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책을 알게 되고 읽게 되는 것이 즐겁다. 이 책의 제목만 먼저 봤다면 '그냥 중국 역사 소설이구나' 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그런데 대만 여행을 하면서 예전에 읽었던 대만 소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이 생각났고,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으로 검색하다 추리 소설 전문 잡지 『미스테리아』 2024년 11월 호에서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과 함께 다룬 중국 소설들 중 흥미가 가는 것을 찾아보게 되었다. 그중 한 권이 이 책 『풍기농서』였다. 어린 시절부터 『삼국지』를 좋아했고 『삼국지』의 등장인물 중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제갈량인데, 제갈량의 지시로 움직이던 가상의 첩보 조직 이야기라니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의 시간적 배경은 삼국시대 말, 제갈량이 위나라로의 북벌을 추진하던 시기고, 공간적 배경은 촉나라와 위나라가 대치 중인 중국의 서북 지역 농서隴西다. 제목 '풍기농서風起隴西는 '농서에 바람이 일다'라는 뜻이다. 제목대로 소설 속 농서 지역은 촉나라와 위나라의 첩보전으로 바람 잘 날이 없다. 위나라는 촉나라가 개발한 신무기의 설계도와 실물, 무기를 만드는 기술자를 노리고 있고 촉나라는 그것을 막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촉룡이라는 암호명의 위나라 간첩으로 인해 촉나라 요원들은 작전 수행에 번번이 방해를 받는다. 그런 데다 정보 기관과 군부의 알력, 같은 고명 대신(선대 군주의 유언을 받드는 대신)인데도 더 큰 권력을 쥔 제갈량을 향한 이엄의 견제까지 겹쳤으니 산 넘어 산이다. 촉나라 정보 기관의 요원들은 과연 신무기를 지켜낼 수 있을까. 촉룡은 과연 누구인가. 『풍기농서』는 이 얽히고 섥힌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스릴러다.
작가는 자신에게 영감을 준 것이 영국의 스릴러 작가 프레더릭 포사이스의 소설들이라고 하고, 포사이스처럼 스파이 소설을 쓰려고 했다고 한다. 삼국시대는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시대라 소설의 시대적 배경으로 선택한 것이지, 이 소설은 치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역사 소설이라기보다는 『삼국지』의 설정만 빌린 공상 소설이라고. 그런 것치고는 『삼국지』의 2차 창작이자 역사 소설로 봐도 꽤 탄탄하고 핍진성이 높다.
2차 창작의 미덕은 원작을 존중하는 것이다. 2차 창작 소설을 재미있게 읽다가 원작의 설정과 캐릭터 성격과 너무 동떨어진 묘사가 나오면 몰입이 깨진다. 그런 면에서 『풍기농서』는 걸리는 것이 없다. 제갈량, 이엄, 양의, 위연 등 『삼국지』에 원래 등장했던 인물들은 『삼국지』에서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더 입체적인 면을 드러낸다. 특히 제갈량은 분량이 아주 크지는 않지만 소설 전반에 영향을 미치면서 이야기의 열쇠를 쥐고 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몇 수를 앞서 보고 큰 그림을 그려내면서도, 누구보다 세밀하게 모든 것을 살핀다. 『삼국지』의 제갈량을 사랑하게 했던 매력들을 『풍기농서』의 제갈량은 고스란히 갖고 있다.
외국인 독자이기에 중국 독자처럼 고증의 허점을 찾지 못한 것일 수 있지만, 이 소설 속 세계가 삼국시대 촉나라와 위나라라는 것을 믿게 할 만큼 핍진성이 높다. 사문조와 정안사 같은 정보 기관은 작가가 만들어낸 조직이지만 촉, 위, 오 삼국의 국가 기관과 행정 체계는 꽤 정교하고 그 속의 관습과 관례도 현실적이다. 위나라 관리가 된 촉나라 고정 간첩 진공의 단출한 세간살이나 농서 지역 성 안 풍경의 묘사를 보면 당시의 일상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진공이 다른 촉나라 간첩과 접선을 시도하다 들른 국밥집의 훈훈한 연기, 그가 위나라의 군사, 행정 관련 정보를 얻으러 문서 창고에 들어갔을 때 창고 안의 싸늘한 공기와 죽간들 위에 덮인 먼지까지 느껴지는 듯하다. 고증보다는 탄탄한 세계관과 생생한 묘사가 『풍기농서』 속 촉나라와 위나라를 독자들의 머릿속에서 살아 숨 쉬는 세계로 만든다. 거기에 개정판에서는 고증에서 어긋난 부분들을 몇 군데 바로잡았다니 고증에도 아예 신경을 안 쓴 것은 아닌 것 같다(송나라 이전까지는 중국에서 '대인'이라는 존칭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이 책의 작가 후기를 통해 처음 알게 됐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스파이 소설이자 스릴러로서 잘 쓰였냐는 것인데, 나는 그렇다고 본다. 간결한 문장과 작은 단서들로 전체의 3분의 2 지점까지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가다, 마지막 3분의 1에서 이야기의 속도를 높이며 결말까지 달려간다. 그러니 인내심을 가지고 3분의 2 지점까지 문장 하나, 단서 하나 빠뜨리지 않고 읽어나간다면 마지막 3분의 1 분량에서 스릴러로서의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눈 코 뜰 새 없이 휘몰아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쌓아왔던 단서들을 충실하게 활용해서 진상을 밝히고 이야기를 풀어낸다. 주인공 순후는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에 촉나라 내부에서도 방해를 받으면서도 하나하나 장애물을 돌파하고 끈질기게 작전을 수행해 가는데, 그와 함께 소설에서 펼쳐지는 상황들을 헤쳐 나가면 결말로 나아가는 느낌이다.
『미스테리아』에서는 『풍기농서』가 잘 쓴 스파이 소설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주요 등장인물들이 추호의 의심도 없이 '한나라 부흥'이라는 대의를 외칠 뿐 그 대의에 조금도 의심을 품지 않고 성찰하지 않는 것을 아쉬워한다. 그것이 중국 스파이 소설이 검열을 회피하는 경로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하면서, 그런 제약을 뛰어넘은 중국 스파이 소설이 나오길 기대한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순후는 한나라 부흥을 위해 목숨을 걸고 분투했지만 결국은 자신이 제갈량의 장기판 위 장기말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허탈해한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첩보전에서 싸우던 순후도, 위나라와 촉나라 모두의 머리 꼭대기에서 모든 것을 자신의 큰 그림대로 움직이던 제갈량도 결말 시점에서 고작 3년 뒤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수십 년 뒤에 촉나라는 멸망한다. 인생의 무상함을 보여주는 결말이지만 이런 결말을 통해 모두가 목숨을 바쳐가면서 외치던 '한나라 부흥'이라는 목표가 결국 허상이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것이 소설 속 촉나라 간첩들이 말안장에 숨겼던 쪽지처럼 숨어 있는 성찰일지도 모른다.
P.S. 이 책은 2022년 24부작 드라마로도 만들어졌고 왓챠와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드라마는 원작보다 촉나라 고정간첩 진공의 비중을 더 늘리고 원작에 없는 여성 캐릭터들을 넣고 이야기를 더 드라마틱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아직 2회까지만 봤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어떻게 각색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