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 천문학 - 미술학자가 올려다본 우주, 천문학자가 들여다본 그림 그림 속 시리즈
김선지 지음, 김현구 도움글 / 아날로그(글담)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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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문과인 내가 과학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은 천문학이다. 빛의 속도로 수백억 년을 가도 끝에 도달하지 못할 정도로 드넓은 우주, 하루가 1년의 두 배인 행성, 시간과 공간조차 왜곡시켜 버리는 블랙홀. 내 상상을 뛰어넘는 이런 우주 이야기들이 더없이 신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거기에 업으로는 삼고 있지 않지만 여전히 사랑하는 미술사 이야기가 더해졌으니, 이 책에 관심이 생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책의 구성은 두 파트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태양계 주요 천체들과 그 이름의 기원이 된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신들의 이야기, 후반부는 명화 속에 숨겨진 우주 이야기다.

토성은 공전 속도가 느리고 표면 온도가 매우 차가워, 이름의 기원이 된 사투르누스 신의 노쇠한 이미지와 겹쳐 보인다. 화성의 붉은색은 마치 피 같아서 이름의 유래가 된 마르스 신이 담당한 영역인 전쟁과 살육을 연상시킨다. 이런 식으로 행성과 그 이름의 기원이 된 그리스 로마 신의 이미지나 이야기를 연결시키는데, 결국은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이야기들을 그린 명화 이야기에 그 행성의 주요 특징, 그 행성에 대한 최근의 연구, 탐사 근황을 덧붙인 것이다. 명화 속에 숨겨진 우주 이야기로 책 전체를 채웠으면 더 흥미로웠겠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와 우주를 연결시켜 보는 것도 나름대로 낭만적이다.


아담 엘스하이머, <이집트로의 피신>, 1609년.

후반부의 명화 속 우주 이야기는 미술사학자, 또는 천문학자들이 나름대로 미술 작품과 천문학을 연관시켜 밝혀낸 것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엘스하이머의 그림 <이집트로의 피신> 속 달과 별 이야기다. 가로 41센티미터, 세로 31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이 작은 그림 안에 1200개의 별이 그려져 있다니 믿어지는가. 거기에 이전까지 서양에서는 달을 완벽한 천체로 여겨 티끌 하나 없이 매끈한 모습으로 그렸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는 달에 분화구가 그려져 있다. 그것도 갈릴레이가 처음으로 달에 분화구가 있다고 발표한 시점보다 9개월 전에. 엘스하이머는 과학에 관심이 많았고 천문학자들과 교류했다지만 어디까지나 화가였고, 천체를 신의 창조물이자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것으로 여기던 시대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달에 분화구를 그릴 생각을 했을까. 이 수수께끼가 이 그림을 더 신비하게 만든다.

그런데 책 속 도판의 화질이 좋지 않아 독자들로서는 달에 분화구가 그려져 있는지 확인하기도 어려운 것이 아쉽다. 그 뒤에서 이야기하는 루벤스의 그림 <달빛 풍경>처럼 각 그림의 디테일을 클로즈업해서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1889.

고흐와 관련된 이야기들도 흥미롭다. 고흐는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에 남은 것과 조합하고 자신의 의도에 따라 각 요소들을 배치했다. 그래서 그의 그림 속 천체들의 위치가 100퍼센트 정확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천문학자들은 그의 그림 속 천체들의 위치를 통해 그림이 몇 월 며칠 몇 시에 그려진 것이라는 것까지 추정했다. 미술사학자들이 고흐의 그림을 연대순으로 정리하는 데도, 고흐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그림이 그려진 순서를 더 생생히 느끼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고흐와 관련된 우주 이야기 중 가장 이상한 것은 고흐의 그림 속 소용돌이 이야기다. 그가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웠을 때 그린 그림들에서만 그림에서 난류 패턴이 뚜렷이 나타난다고 한다. 그래서 고흐가 우주의 본질을 꿰뚫어 봤다는 이야기까지 있는데, 진실은 아직까지도 알 수 없다.

전반부에서나 후반부에서나, 미술사 파트에서나 천문학 파트에서나 아주 어려운 이론은 없다.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의 나이면 이해할 수 있게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다. 동사로 풀어 쓸 수 있는데 명사를 많이 써서 어색한 문장이 종종 보이지만(영어 등 서구권 언어로 된 문헌을 자주 접하며 공부한 사람들의 글이 종종 이렇다. 영어 등 서구권 언어는 명사 중심 언어이기 때문이다), 글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천문학 파트는 천문학자인 남편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데, 아예 천문학자 남편과의 대화 형식으로 만들었으면 천문학 쪽 파트가 더 풍성하고 깊어져 더 흥미로운 책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무엇보다 미술사 책치고는 도판의 화질이 좋지 않아 그림의 디테일도 잘 보이지 않고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는 것이 아쉽고. 하지만 우주나 미술사 둘 중 하나나 둘 다에 관심이 있다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종이책이어서 이 책에서는 업데이트되지 못한 행성 탐사 근황

+ 목성 탐사선 주노는 2021년 마지막 정보를 수집하고 파괴될 예정이었지만, 2025년 9월까지로 임무 수행 기간이 늘어나 2023년 현재도 활동하고 있다.

++ 제임스웹 우주망원경은 2022년 12월 25일 발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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