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적 상상력과 문화 - 개정판
정재서 외 지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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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에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나 그 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 <올림포스 가디언>을 본 덕분에 그리스 로마 신화에 친숙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2010년대부터는 <토르> 등 북유럽 신화를 모티브로 한 슈퍼히어로 영화들이 개봉해 흥행에 성공했다. 이렇게 신화가 최근 몇십 년 동안 각광받는 이유는, 삭막하고 차가운 현대 사회에서 상상력의 원천이 되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신화와 관련된 책도 해마다 출판 시장에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대부분 특정 지역의 신화를 소개하는 책이나 미술, 철학, 심리학 같은 다른 분야에 신화를 한 방울 떨어뜨린 교양서, 일반 독자가 읽기에 너무 어려운 신화 연구서다. 가장 쉬운 책과 가장 어려운 책 사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해줄 책을 찾기 어렵다.

이화여대에서 '신화적 상상력과 문화'라는 교양 수업의 교재로 쓰이는 이 책은, 신화 연구서는 아직 너무 어렵지만 단순히 신화라는 이야기 자체보다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알맞다. 여러 종류의 케이크를 한 판에 모아놓은 모둠 케이크처럼, 이 책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세계 여러 지역의 신화를 주제별로 소개하고 있고, 2부는 신화가 문학, 음악, 미술, 영화 등 문화 예술 작품에 미친 영향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3부는 다양한 신화 연구 이론, 분석 방법들을 설명하고 있다. 사실 각각의 부분만 해도 깊이 들어가면 책 한 권을 쓸 수 있을 만큼 많은 이야기가 나오지만, 한 권으로 신화라는 이야기 자체, 신화의 영향을 받은 작품 분석, 신화 관련 이론 세 가지를 모두 소개하려다 보니 아주 깊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중고등학생 정도의 지식을 갖춘 독자라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1부는 세계와 인류의 창조, 영웅의 모험과 귀환, 재앙과 형벌, 변신과 승화 등 전 세계 신화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에 따라 각 지역의 신화들을 소개하고 있다. 단순히 각 지역의 신화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양한 지역의 신화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요소들과 그 의미까지도 설명해 주고 있다. 각 요소들이 상징하는 의미를 하나씩 짚어가다 보면, 고대 인류가 혼돈과 같은 원시 상태에서 문화와 역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보인다. 신화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고대 인류의 정신과 문화, 역사를 반영하고 있는 유산인 것이다.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그리스 로마 신화뿐만 아니라 게르만 신화, 메소포타미아 신화, 이집트 신화, 인도 신화, 중국 신화, 한국 신화까지 다루고 있어, 그 신화를 낳은 문화권의 역사와 문화까지 살펴볼 수 있다. 한국 신화의 경우 단군 신화 등 일반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문헌 신화뿐만 아니라 무속 신화까지 소개하고 있는데, 다뤄야 할 내용이 워낙 많다 보니 아주 간략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아쉽다.

2부는 문학과 음악, 미술, 연극, 영화 작품 중 신화를 모티브로 하거나 신화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각 예술 분야에 신화가 미친 영향을 다 이야기하려면 끝이 없기 때문에 각 분야 중 몇몇 대표적인 작품만 간략하게 소개하고 분석하고 있다. 그래서 '맛보기'의 느낌이 가장 강한 부분이다. 2023년 개정판에서는 2008년 초판에 실려 있던 <와호장룡>과 애니메이션 <헤라클레스>의 분석 대신 애니메이션 <겨울왕국 2>와 영화 <토르>의 분석이 실려 있다. 초판과 개정판 사이 15년 동안의 변화를 반영한 것일 텐데, 이후에 새로운 개정판이 나온다면 또 다른 새로운 작품이 그 자리를 대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대의 흐름에 발 맞춰서 조금씩 책을 보완하려는 노력이 보인다. 특히 <겨울왕국 2>의 분석에서는 애니메이션 속 다섯 정령과 동양 철학의 오행을 연결시킨 것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신화학 이론과 연구 방법을 설명하는 3부는 이 책에서 가장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부분이다. 그러나 학부생들의 교양 강의 교재이기 때문에 깔끔하고 명쾌하게 각 이론을 정리하고 있다. 전문적인 용어나 개념은 예시를 들면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 엘리아데의 신화학 이론에 담긴 인종주의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등 좀 더 설명해 줬으면 하는 부분도 있지만, 분량의 한계 안에서는 최대한 친절하게 풀어냈다. 시험과 성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일반 독자라면 더 마음 편히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강의 하나가 이 책 한 권에 담겨 있기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 교양 강의 하나를 들은 것과 다름없다. 삶이 무미건조해 교양을 쌓고 싶다면, 신화라는 이야기 자체뿐만 아니라 그 이면의 의미, 신화가 여러 분야에 미친 영향까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은 좋은 읽을거리가 되어줄 것이다. 이 책에 간략하게 소개된 내용 중 더 자세히 알고 싶은 것이 있다면, 좀 더 구체적이고 학술적인 책으로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징검다리 삼아 더 풍성하고 깊이 있는 신화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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