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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없는 판타지 -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화사
오혜진 외 지음, 오혜진 기획 / 후마니타스 / 2020년 4월
평점 :
‘원본 없는 판타지’. 이 제목만으로는 이 책이 어떤 책인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그럼 부제를 보자.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화사’. 이제야 어떤 책인지 알 것 같다. 그런데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화사’가 어떻게 ‘원본 없는 판타지’와 연결이 되는 걸까. 이 둘의 관계를 알려면 이 책에서 말하는 ‘원본’과 ‘판타지’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이 책의 저자 중 한 명이자 엮은이인 오혜진은 ‘판타지’, 즉 환상이 현실을 반영하며 현실로 인해 만들어지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을 만들어내는 힘을 지닌 것으로 본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을 받고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서 일하는 것은 과거에는 환상이었겠지만 그 환상을 새로운 현실을 만들 동력으로 삼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 온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은 현실이 되지 않았는가. 오혜진은 문학이든 미술이든 영화든, 그 어떤 것으로든 그런 환상을 만들고자 하는 모든 의지와 실천을 문화로 본다.
그런데 단순히 남자와 여자, 이성애자와 성소수자의 위치를 바꾸는 것으로 젠더 간의 모든 불평등과 차별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 남성 권력자의 시선으로 기록되었다는 이유로 지금의 역사를 모두 부정하고 그것과는 아예 무관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야 할까? 그것이 페미니스트로서 오랜 성차별과 억압을 이길 수 있는 새로운 판타지,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는 최선의 방법인지, 오혜진은 의문을 제기한다. 남성 중심적, 이성애 중심적, 가부장적 질서 등 기존의 지배 질서와 전통을 ‘원본’으로 삼고 단순히 그것을 정반대로 뒤집는 것에도, 지금까지의 역사와 문화적 흐름에서 아예 벗어나 아무 맥락 없는 ‘원본’을 만드는 것도 진정한 해결책은 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단순히 기존의 지배 질서를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의 역사와 문화라는 맥락과 무관한 것도 아니지만, 지금까지 정상적인 것으로 규정되어 온 것들을 이탈하려는 시도들. 그것이 이 책에서 말하는 ‘원본 없는 판타지’, 현실과 무관하지 않고 현실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지만,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낼 힘을 품고 있는 판타지를 만들어내려는 시도일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그러한 시도들과 존재 자체로 그러한 시도였던 사람들, 그들이 만들어낸 사건들이다. 가수 이선희가 데뷔하던 1980년대에는 여성 가수가 긴 머리에 치마를 입고 화장을 하는 것이 정상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선희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끊임없이 ‘왜 치마를 입지 않느냐’고 묻고 ‘여자답게’ 차려입을 것을 권해도 짧은 머리와 안경, 바지를 고수했다. 남성은 ‘남성답게’, 여성은 ‘여성답게’ 살아야 한다는 이분법적 사고가 만연한 사회에서 그저 ‘자기다움’을 지키면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페미니즘적 실천일 것이다. 1980년대 당시에는 ‘보이시한’ 여성 가수의 옷차림이 성별 규범에 대한 저항이라기보다는 ‘남자를 모르는 건전한 소녀’로 비춰졌고,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중성적인 패션과 외모를 고수하는 여성 가수들에게 성별이나 성 정체성 논란이 일어날 정도로 우리 사회의 이분법적 성별 규범은 집요하지만. 한편 1980년대까지도 여성들은 책을 읽지 않거나, 가볍고 감상적인 책만 읽는다는 편견이 뿌리깊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여성들이 읽어 온 책들의 목록을 조사하면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사회과학 서적, 철학, 과학 이론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언론들이 ‘후진적인’ 독서라고 말했던 여성 수필, 로맨스 소설, 여성 잡지 읽기를 통해 여성들은 나름대로의 독서 문화를 형성했고 문학적 소양을 키웠다. 순문학 작품뿐만 아니라 당대의 여성지, TV 드라마까지 온갖 장르의 문화 예술을 섭렵했던 박완서는 문학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성장하며 한국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가 될 수 있었다.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여성은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규정하거나 여성은 남성 같은 역량을 갖추고 문화를 창조해 낼 수 없을 거라고 한계를 짓는 사회의 억압 속에서도 이런 실천과 시도는 계속되어 왔다.
이런 시도는 기존의 문화사의 언어나 방법론으로는 포착되거나 해석되기 어렵기에, 이 책의 저자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그것을 재구성하고 해석한다. 이 책의 대표 저자이자 엮은이인 오혜진은 스스로 이 책이 정연한 문화사라기보다는 ‘문화사의 언어와 규범으로 쉽게 포착, 해석되지 않는 존재, 사건, 실천들의 흔적이 보관된 작은 서랍장’에 가깝다고 말한다. 그 말대로 이 책에 실린 14편의 글은 소재도 스타일도 글의 난이도도 제각각이다. 하지만 그 14편의 글 전체를 관통하는 공통점이었다. 기존의 남성, 이성애 중심적, 가부장적 역사가 들여다보지 않은 곳을 들여다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열하게 시도하고 실천했던 사람들을 조명하며 그들의 존재를 지우는 기존의 질서를 비판한다는 것. 그럼으로써 저자들은 ‘페미니스트의 관점으로 문화사를 보는 것’을 넘어서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을 실천하고 있다. 독자들은 이들이 서랍장에 모아놓은 이야기들을 보며 기존의 역사, 문화사에서 걸러졌던 존재들, 실천들, 사건들을 발견하고 그들에게서 새로운 판타지, 새로운 문화, 문화사의 가능성을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