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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재판의 나라에서 - 우리 사법의 우울한 풍경
정인진 지음 / 교양인 / 2021년 4월
평점 :
누군가와 법적인 다툼을 하게 돼 재판을 치른 적은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을로서 갑에게 권리를 침해당할 위기를 종종 겪었기 때문에 온라인으로 법률 상담을 한 적은 여러 번 있다. 그때마다 내 권리를 침해하는 사람들을 처벌하고 내 권리를 지키기에는 법이 너무 성기다고 느꼈다. 그들을 고발할 확실한 증거를 갖추는 것은 어려운데 그 사람들이 빠져나갈 구석은 너무 많았다. 그저 법률 상담만 잠깐 해봐도 이렇게 막막한데 본격적으로 재판에 뛰어드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난관에 부딪혀야 할까. 전직 판사, 현직 변호사로서 저자 자신이 보아온 수많은 재판과 그 문제점을 돌아본 책이 『이상한 재판의 나라에서』이다.
저자는 판사로서 재판들을 맡았을 때 자신의 한계와 무력감을 느꼈다. 재판정에 선 사람들은 자신의 밥그릇이 걸린 일이라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데, 자신은 아무리 많은 재판을 겪었어도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고 느꼈다. 자신의 판결이 옳은 판단이었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판사 자리에서 물러나 변호사가 되고 나서는 같은 헌법과 법률을 따라 재판하면서도 판사들마다 판결이 제각각인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정성 들여 증거 자료를 준비해도 판사들이 그 자료를 제대로 검토해 보지도 않고 대충 판결을 내려버리는 모습에 허탈해하기도 했다. 이런 현실의 원인을 살펴보고 그 해결책을 생각해서 법이 진정으로 일반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랐기에 저자는 이 책을 썼다.
저자가 생각하는 ‘이상한 재판’의 원인은 여러 가지다. 빨리빨리, 대충대충 사건을 심리하는 것은 판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배당되는 사건 수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일어나는 구조적 문제다. 하지만 편향되거나 보통 사람들의 상식에 어긋나는 판결을 내리는 것은 판사들 자신의 문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판사 자신들이 오만과 아집을 버려야 한다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사법권은 독립을 보장받아야 하고 판결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법과 판사 자신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려버리고, 결국 판사는 오만과 아집에 빠져버리게 된다. 우리나라의 형사 소송 규칙 제147조에는 “재판장은 판결을 선고함에 있어 피고인에게 적절한 훈계를 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는데, 반면 미국의 법관 윤리에서는 판사가 법정에서 훈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정설이다. 재판 당사자는 판사에 비해 약자의 입장에 서 있고, 판사로 대표되는 국가 권력이 재판 당사자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확신하는 순간 재판 당사자에게 전체주의의 폭력을 휘두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판사들은 피고에게 훈계를 늘어놓기도 하고 때로는 재판 당사자들에게 막말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저자가 법관들에게 바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 자신을 과신하고 법정에서 제왕적 권한을 행사하면서 자의적 판단을 내리지 않고, 법의 원칙을 지키는 것. 하지만 법리와 판례를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사실 관계와 그를 둘러싼 다양한 견해들을 꼼꼼히 살펴볼 것. 내가 내리는 판결이 사회적으로 어떤 결과, 영향을 미치는지 진지하게 검토해 볼 것. 원론적인 해결책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저자가 수십 년 동안 법조계에서 재판을 겪고 오랜 시간 고찰하면서 내린 결론이다. 간단한 결론인 것 같지만 법조계가 그동안의 관성에서 벗어나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스스로를 개혁하려면 꼭 필요한 태도이다.
이 책에 실린 글 중 대부분이 같은 법조인, 더 나아가 법조계 전체를 향한 비판과 조언이지만, 「변호사 고르기」와「변호사 사용법」은 법적 분쟁을 준비해야 하는 평범한 국민들을 위한 글이다. 「변호사 고르기」에서 저자는 무조건 이길 수 있다며 당장 기분을 좋게 해주는 변호사보다는, 당신의 피눈물이 묻은 권리와 이익을 무겁게 알고 지켜주는 변호사를 선택하라고 조언한다. 「변호사 사용법」에서는 어떻게 하면 변호사와 연락이 닿을 수 있는지, 본격적으로 재판을 준비하기 전 법률 상담은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변호사에게 사건을 맡기는 데 비용은 얼마나 드는지, 변호사와는 어떻게 계약하고 어떻게 함께 송사를 진행해 가야 하는지 단계별로 차근차근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평범한 사람들이 험한 세상에서 생각지 못한 위기를 맞았을 때 법적인 도움을 제대로 받을 수 있길 바라는 저자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저자의 애정은 인권 문제에 대한 저자의 단호한 태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내 몸을 통제할 자유는 기본적 인권이고 출산을 강제하기에는 여성들이 처해 있는 사회경제적 여건이 어렵기에, 여성에게만 형사 책임을 지우는 낙태죄는 전면적으로 비범죄화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동성애가 자신들의 교리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차별금지법 제정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개신교도들에게, ‘기독교도가 아닌 이에게 기독교의 참된 가치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대한 존중’이라며, 교회는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도 멀리해야 옳다고 말한다.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2021년 1월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들의 손을 들어준 것을, 한일 분쟁이라는 틀 안에서만 보려 하지 말고 국가적 차원의 성폭력에 내린 사법적 판단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법 앞에 선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에 대해서는 이렇게 단호한 태도를 취하기에 저자를 더욱더 신뢰할 수 있다.
2018년 우리나라의 고소 건수는 약 55만 건에 달했다. ‘소송 사회’라고 해도 될 정도로 형사 소송이 빈번한 나라인데, 사람들은 소송이라는 비생산적인 절차에서 자신을 소모시키기만 하고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한다. 저자는 토론과 타협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소송이 아닌 공론장에서 해결되고, 법이 공동체에서 정의와 연대를 이루는 데 올바르게 사용되기를 바란다. 단순히 ‘이상한 재판’이 일어나지 않고 ‘좋은 재판’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데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사법 환경이 조성되고 법이 공동체 전체의 정의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수많은 재판 속에서 당사자들과 법조인들이 분투하고 있을 지금 너무 먼 이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이상을 향해 조금씩이라도 나아가고 변화하려 노력할 때 우리의 사법 현실은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