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 왔을 때 부모님이 '내 자식이 빨갱이라니'라고 한탄하실까 봐, 부모님이 보시지 않는 곳에 책을 두었다. 지금 정부 편을 들었다고 '얘가 좌파가 다 됐네'라고 말씀하시던 분들이니. 그분들에게 공산주의는 나라를 망치고 세상을 무너뜨리는 몹쓸 것일 뿐, 구체적으로 어떤 사상인지는 알지 못하신다. 나도 진보 성향이라면서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두루뭉술하게 알고 있을 뿐이고, 『공산당 선언』을 그때까지도 읽어보지 않았었다. 너무 늦었지만 한때 세상을 뒤흔들었던 이 고전을 직접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에 책을 펼쳤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라는 그 유명한 첫 구절을 지나 바로 다음 문단에 『공산당 선언』을 썼을 때가 아니라 지금의 이야기인가 싶은 부분이 나와 놀랐다. 


"정권을 잡은 반대파들에게서 공산주의적이라고 비난받지 않은 야당이 어디 있으며, 좀 더 진보적인 반대파나 반동적인 적수들에게 공산주의라는 낙인을 찍으며 비난하지 않는 야당이 어디 있겠는가?" p. 15.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후로 정권을 잡은 반대파들에게서 공산주의적이라고 비난받지 않은 야당이, 좀 더 진보적인 반대파에게 공산주의라는 낙인을 찍으며 비난하지 않은 야당이 있었던가. 반대파에게 '빨갱이'라는 비난을 퍼부은 정치 세력들은 자신들이 비난하는 반대파가 실제로 어떤 정치적 노선을 지니고 있는지는 상관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저자들이 마치 먼 나라의 미래까지 들여다본 듯해 오싹하기까지 했다.


  페이지를 넘기니 지금의 이야기인가 싶은 이야기들이 더 많이 나온다. 자본주의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마냥 해맑던 내가 어른이 되고 스스로 생계를 꾸리게 되면서 느낀 자본주의의 비정함은, 백여 년 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을 썼을 때의 현실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부르주아들)은...인간과 인간 사이에 적나라한 이해관계, 무정한 현금 지불 외에 다른 어떤 끈도 남겨두지 않았다. 그들은 신앙심에서 우러나오는 경건한 광신, 기사의 열광, 속물적 애상의 성스러운 전율을 이기적 타산이라는 얼음같이 차가운 물 속에 익사시켰다. 부르주아지는 개인의 존엄을 교환 가치로 용해시켰고, 문서로 확인되고 정당하게 획득된 수많은 자유들을 단 하나의 비양심적인 상업 자유로 대체했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종교적, 정치적 환상들로 은폐된 착취를 공공연하고 파렴치하며 직접적이고 무미건조한 착취로 바꿔 놓았다.

  부르주아지는 이제까지 존경받으며 경외의 대상이었던 모든 직업에서 그 신성한 후광을 걷어내 버렸다. 부르주아지는 의사, 법률가, 성직자, 시인, 학자 등을 자신들에게서 돈을 받는 임금 노동자로 바꿔놓았다. 

  부르주아지는 가족 관계 위에 드리워졌던 감동적이고 감상적인 베일을 찢고 그것을 순전한 금전 관계로 전환시켰다." -p. 18~19.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인간과 인간 관계의 본질을 변질시키는지 문학적인 문장들로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들의 자본주의 비판 중에서도 '개인의 존엄을 교환 가치로 용해시켰다'는 말이 특히 뼈저리게 와 닿는다. 나 자신이 잘 팔리지 않는 상품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면접 때마다 나의 상품 가치를 열심히 이야기하지만 면접관은 나보다 상품 가치가 더 높아 보이는 지원자를 선택한다. 그때마다 다시는 팔리지 않아 아무 데도 쓰이지 못한 채 영영 한구석으로 밀려나서 잊힐까 두렵다. 운이 좋아 내 노동력을 사는 사람이 나타나도, 나보다 더 적게 받고 더 빨리, 더 많이 일하며 불평하지 않는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까 걱정한다.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데 나 자신이 존엄하다고 주장해도 누가 그걸 믿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 모두는 교환 가치에 따라 거래되는 상품이 되었으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이해관계, 금전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저자들은 자본주의가 인간들과 그들 사이의 관계를 변질시킬 뿐만 아니라 스스로 붕괴할 가능성을 품고 있어 더욱 위험하다는 것을 폭로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스스로가 만들어낸 거대한 생산력을 주체하지 못하는 자본주의를 '자신이 주문을 외워 불러낸 괴물의 힘을 제어하지 못하는 마법사'에 비유한다. 상품의 생산과 소비의 균형이 깨지는 경제 공황은 사회 전체를 위기와 혼란에 빠뜨린다. 결국 자본주의는 몰락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승리할 것이라는 그들의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때때로 찾아오는 경제 공황은 자본주의를 대신할 새로운 경제 체제가 필요하지 않은지 의문을 품게 한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발전해 온 과정을 설명한 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부르주아들이 공산주의에 쏟는 비난들을 하나하나 반박한다. 부르주아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사적 소유를 폐지하려는 데 경악하지만, 90퍼센트의 사람들이 사적 소유를 할 수 없게 만든 것은 바로 부르주아들이라고. 사적 소유가 폐지되면 모든 노동이 중단되고 세상에는 게으름이 만연할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따지자면 노동하지 않으면서 얻기만 하는 부르주아 사회는 진작에 끝장났어야 했다고. 공산주의자들이 부인 공유제를 도입하려는 게 아니냐는 질문에는, 부인을 생산 도구로만 보기에 생산 도구를 공유하자는 주장을 부인 공유제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냐고 반박한다. 그러면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여성을 희롱하고 결혼을 했어도 부정을 저지르면서, 공산주의자들이 부도덕하다고 분개하는 부르주아들의 위선을 폭로한다. 정작 공산주의자들은 부인들이 단순히 생산 도구로만 여겨지는 지금의 상황을 타파하려고 하고 있다. 부르주아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신성한 가족 관계를 무너뜨린다고 하지만, 부모가 아이들을 착취하도록 방치하고 아이들을 노동 도구로 이용하는 것은 그들이다. 이렇게 부르주아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퍼붓는 비난을 뒤집어 당시 현실의 모순을 폭로하고 비판하고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철저히 현실에 입각해 사상을 펼쳐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병폐를 근본적으로 없애기 위해 그들이 선택한 해결책은 기존 사회의 질서를 철저하게 파괴하는 것이다.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프롤레타리아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 이들이 이야기하는 조치들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전체주의가 아닌 민주주의를 지향했지만, 그들이 제시한 정책들 중에는 전체주의로 흘러갈 위험이 있는 것들(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노동 강제, 국가의 수중에 운송 제도 집중 등)이 있다. 실제로 이후에 세워진 공산주의 국가들 중 말로만 공산주의이지 실제로는 전체주의가 되어버린 국가들도 많다. 


  하지만 고율의 누진세, 모든 아동의 무상 공공 교육, 모든 아동의 공장 노동 폐지 등 이들의 대안 중 지금의 우리 사회에도 영향을 미치거나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것들도 있다. 여성들을 아이를 생산하고 양육하는 도구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려는 태도에서도 페미니즘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생각하는 공산주의의 이상향은 모든 사람들의 뜻을 일치시키는 획일화된 사회가 아니라,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의 연대였다. 그곳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를 자유롭게 발전시켜, 사회 전체의 발전을 이끌어낸다. 


『공산당 선언』의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고 지금의 세계에서는 너무나 낡아버렸다. 하지만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괴물이 되어버린 자본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정신, 가족 제도, 사회 질서 등 기존의 틀에 사람들을 가두려기보다는 그들이 실질적으로 인간답게, 자유롭게 살게 하기 위해 싸우려 했던 투쟁 정신은 아직도 생생하고, 앞으로도 영원히 낡지 않을 것이다. 



『공산당 선언』을 읽기 전 영국의 만화가 마틴 로슨이 그린 만화 버전 『공산당 선언』을 미리 읽어 보았다. 내가 읽은 책세상판 『공산당 선언』이 독일어 원문을 번역한 반면, 이 만화 버전은 영어판을 번역한 것이다. 하지만 엥겔스가 직접 감수한 1888년 영어판을 번역한 것이라니, 번역의 신뢰도는 그렇게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처음 『공산당 선언』을 읽은 나와 달리, 로슨은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 시기에 『공산당 선언』을 처음 읽었다. 열여섯 살짜리 소년의 눈에 『공산당 선언』은 얇지만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를 포괄하며 엄청난 권능을 지닌 책이었다. 그는 이때 받은 강렬한 인상을 수십 년 뒤 만화로 그려냈다. 


마틴 로슨의 만화 버전 『공산당 선언』에서 타이프라이터와 변기가 합쳐진 모습의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을 착취해 이윤을 얻어낸다. 종교조차 자본주의 앞에 힘을 잃은 현실을, 자본주의 앞에서 달아나는 성직자들로 묘사했다.


 페이지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지옥도가 넘실댄다. 타이프라이터 머리를 단 변기로 묘사되는 자본주의는 말 그대로 노동자들을 갈아내고 쥐어짜며 이윤을 얻어낸다. 노동자들은 아예 팔다리가 방직기의 나무 틀로 변해 버려 인간 기계가 되어버렸다. 강물은 노동자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지옥도를 누비면서 자본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들이 하는 모든 대사는 『공산당 선언』에서 발췌한 것이다. 출판사에서는 대사 곳곳에 주석을 꼼꼼히 넣었다. 글자가 워낙 작아 대충 읽다가는 주석 표시를 놓칠 수 있다.


부르주아들 앞에서 스탠딩 코미디 쇼를 하는 마르크스는 온갖 야유와 아우성 속에서도 꿋꿋하게 부르주아들의 위선을 비판한다.


  부르주아들의 비난에 반박하는 내용은, 어느 클럽에서 스탠딩 코미디쇼를 하는 마르크스와 그에게 야유를 보내는 부르주아들로 각색했다. 이 만화에서 가장 박진감 있는 부분이다. 마르크스는 자기 앞에서 아우성치는 부르주아들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열변을 토한다. 부르주아들이 아내를 단순한 생산 도구로 간주한다는 부분에서는 공장의 기계가 되어 말 그대로 아이를 생산하는 여성들의 모습이 나온다. 그 위 컷에서는 아이들이 상품처럼 가득 실린 상자가 그려져 있고, 그 상자에는 '애새끼 제조 회사'라고 적혀 있다. 부르주아들의 성적 타락과 위선을 비판하는 다음 장면에서는 프롤레타리아 여성이 부르주아에게 성추행당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신랄한 비판은 거리낌 없이 세상의 추악함을 그려내는 그림체 덕분에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공산당 선언』은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강력한 마지막 구절로 마무리되고, 로슨은 그 구절과 함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처럼 노동자들을 이끄는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그려넣는다. 대단원의 마지막 장면으로 어울리는 모습이지만, 로슨의 만화는 이 장면으로 끝나지 않는다. 만화는『공산당 선언』이후의 모습까지 묘사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동상은 세월의 풍파를 겪어 녹아버렸고 공산주의는 무너졌다. 자본주의는 머리만 PC로 바꿔 단 채 노동자들을 페이스북으로 현혹시킨다. 거리에는 '유령이 떠돌고 있다'는 『공산당 선언』의 첫 구절이 낡은 스피커에서 희미하게 들려온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누군가는 그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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