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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세계
고정기 지음 / 페이퍼로드 / 2021년 7월
평점 :
영화 <지니어스>에서 콜린 퍼스가 연기한 주인공은 20세기 초 미국의 편집자 맥스웰 퍼킨스다. 그는 뉴욕의 유명 출판사 스크리브너스의 전설적인 편집자로, 스콧 피츠제럴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토머스 울프 등 미국 문학계의 쟁쟁한 작가들을 발굴하고 그들이 걸작을 써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편집자의 세계』는 그를 비롯한 15명의 미국 편집자들의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이들의 활동 시기는 191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로, 20세기 전반의 미국 문화는 그들의 노력으로 찬란하게 빛나게 되었다. 『위대한 개츠비』, 『분노의 포도』 등 문학사에 길이 남을 걸작들과 『에스콰이어』, 『코스모폴리탄』, 『리더스 다이제스트』 등 미국인의 패션과 라이프 스타일, 문화를 선도했던 잡지들의 뒤에 그들이 있었다.
20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미국 편집자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 독자에게 멀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편집자라는 직업의 큰 틀은 21세기가 된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덕분에 100여 년 전에서 수십 년 전에 활동했던 이들 미국 편집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편집자에 대해 잘 몰랐던 독자들은 편집자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알게 된다. 편집자가 단순히 원고의 오탈자만 잡는 사람이 아니라 저자와 함께 책을 만들어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편집자는 원고를 읽으면서 그 원고가 작품성과 시장성을 얼마나 갖추었는지 판단하고 그 원고의 출판 여부를 결정한다. 편집자는 저자와 논의하면서 초고를 더 완성도 있게, 트렌드에 맞게 재구성하고 다듬어간다. 책의 제본 방식, 표지 디자인에도 관여하며 책 제작 전반을 지휘한다. 출판사 판매 회의에서 자신이 편집한 책의 판매 전망을 설명하고, 책이 출간된 이후에는 그 책이 벌어들인 수입과 그 책에 대한 서평들을 살펴보며 그 책의 성과를 점검한다. 다른 출판사들과의 경쟁에서도 살아남아야 한다. 이렇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속으로는 치열하고 분주한 ‘편집자의 세계’를 책 한 권으로 엿볼 수 있게 된다.
편집자인 사람들은 지금 자신들이 하는 일과 고민을 백 년 전, 수십 년 전의 편집자들도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깊이 공감할 것이다. 출판사에 들어오는 수많은 원고들 중에서 옥석을 가려내야 한다. 이 책을 출간할지 말지, 출간한다면 어떤 방향으로 만들어갈지, 어떻게 홍보할지를 놓고 저자, 동료, 상사와 끊임없이 의논하고 갈등도 겪는다. 유명 작가의 원고를 출판하기 위해 다른 출판사들과 경쟁하고 선인세, 인세 등 저자와의 돈 문제도 처리해야 하며 때로는 출판사의 처사에 불만스러워하는 저자의 항의를 받는다. 『편집자의 세계』는 그런 문제들을 척척 해결하고 만드는 책마다 베스트셀러로 만들어내는 왕도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설적인 편집자들이라고 해도 출판 트렌드를 따라가는 것, 독자가 원하는 것을 포착하는 것을 평생 동안 어려워했다. 편집하는 책들을 모두 베스트셀러로 만들지는 못했고 출판 시장에서 실패하기도 했다. 좋은 원고를 알아보지 못하고 놓치기도 했다. 윌리엄 포크너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작가로 성장하도록 든든하게 지원해 줬던 편집자 삭스 코민스도, 존 오하라라는 다른 작가와는 원고 수정 문제로 갈등을 겪다 아예 그와 함께 작업하지 않게 됐다. 그들은 그저 그러한 실패와 시행착오를 겪어도 계속 자기 일을 사랑하며 그 일에 열정을 쏟았을 뿐이다. 그들이 넘어설 수 없는 전설이 아니라, 자신처럼 늘 고민하고 노력했던 한 편집자였을 뿐이라는 것이 지금의 편집자들에게는 용기와 위안을 줄 것이다.
편집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편집자의 세계를 알게 하고, 편집자인 사람들에게는 수십 년 전 먼 나라의 선배들이 자신과 같은 고민을 하며 분투했다는 것을 알게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의의일 것이다. 그런데 2020년대에 나온 책이라기에는 좀 오래됐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문체도 그렇고, 지금의 외래어 표기법에 맞지 않거나 표기법이 일관되지 않은 고유 명사들이 자주 보인다. ‘처녀작’, ‘여류’ 등 최근의 성 중립적 단어를 사용하는 추세에는 맞지 않는 단어들도 자주 쓰이고, ‘여성 편집자들은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원고에 너무 안이하게 공감한다, 남성 편집자만이 목적의식과 특수한 시장 감각을 가지고 평가할 수 있는 책들이 있다’는 윌리엄 타그의 편견 어린 발언을 별다른 비판 없이 그대로 싣고 있다. 2001년에 이미 폐간된 잡지 『마드무아젤』이 지금도 계속 간행되고 있는 것처럼 서술되고, 휴 헤프너가 ‘올해’ 32세가 되는 딸 크리스티 헤프너에게 『플레이보이』의 회장직을 물려줬다고 서술하고 있다. 크리스티 헤프너가 『플레이보이』의 회장이 된 것은 1984년의 일이고, 2009년에 이미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이렇게 시대에 맞지 않는 모습이 보이는 이유가 있다. 이 책이 1986년(인터넷 서점에서는 1991년에 출간된 것으로 나와 있지만 본문 뒤의 해설에서는 1986년 출간되었다고 하므로 후자를 따랐다)에 출간된 책을 재출간한 책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자분은 이미 고인이 되었기 때문에 저자의 원고에 손을 대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오탈자나 비문(오탈자와 비문이 눈에 많이 띈다), 최근의 외래어 표기법에 맞지 않는 표기는 바로잡고, 현재 변화한 상황은 주석이나 보충 설명 페이지로 보충했다면 이러한 단점이 보완됐을 것이다. 저자분이 인터넷도 없는 시절에 미국 대학 도서관의 자료까지 찾아가며 이 책을 완성했는데, 지금 어떻게 상황이 변화했는지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덧붙이는 수고를 더했다면 2020년대에 읽기 더 좋은 책이 되지 않았을까. 이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