지만 몸통 바깥에는 눈부시게 빛나는 세계가 있었다. 한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팽팽히 당겨진 열세 개의 현에 더없이 새하얀 손가락이 닿으면, 유유히 운행하는 별들의 음악이 거문고를 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네 개의 모래알을 뒤흔들었다.
읽는 사람마저 밤하늘로 빨려들어 가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이렇게 섬세한 감성을 세밀하게 감지하고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폭력적인 사상에 사로잡혔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거기에다 작가 자신의 풍부한 지식도 소설 곳곳에 채워져 있다. 혼다가 서양의 자연법과 마누 법전의 종교와 뚜렷이 구분되지 않은 법을 비교하며 고찰하는 부분, 혼다와 태국 왕자들이 환생에 대해 토론하는 부분, 사토코를 만나게 해달라고 혼다가 아픈 기요아키 대신 부탁하러 갔을 때 월수사 주지가 혼다에게 법상종의 교리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부분은 굳이 넣지 않아도 됐을 것 같지만)에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이 소설에 쏟아부었다'는 작가의 말이 실감난다. 톨스토이의 소설들에서는 다양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토론하고 때로는 작가 자신이 길게 사상을 설명하지만, 그것이 뜬금없다거나 억지스럽다고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작품을 더 깊고 풍성하게 만드는데, 이 소설도 그렇다. 법과 종교와 철학, 사상에 대한 고찰이 있기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라는 얇은 겉껍질 안의 세계는 더 넓고 깊어진다.
<풍요의 바다> 시리즈의 1권인 이 책에서는 아직 제국주의나 천황주의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인 1910년대인 만큼 기요아키와 사토코, 혼다가 누리는 부와 안락한 생활을 받쳐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면 시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세상 물정 모르는 온실 속 화초 같은 이들마저 남을 부리는 것에도, 남이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것에도 너무나 익숙한 지배 계급이라는 것이 언뜻언뜻 드러날 때는 섬뜩하지만. 나머지 세 권에서 이야기는 어디로 뻗어나가서 독자를 어디로 데려갈까. 이 연약하지만 매혹적인 세계는 어떤 종말을 맞을까.
P. S. 원문 자체가 영어 번역체가 심한 데다 일본어의 일상적 어법을 벗어날 때가 많아 번역 자체가 전쟁 같았다는데, 이렇게 유려한 문장으로 옮겨내다니 번역자들과 편집자의 노고가 컸을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자연스러운 한국어 문장들로 접할 수 있게 해서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