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바보배 ㅣ 읻다 프로젝트 괄호시리즈 6
제바스티안 브란트 지음, 노성두 옮김 / 읻다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바보들을 태우고 떠다니는 배들이 있었다는 중세시대의 기록들이 있다. 이런 ‘바보배’는 어떤 항구에서도 정박을 허가받지 못했기 때문에, 배에 탄 바보들은 하염없이 강과 바다 위를 떠돌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르네상스 시대 독일의 인문주의자 제바스티안 브란트(Sebastian Brandt, 1457-1521)에게는 세상 자체가 바보들로 가득 찬 ‘바보배’였을 것이다. 오스만 제국은 비잔티움 제국을 정복한 이후로 그 세력을 점점 넓혀가며 기독교 세계를 위협하고 있는데, 왕들과 귀족들은 권력다툼으로 바쁘고 성직자들은 부패해 있으며 서민들도 나태함에 빠져 쾌락만 좇고 있었다. 하느님이 주신 지혜, 즉 이성을 잃어버린 채 무지와 죄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방향을 잃은 세상. 이런 당대의 세상을 ‘바보배’에 빗대어 쓴 연작시가 『바보배』(Das Narrenschiff, 1494)다.
『바보배』는 시 본문과 관련된 짤막한 문구와 시 본문의 내용을 나타낸 판화, 시 본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위의 문구와 판화는 책을 열심히 사들이기만 하고 읽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바보를 풍자하는 것이다.
『바보배』는 당시 사람들에게 자신과 세상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었다. 권력에도 종말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채 권력에 취해 있는 왕들부터 그들에게 아첨하는 아첨꾼들, 돈을 바라고 성직자가 되어 품성도 성경에 대한 지식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성직자들,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사채업자들, 순진한 사람들에게서 수임료나 뜯어가는 변호사들까지 당대를 살아가는 바보들이란 바보들은 다 모았다. 그렇게 모은 바보들의 유형은 110여 가지나 된다. 권력이나 부를 갖고 있다 해서 브란트의 신랄한 풍자에서 벗어날 수 없다. 브란트는 자기 자신마저도 풍자의 대상에서 빼놓지 않고, 자신 또한 바보배의 일원이라고 말한다. 시 한 편에 판화 하나씩 함께 실려, 시에서 묘사한 바보의 추태를 시각적으로 한 번 더 접하며, 글을 모르는 문맹 독자도 어리석은 자신과 세상을 돌아볼 수 있었다.
『바보배』에 담긴 당대 사회를 향한 서릿발 같은 비판 정신과 다양한 인간 군상에 대한 통찰력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에게 지침이 되어주었고, 종교 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브란트는 르네상스형 인간이나 종교 개혁가보다는 보수적인 중세인에 더 가까운 인물이었다. 『바보배』에서 그는 세상 만물의 이치를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인간의 이성보다는 하느님의 지혜를 중시하고, 가톨릭의 부패를 비판하지만 가톨릭 자체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루터보다 먼저 새로운 교회를 꿈꾸었던 후스파(波) 신도들을 ‘사악한 교리를 퍼뜨리는 이단’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바보배』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실한 신자가 되라’는 훈계다. 하지만 절대왕정을 지지했던 토머스 홉스가 사회계약설을 통해 근대 민주주의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던 것처럼, 브란트의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비판 정신은 인문주의의 발전과 종교 개혁에 주춧돌 하나를 제공했다.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거울이었던 『바보배』는 지금의 우리에게는 당대를 바라보는 창이 되고 있다. 유난히 긴 99편 시에서 브란트는 유럽 각국의 지도자들에게 자국의 이익만 찾지 말고 협력해서 이슬람 세계로부터 기독교 세계를 지키자고 호소하고 있다. 여기에서 당시 유럽 사람들이 이슬람 세계로 인해 느꼈던 위기감을 엿볼 수 있다. 브란트는 103편 시에서 인쇄업자들이 돈만 되면 어떤 글이나 다 책으로 찍어내고, 나라마다 대학을 앞다투어 세우는 바람에 엉터리 책, 엉터리 학자들이 판을 친다고 한탄한다. 브란트에게는 개탄스러운 일이었겠지만 그만큼 당대 사람들의 지식을 향한 열망이 컸고, 지식의 대중화가 놀라운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에 섞인 당시 독일의 속담들과 판화에 그려진 사람들의 의복, 건축물, 거리의 풍경은 당대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지금도 『바보배』에 실린 다양한 어리석음은 남아 있기에,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바보배』는 당대를 바라보는 창일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이기도 하다. 자식들 기를 죽이면 안 된다고 훈계하지 않아 아이를 망치는 부모, 싼 맛에 일꾼을 부리면서 일이 왜 그따위냐고 불평하는 직장 상사, 불량 제품의 겉만 그럴듯하게 꾸며 비싼 값에 파는 상인, 질투심, 분노, 나태, 오만함 등에 사로잡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사람들. 500여 년이 지나도 사람들의 어리석음은 반복되고, 우리 중 바보배의 일원이 아닌 사람은 없다.
『바보배』는 15세기의 유럽인이 쓴 작품이기에 그 시대의 한계 또한 지니고 있다. 인종과 종교가 다른 외국인들을 ‘흉측한 외모의 하느님을 믿지 않는 바보’로 비하하고 권력의 허무함을 이야기하다가 뜬금없이 (브란트 자신이 속한) 신성로마제국은 존속할 것이라고 찬양한다. 여성에 대한 편견도 곳곳에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조차 그 시대를 더 알게 하며, 그 시대로부터 우리가 얼마나 멀리 나아갔는지 보여준다. 한편으로 『바보배』 속 바보들의 모습은 우리 자신의 모습과 겹쳐,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여기에 오늘날『바보배』를 읽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P. S. 읻다에서 번역 출간된 『바보배』(2006년 안티쿠스에서 출간된 『바보배』도 같은 번역자가 번역한 것이다.)는 표지와 각 장에 실린 판화들 하나하나의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고, 본문의 앞뒤에 『바보배』가 집필되고 출간되게 한 사회적 배경, 책의 구성과 미술사적 의미 등을 해설하고 있어 작품의 이해를 돕고 있다. 번역자인 미술사학자 노성두 교수는 현대 한국인 독자들을 위해 브란트가 본문에서 가득 인용한 독일 속담과 고대, 그리스 로마사의 인물, 사건들, 그리스 로마 신화, 성경 이야기들을 주석으로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다. 그뿐만 수백 년 전의 유럽인이 쓴 글임에도 판소리 사설을 풀어놓는 듯한 구수한 말투로 번역해, 브란트의 거침없는 입담을 바로 앞에서 듣는 것처럼 생생히 느끼게 한다.
*참고 자료
고명섭, 「당신을 바보배로 초대합니다」, 『한겨레』, 2006.12.7.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76779.html#csidx8debc6de3192cbb93ba705378823e05
김희윤, 「세상을 읽어내는 기호로서의 바보배」, 『아시아경제』, 2016.12.14.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6121313203098010.
「바보배 이야기가 광기에 대해 주는 3가지 교훈」, 『원더풀마인드』
https://wonderfulmind.co.kr/3-lessons-from-the-ship-of-fools-my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