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만의 집
사샤 나스피니 지음, 최정윤 옮김 / 민음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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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숨은 글에 이 작품과 『백 년 동안의 고독』스포일러 포함, 모바일 버전과 앱에서는 숨은 글 기능이 포함되지 않으니 스포일러를 피하시려면 스포일러 표시 부분 아래를 읽지 않으시면 됩니다.


  입구는 있어도 출구는 없는, 고요하면서도 뭔지 모를 불안이 느껴지는 외딴 마을 레 카세. 이곳을 배경으로 배신, 도피, 실종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소개 글을 보고 알 수 없는 기이한 일들이 일어나는 섬뜩한 이야기를 기대했다. "이 마을이 괴물이라는 생각이 마음에 드네. 그런데 마을이 주민들을 잡아먹는다고?" 뒤 표지에 적힌 이 대사를 보고 그런 기대가 더 커졌고. 불길한 분위기가 감도는 폐쇄적인 마을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를 다룬 고딕 소설(중세의 고딕 양식으로 된 저택을 배경으로 유령, 살인 등 기괴한 사건이 벌어지는 소설을 뜻했지만, 오늘날에는 그 뜻의 범위가 넓어져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거나 인간의 이상 심리 상태를 다룬 소설까지 포함하게 되었다.)이거나, 『백 년 동안의 고독』처럼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상처럼 일어나는 마을을 그린 마술적 리얼리즘 소설일 줄 알았다. 


 예상과 달리 비현실적인 일은 이 소설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청각장애인이 번개를 맞고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을 제외하면 현실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뿐이다. 그런데도 이 소설이 괴기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마을 밑바닥에 사람들의 온갖 욕망과 악한 마음이 고여 있는 듯한 분위기 때문이다. 두세 사람을 제외하면 소설에 등장하는 마을 레 카세의 사람들은 모두 추잡하다. 불륜은 예삿일이고 마을 어딘가에서 살인, 감금, 중상모략, 배신, 도피 행각, 차별과 혐오 등 온갖 추악한 일이 일어나는데 주민들은 자신들이 멀쩡하고 상식적인 양 행세한다.


  이러한 마을의 진상은 마을 주민들이 한 사람씩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으면서 서서히 풀린다. 한 사람의 이야기 속에 등장했던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앞서 이야기한 사람이 보지 못한 그 사람의 뒷이야기가 밝혀지는 식으로. 파이를 한 겹 한 겹 쌓아 올리듯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쌓아 올리며 마을 전체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솜씨가 뛰어나다. 이야기 하나하나도 역겹지만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다. 마을 사람 20여 명의 이야기를 듣고 스무 편쯤의 막장 드라마에 지쳤을 때 나오는 두 이야기는 독자가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곳이다. 따뜻한 인류애가 느껴지는 니코데모와 어머니의 이야기와 상류층과 자신의 계급 격차에 씁쓸해 하면서 풋풋한 우정을 경험하는 마르코 팔라체시 박사의 어린 시절 이야기. 이 마을에서 그나마 고결하고 인간미 있다고 할 만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마지막 한 챕터, 사무엘레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모든 것들을 뒤집는다. 그렇게 이야기가 뒤집히지만 작가가 보여주는 것은 한결같다.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표면 아래 인간의 추악함이 숨겨져 있고, 인간들은 자신이 저지른 짓을 숨기면서 그것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어떤 일이라도 저지른다는 것. 그것이 남기는 암울한 그림자는 읽고 나서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스포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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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 소설 속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는 사무엘레가 머릿속으로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한 마디로 "아 젠장, 꿈이네." 소설 속 이야기가 현실이 아니라는 복선은 여기저기 있었다. 사무엘레의 연인 클라라가 지적했듯이, 니코데모 템페스티, 아니, 그인 척했던 독일군 패잔병 아미코 프리츠는 세계적인 체스 선수가 되어 얼굴이 널리 알려졌는데도, 그의 옛 연인은 프리츠에게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프리츠나 그의 양어머니와 아무런 접점이 없는 알도 팔라체시는 아미코 프리츠가 군에서 낙오되고 마을 뒷산을 헤맸다는 이야기를 아들에게 들려준다. 아버지의 집착에 질려 가출한 엘레오노라는 오갈 데 없는 자신을 거두어준 보리안이 자신을 구속하려 들자 보리안의 집에서도 나와버린다. 그렇게 구속되는 것을 싫어하는 엘레오노라가 스스로 사무엘레의 집에 갇혀서 그만을 기다린다. 이런 모순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심은 것이 아닌가 한다. 이 모든 이야기가 현실이 아니라는 암시를 독자에게 군데군데 남겨둔 것이다.


  실제 레 카세 마을은 사무엘레가 만들어낸 이야기 속에서만큼 지독한 악의 구렁텅이는 아닐지 모른다. 소설 밖의 우리가 우리만의 어두운 비밀을 감추고 있듯, 완전히 선하지도 완전히 악하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평범한 마을이 아닐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지는 않으니 아예 허구는 아니겠지만 사무엘레가 생각해낸 만큼 극단적인 이야기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옮겨갈수록 부풀어나고 더 자극적으로 변하지만, 정작 실상은 별 것 아닌 경우가 많으니. 떠나간 부모의 사랑을 그리워하고 마을 아이들에게는 따돌림당했던 사무엘레의 내면의 어두움이 레 카세를 실제보다 더 어둡고 위험한 곳으로 만들지는 않았을까 싶다.


  사무엘레가 만들어낸 이야기 속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악행을 직시하지 못하고 회피하듯이, 사무엘레도 자신이 만든 이야기로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회피한다. 사무엘레는 연인 클라라가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갖는 것을 목격하고, 그녀를 해안 절벽에서 밀어서 죽였다. 그 기억을 지우기 위해 엘레오노라라는 존재를 만들어낸다. 현실에도 엘레오노라가 있기는 하지만 사무엘레의 가상현실 속 엘레오노라와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다. 현실의 엘레오노라는 사무엘레 때문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혼수상태에 빠진 피해자로, 사무엘레와 어떤 감정적인 교류도 하지 않았다. 가상현실 속 엘레오노라는 실제 연인 클라라처럼 아름답고 사랑스럽지만, 밖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노는 것을 좋아하고 결국 바람까지 핀 클라라와 달리 사무엘레 한 사람만을 바라본다. 아버지와 보리안의 간섭은 견디지 못했으면서 사무엘레와 함께하기 위해서는 사무엘레의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다. 그런데다 죽음까지 함께한다. 사무엘레와 엘레오노라의 최후는 언뜻 보면 애틋하지만, 실제 엘레오노라의 의지와 감정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사무엘레만의 환상이다.


  작가는 결국 자신이 현실이라고 믿는 가상현실을 선택한 사무엘레를 동정하고 그의 최후를 애틋하게 그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두운 과거가 있고 연인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해서 그 연인의 목숨을 빼앗는 게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다. 사무엘레가 무엇보다 진짜라고 느끼는 엘레오노라도 그의 입맛대로 만들어진 허상일 뿐이다. 매일 수많은 여성들이 연인이나 남편의 손에 죽는 현실을 생각하면 사무엘레의 환상이 마냥 애틋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사무엘레가 자신이 클라라를 죽인 것을 깨닫고도 전혀 후회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엘레오노라와의 행복한 사랑이라는 가상으로 뛰어들었으니 더더욱. 나는 사무엘레를 동정하지 않고, 그와 마지막으로 함께한 것은 허상일 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무엘레에게 따뜻한 결말(현실적으로는 비극적인 결말이지만 사무엘레 자신에게는 행복한 결말)을 준 작가의 선택을 지지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쌓아가는 작가의 솜씨는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이야기를 마무리한 방식은 높이 평가할 수 없다. 


P. S. 마을 전체가 비현실적인 천재지변으로 사라지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몰살당하는 결말(『불만의 집』에서는 사무엘레의 머릿속 가상현실에서 일어난 일이지만)은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떠올리게 했다. 사무엘레의 머릿속 마을에서 비현실적인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데도 이 소설 특유의 어둡고 기묘한 분위기는 묘하게 마술적 리얼리즘을 떠올리게 한다. 마을 사람 한 명 한 명이 최후를 맞는 모습이 각각의 캐릭터에 맞게 잘 쓰여졌고, 그렇게 되기까지의 서사도 잘 구축되어 와서, 어쩌면 레 카세 마을의 이야기가 사무엘레의 머릿속이 아니라 (소설 속에서) 실제인 쪽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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